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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애덤스의 맥주 혁명

[HOW WE GOT STARTED] Samuel Adams's Beer Revolutionary

컨설턴트 출신인 짐 코크 Jim Koch가 1985년 크래프트 라거를 출시하기 전까지 미국 맥주는 모두 공장에서 찍어낸 듯 밋밋한 맛을 내고 있었다.
Interview by Dinah Eng


1984년 짐 코크는 가족 대대로 전해오는 레시피에 따라 집에서 맥주를 양조를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여행 가방에 시제품을 싸들고 바를 순회하면서 직접 만든 새뮤얼 애덤스 보스턴 라거의 시음회를 열었다. 보스턴 비어 컴퍼니의 창업자이자 브루마스터 brewmaster *주석: 맥주 제조 전문가인 코크(63)는 미국에서 가장 큰 크래프트 *주석: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수제 맥주 맥주 회사를 운영하며 보스턴 라거,

서머 에일 Summer Ale, 크림 스타우트 Cream Stout, 체리 휘트 Cherry Wheat를 비롯한 여러 가지 맥주를 연간 270만 배럴 이상 생산하고 있다. 그의 회사는 2012년 매출 6억 2,900만 달러와 순이익 6,000만 달러를 거뒀다. 코크는 여전히 새로운 맥주를 만들며 그의 영업 사원들과 함께 크래프트 혁명을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신시내티 Cincinnati 외곽의 한 농장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수많은 여름을 보냈다. 아버지 역시 브루마스터였고 어머니는 선생님이었다. 1950년대 말 회사가 부도난 후 아버지는 맥주 제조업을 시작했다. 여러 브루마스터들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자연히 맥주와 함께 자라면서 기업가로서의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나는 하버드에 입학해 행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1971년 졸업 후에도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버드 법학 겸 경영학 석사 복수학위 과정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 후 자퇴했다. 그 후 아웃워드 바운드 Outward Bound *역주: 야외에서의 도전적인 모험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사회성과 리더십 등을 가르치는 국제기구 강사를 포함해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고 다시 하버드로 돌아가 1987년 석사 과정을 모두 이수했다. 변호사 시험은 보지 않고, 같은 해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나는 제조업 전략 컨설팅을 맡았다. 대기업 CEO, 고위 임원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경영을 한 차원 높은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6년 후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기업 문화와 관료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 성공하기보단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보고 싶었다. 나는 마치 운명처럼 맥주 분야를 선택했다.

1983년 당시만 해도 크래프트 맥주나 소형 양조장과 관련한 성공 사례가 없었다. 나는 양조장을 직접 운영해보기로 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비용 문제로 소규모 신생 양조장이 고사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축한 돈 10만 달러에 2순위 주택담보대출을 보태고 가족과 친구에게 14만 달러를 빌려 자금을 마련했다.

양조장을 운영하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짐, 전에도 몇 번 어리석은 행동을 했지만 이번이 가장 무모한 행동인 것 같다”라고 만류했다. 살아오면서 많은 양조장들이 문을 닫거나 영세 업체가 대기업의 횡포로 파산하는 경우를 숱하게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쓰던 브루마스터 과정 교재를 내게 건네주셨다. 덕분에 1948년대식 양조법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이후 맥주를 좀 더 저렴하고 빠르게 제조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맛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이 특별히 그립지는 않다.

회사의 초기 주력 제품인 새뮤얼 애덤스 보스턴 라거 레시피는 우리 가족의 오래된 양조법이었다. 양조장 운영을 고려할 당시 직접 만든 맥주 샘플을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들고 가서 동료 직원들을 상대로 시음회를 열었다. 그리고 1984년 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내가 처음으로 고용한 사람은 이제까지 뽑은 직원 중 가장 훌륭했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비서로 일했던 론다 칼먼 Rhonda Kallman이라는 여성이었다. 당시 23세의 그녀는 체계적이고 매우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밤에는 바텐더로 일하기도 했다. 첫 6개월 동안 우리는 사무실도, 책상도, 컴퓨터와 전화기도 없이 일했다(그녀는 후에 영업과 브랜드 개발을 관리했고, 2000년 회사를 떠났다). 우리는 맥주를 양조하고 판매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했다. 간접비가 들어가지 않았던 덕분에 첫 달부터 현금 흐름은 원활했다.

레시피가 옛날 방식이었기 때문에 구식 장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부 양조장에는 더 이상 그런 장비가 없었다. 그래서 3년 반 동안 저가 항공기인 피플 익스프레스 People Express-기내에서 티켓 값을 내는 항공기-를 타고 피츠버그까지 날아가 양조장을 이용해야 했다. 나는 이곳에서 양조 과정을 감독했다.

