Interview by Dinah Eng
1970년대 후반, 바나나 리퍼블릭은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마케팅에 처음 적용해 카탈로그를 정글 트레킹과 사파리 이야기로 채웠다. 둘 다 기자 출신인 멜(67)과 그의 아내 퍼트리샤(63)는 그들의 경험을 살려 소매업계의 신화를 이룩했다. 신간 '와일드 컴퍼니: 바나나 리퍼블릭의 비화 Wild Company: The Untold Story of Banana Republic'에서 상세히 기술된 이 벤처기업(현재는 갭 Gap이 소유하고 있다)은 지금 세계적인 브랜드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음은 2012년 3분기까지 순매출 20억 달러를 기록한 바나나 리퍼블릭의 지글러 부부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멜 지글러: 나는 스크랜턴 Scranton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담뱃잎, 담배, 사탕을 파는 작은 도매업을 하셨다. 우리 가족은 가난한 편이었지만, 어머니가 알뜰하게 살림을 잘하셨다.
퍼트리샤 지글러: 내 아버지는 웨일스, 어머니는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난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직업이 세 개였지만, 우리 집엔 늘 돈이 없었다. 미술을 전공한 나는 일자리가 필요해지기 전까지 자유롭게 여러 학교와 지역을 돌아다녔다.
멜: 기자라는 직업은 내게 있어 흥미롭고 활동적인 생계유지 수단이었다. 콜롬비아 저널리즘 대학원(the Columbia Graduate School of Journalism)을 졸업한 후 벨라 압저그 Bella Abzug와 그녀의 의회 생활 첫해에 대한 집필을 마무리했다. 1972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구를 만난 후 그 도시에 푹 빠져들었다. 이 시기에 패티 허스트 Patty Hearst 납치사건 *역주: 미국의 언론재벌 허스트 집안의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가 좌익게릴라에 납치된 사건. 인질이 납치범과 동화해간다는 '스톡홀롬 신드롬'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꼽힌다,,길거리 총기난사, 조디악 Zodiac 연쇄살인사건 *역주: 1960~70년대 미국 전역을 경악케 했던 살인사건. 5명이 살해됐지만 아직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등이 터졌다.
퍼트리샤: 1974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San Francisco Chronicle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할 당시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멜을 만났다.
멜: 우리는 둘 다 20대였고,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1977년 무렵 언론계를 떠나는 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 퍼트리샤가 집에 찾아와 일을 그만뒀다고 했는데, 사실 나도 같은 날 먼저 사표를 냈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잘 맞았다.
퍼트리샤: 둘 다 들떠 있었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불안정하다는 현실을 곧 깨달았다.
멜: 당시 호주에 잡지 관련 일이 있어 시드니에 갔다가 재고상품 매장에 들렀다. 그곳에서 사파리 재킷처럼 보이는 멋진 카키색 재킷을 발견했다. 공항에 마중 나왔던 퍼트리샤가 즉각 그 옷의 숨은 매력을 알아봤다.
퍼트리샤: 내가 그 옷을 조금 수선하기로 했다. 팔꿈치 부위에 가죽패치를 덧붙이고 아래쪽 주머니의 덮개를 제거한 후, 금속단추 대신 나무단추를 달았다. 그러니 군복 느낌이 사라지고 사파리 스타일로 변했다. 멜은 어딜 가든 그 옷을 입었고, 사람들이 "그 재킷 어디서 샀어?"라고 물었다.
멜: 남아도는 재고의류가 엄청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새로운 스타일로 개조해 팔기 시작했다. 유행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멋진 옷을 만들기로 했다.
퍼트리샤: 오클랜드 창고에 쌓인 스페인 낙하산부대 셔츠를 발견했다. 흥정 끝에 1장 당 1달러 50센트에 500장을 샀다. 주말에 바로 벼룩시장에 나갔지만 하루 종일 10장도 못 팔았다. 그래서 가격을 두 배로 올리고 '스페인 낙하산부대 반팔셔츠(Short-Armed Spanish Paratrooper Shirts)'란 이름을 붙였다. 그랬더니 다음 날 1,000달러어치 넘게 팔렸다. 그때 멜이 "상점이 필요하겠어"라고 말했다.
멜: 그래서 6주 후인 1978년 11월, 밀 밸리 Mill Valley 내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상점과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돈도 별로 없었지만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퍼트리샤: 돈이 없었던 덕분에 우리는 상상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해나갔다.
멜: 우리에겐 카탈로그, 소매업, 상품판매 등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가진 건 현금 1,500달러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뿐이었다. 어느 정도 신용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금조달에 큰 문제는 없었다.
퍼트리샤: 멜이 (나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전략적이다. 그가 마케팅과 광고를 담당하고, 회계처리 절차도 수립했다. 한마디로 모든 업무를 총괄했다. 나는 제품 생산을 맡았다. 판매원이자 디자이너이면서 동시에 아티스트였다.
멜: 우리는 제품을 어떻게 만들지 생각하다가 바나나 리퍼블릭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전혀 새로운 카탈로그를 만들었고, 곧바로 팬들이 생겼다. 하지만 처음에는 먹고 살 돈을 벌기 위해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1979년 카탈로그를 1달러씩에 팔았다. 지칠 때까지 일했고, 집에 가서 편지를 확인한 후 편지봉투에서 돈을 꺼내 저녁식사를 했다.
퍼트리샤: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최저 임금밖에 주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창의적 자유를 누리며 즐거운 시기를 보냈다.