보스턴의 유통업체들은 당시 취급하는 맥주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제품을 운송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트럭을 빌려 운송도 하고 판매도 했다. 바를 돌아다니며 내 이야기를 들려주며 양조와 원료의 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시음회도 가졌다. 당시 사람들은 수입 맥주만 좋은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편견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었다. 우리 맥주는 다른 맥주보다 훨씬 비쌌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이네켄 Heineken도 한 상자에 14달러면 사는데 국산 맥주가 20달러나 된다고?”라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나는 우리 맥주에 반드시 미국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새뮤얼 애덤스는 양조업자이자 애국자였으며 혁신가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맥주 이름을 지었다. 나는 새뮤얼 애덤스가 미국에 정치 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맥주 혁명을 일으키고 싶었다. 우리 보스턴 라거는 깊은 풍미와 신선한 맛을 내는 미국 최초의 맥주였다. 국내산 맥주는 신선하긴 했지만, 깊은 맛은 없었다. 우리 맥주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었다. 하이네켄이나 코로나, 버드 라이트와는 맛이 달랐다. 제품 출시 6주 후 우리는 그레이트 아메리칸 비어 페스티벌에서 ‘미국 최고의 맥주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첫해 100만 달러가량의 수익을 올렸다. 당초 우리 목표의 3배였다. 그 결과 첫해 말 보스턴 백 베이에 위치한 오래된 가옥의 빈 다락에 사무실을 차릴 수 있었다. 내 책상은 갈고리발톱 모양의 다리가 있는 욕조 위에 합판을 올려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바를 하나하나 공략해가며 성장을 거듭했다. 그렇게 뉴 잉글랜드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1주일에 2번씩 프레지덴셜 항공사를 이용해 워싱턴까지 날아가 바에서 맥주를 팔았다. 그 비행기를 매우 자주 이용했기 때문에 항공사가 기내에서 새뮤얼 애덤스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티켓 봉투 뒷면에 새뮤얼 애덤스라는 문구를 넣었다. 일종의 게릴라 마케팅이었다. 대기업의 규모를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승부를 내야 했다.

사업 초기 나는 보스턴에 양조장을 짓고 싶었다. 하지만 비용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결국 양조장도 짓지 못하고, 300만 달러가량의 투자 손해만 봤다. 정말 고통스러운 실패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어떻게 계획하고 설계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1988년 보스턴에 첫 양조장을 지었고 사업도 순조롭게 성장해 나갔다.

우리 회사는 1995년 11월 기업공개를 했다. 10년간 많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회사에 투자했지만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기업공개는 이들에게 이익을 돌려주면서도 회사를 계속 컨트롤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우리에겐 2가지 종류의 주식이 있었다. 그중 의결주(voting share)는 모두 내가 소유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관리하고 키울 수 있는 방편이었다. 또 분기 수익보단 장기적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다.

우리도 생존과 고객 응대를 걱정하지만 버드와이저 같은 대기업과는 달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 가는 대상으로 여겼다. 1996년 우리가 기업공개를 한 후 앤호이저 부시 Anheuser-Busch는 작정하고 우리를 비방했다. 그들은 우리 맥주가 모두 보스턴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며 네거티브 광고를 내보냈다. 당시 매출 1억 달러를 기록하며 사업이 번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하지만 사실 시장점유율 50%에 이르는 앤호이저 부시에 비하면 나는 존재감이 크게 없었다. 나는 결국 거래개선협회(Better Business Bureau)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1997년 광고자정위원회(Advertising Self-Regulatory Council)가 그 광고의 중지 판결을 내렸다.

현재 미국에는 2,400개의 소규모 양조장이 있다. 그리고 크래프트 맥주는 미국 전체 맥주 시장의 6%를 차지한다. 우리의 진정한 경쟁상대는 수입 맥주다. 나는 한 번도 버드 라이트나 밀러 라이트와 경쟁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회사 설립 후 29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미국 맥주 시장 1% 점유율을 달성했다.

최근의 대불황기에도 우리는 두 자릿수 성장을 지속해왔다. 좋은 맥주에 대한 대중들의 호응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새뮤얼 애덤스를 ‘합리적인 사치(affordable luxury)’라고 여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어떻게 하든 해내고야 만다는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 관료주의도 없다. 내일 나는 영업 사원들과 함께 북부 뉴저지 시장을 방문해 신용거래 대금도 받고 맥주도 팔 계획이다. 지난주에는 오하이오에 위치한 양조장에서 그곳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좋은 맥주를 만들고, 또 열심히 판매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좋은 맥주를 제공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번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양조장을 운영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짐, 전에도 몇 번이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지만 이번이 가장 무모한 행동인 것 같다’고 만류했다.

“나는 우리 맥주에 반드시 미국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새뮤얼 애덤스는 양조업자이자 애국자였으며 혁신가였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맥주 이름을 지었다.”

My Advice
짐 코크, 보스턴 비어 컴퍼니 창립자 겸 회장

시장을 파악하라.
다른 맥주에 비해 제품의 질이 좋고 저렴한가? 이미 출시된 기존 제품과 비교해 별로 그렇지 않다면, 사업을 일으켜 세우긴 어려울 것이다.

평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고용하지 말라.
우리는 회사 내에서 훌륭한 성과를 올린 직원들의 프로필을 작성해 이를 바탕으로 면접 질문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이 특정 포지션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슷한 동기 부여나 행동 양식을 지원자들도 갖추고 있는지 판단하고 있다. 단지

실패를 빨리 감지하라.

우리에게도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맥주가 수십 가지나 있다.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 포기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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