멜: 우리 사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1983년 무렵, 연매출 250만 달러를 올릴 수 있었다. 우리의 우수고객이었던 부동산 개발업자 메릿 셔 Merritt Sher는 자신의 쇼핑센터에 바나나 리퍼블릭 매장을 열라고 계속 요청해왔다. 하지만 그럴 여력과 자금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기업을 팔고 싶다고 말했더니, 메릿은 단 하루 만에 갭의 창업주 돈 피셔 Don Fisher와의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퍼트리샤: 영원히 재고창고의 군복만 팔 수는 없었다. 갭은 우리가 자체 브랜드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금력과 생산공장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멜: 돈 피셔의 재무최고책임자(CFO)에게 우리 기업 마진이 80%를 웃돈다고 설명하자, 그는 거짓말이라고 우릴 비난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이 버린 것을 훌륭한 상품으로 바꾸고 있었다. 결국 1983년 2월 1일, 갭은 바나나 리퍼블릭을 인수했다. 갭을 떠나지 않는 한 총 마진의 1%를 받기로 했다. 나중에는 매출의 1%를 받기로 조건을 수정했다.
퍼트리샤: 운영, 회계, 법률 문제 등 우리가 관여하기 싫었던 부분의 권한만 갭에 넘겼다. 돈 피셔는 우리의 자율권을 보장했다. 우리 뜻대로 매장을 열 수 있었고, 수익이 나는 한 그 어떤 추궁도 받지 않았다. 비벌리힐스에서 아프리카의 전경을 연출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경비행기를 한 대 착륙시킨 후 경찰 호위를 받으며 산타모니카 대로를 지나가게 한 적도 있다.
멜: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인기를 끌던 1980년대였다.
퍼트리샤: 우리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전까지는 일반 옷과 명품 옷으로만 양분됐지만, 이제는 개인 취향에 맞춘 옷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험과 낭만을 좋아하는 고객이라면 우리 브랜드가 제격이며, 우리 매장에 오면 즐거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멜: 바나나 리퍼블릭은 빠르게 성장했다. 불과 2개였던 매장이 100개로 늘어났고, 갭의 수익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돈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우리 방식이 한때의 유행에 불과할 것이라 걱정했다. 1987년 9월 갭의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고, 그해 10월 블랙 먼데이 사태로 시장이 폭락했다. 돈의 주변사람들이 바나나 리퍼블릭을 갭의 고급 브랜드로 바꾸길 원해 우리는 1988년 갭을 떠났다. 당시 바나나 리퍼블릭은 연매출 2억 5,000만 달러를 올리고 있었다.
퍼트리샤: 그 후 첫 아이가 생겼고, 멜은 명상 수행에 들어갔다.
멜: 나는 타입 A Type A *역주: 성급하고 경쟁적인 성격에다 커피도 많이 마신다. 하지만 명상 수행을 하면서 열흘 동안 조용히 앉아 있어야 했다. 그곳에는 커피가 없어 심한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명상의 목적은 생각을 없애는 것인데 바로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찻잎 사업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이 그 사업에 뛰어들었다.
퍼트리샤: 내가 부엌에서 찻잎과 다양한 향을 혼합하면서 동시에 포장디자인을 시작했다.
멜: 1992년 더블데이 Doubleday에서 우리 책 '더 리퍼블릭 오브 티 The Republic of Tea'를 출간했다. 그때 받은 선금이 종잣돈이 되어 우리의 다음 공화국(republic)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으로 통잎차 사업을 시작했다.
퍼트리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바나나 리퍼블릭 시절에는 젊은 혈기로 밤새 일했다. 그러나 두 아이가 너무나 빨리 자라 그 순간을 즐기고 싶어졌다.
멜: 우리는 뭔가 창조하기는 좋아하지만 운영하는 건 내켜하지 않는다. 리퍼블릭 오브 티를 2~3년 운영하고는 뉴에이지 베버리지 New Age Beerages의 창업주 론 루빈 Ron Rubin에게 넘겼다. 현재는 새로운 건강포장식품 사업을 구상 중이다.
퍼트리샤: 우리에게 모든 것은 창조의 과정이다. '와일드 컴퍼니'를 통해 우리 아이들이나 독립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돈과 경험이 없더라도 창의력과 담력, 상상력만으로 놀라운 성공을 일궈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그 과정에서 멜과 나는 부부로서 함께 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매일매일이 새롭다.
1979년 카탈로그를 1달러씩에 팔았다. 지칠 때까지 일했고, 집에 가서 편지를 확인한 후 편지봉투에서 돈을 꺼내 저녁식사를 했다.
[Our Advice]
멜 & 퍼트리샤 지글러 부부
바나나 리퍼블릭 공동 창업주
고객은 최고의 자산이다. 더 해주려고 노력하라.
바나나 리퍼블릭의 옷은 항상 기대 이상으로 품질이 좋았다. 옷감이 좋아서 고객들은 30년이 지난 옷을 계속 입는다.
'아니오'라 답하지 말라.
스탠퍼드 쇼핑 센터 Stanford Shopping Center에서 우리의 첫 쇼핑몰 매장에 대한 디자인 규정을 보내왔을 때, 우리 디자인은 그 규정에 저촉되는 것 투성이였다. 하지만 규모 대비 매출 면에서 우리 매장이 쇼핑몰 내 모든 의류매장을 앞질렀다.
진심을 다하라.
사업의 성공 여부는 한 개인에 크게 달려 있다. 창업주의 모든 것(재능, 취향, 야망)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