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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의 신선한 새 얼굴

글로벌 500 세계 최대 규모 기업들] Fiat's FRESH FACE

“그것 좀 꺼 주세요.” 세르조 마르키온네 Sergio Marchionne 는 필자의 녹음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합당한 요청이었다. 그는 크라이슬러의 새로운 TV광고 몇 편이 방송되기 전, 내게 그 광고를 사무실 컴퓨터로 보여주려던 참이었다.

한 편은 참전 군인들의 귀환과 관련된 내용으로,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다른 한 편은 폴 하비 Paul Harvey *역주: 미국의 유명 라디오 뉴스앵커가 하나님의 목소리를 연기한 농부들의 이야기였다. 그 광고 두 편은 물론 크라이슬러 제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메시지는-감상적이지만 효과적이있다- 미국과 관련된 것이었다. 피아트와 크라이슬러 CEO를 겸임하는 마르키온네는 “오늘날 디트로이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회사는 우리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3대 자동차 회사 중 규모가 가장 작다. 또 우리가 미국 이야기를 앞세워 홍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다. 물론 괴상하다고 할 수도 있다. 크라이슬러는 더 이상 미국 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 엘칸 John Elkann은 21세 때, 언젠가 가업을 잇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오늘날 그는 엑소르 Exor의 CEO로서 피아트를 재건하고, 크라이슬러를 인수하면서 이탈리아의 유명한 아넬리 Agnelli 왕국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by David Whitford


크라이슬러의 혈통은 최근 복잡해졌다. 이 회사는 1998년 다임러 Daimler 에 ‘납치’됐다가, 2007년엔 사모펀드로 팔렸다. 2008년에는 연방정부의 긴급 구제 금융을 받은 후 조금씩 피아트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 피아트는 크라이슬러가 2009년 파산 신청을 한 후 주식매입을 시작해 2011년에는 지분 과반수를 확보했다. 피아트는 델라웨어 주 법원이 올여름에 내릴지 모르는 주식 가치 판결에 따라 나머지 41.5%의 주식도 전국자동차노동조합(UAW) 신탁기금으로부터 인수하길 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크라이슬러는 명실상부한 피아트 회사가 된다.

그러나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피아트의 뿌리는 엑소르다. 이 회사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유서 깊은 링고토 Lingotto 공장 지역에 본사를 둔 투자업체다. 필자는 이곳에서 마르키온네를 인터뷰했다. 그가 디트로이트 오토 쇼에서 돌아온 다음 날, 담배연기가 가득한 곳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엑소르는 피아트 지분 30%-피아트는 페라리 Ferrari, 마세라티 Maserati, 란치아 Lancia, 알파 로메오 Alfa Romeo, 그리고 특이하게도 토리노의 일간지 라 스탐파 La Stampa 를 소유하고 있다-을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상업용 부동산 중개업(쿠시맨 앤드 웨이크필드 Cushman & Wakefield)과 중장비(과거 피아트 인더스트리얼 Fiat Industrial을 포함한 CNH인더스트리얼), 부동산 개발회사(알마칸타르 Almacantar), 은행(방카 레오나르도 Banka Leonardo), 언론(이코노미스트 지 The Economist와 바니제이 그룹 Banijay Group), 제지(세쿠아나 Sequana), 그리고 토리노의 유벤투스 Juventus 축구단을 소유하고 있다. 2012년 총 매출은 1,463억 달러였다. 이로써 엑소르는 올해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에서 작년보다 19계단 상승한 26위에 올랐다.

엑소르는 공개기업이기는 하지만, 조반니 아넬리 Giovanni Agnelli의 후손들이 엄격하게 통제하는 회사다. 조반니 아넬리는 1899년 피아트(피아트는 ‘토리노 이탈리아 자동차 공장’을 뜻하는 Fabbrica Italiana di Automobili Torino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를 공동 창업해 유럽의 거대 산업체 중 하나로 키웠다. 그 결과 축적된 가문의 부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엑소르가 곧 아넬리 가문이란 것이다.

아넬리 가는 한 명의 가장, 즉 ‘카포 디 파밀리아 capo di famiglia’가 이끌게 되어 있다. 언제나 단 한 명이고, 언제나 남자다. 조반니 아넬리가 1945년 사망하기 전까지 카포 자리를 지켰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손자를 후계자로 선택했고, 그는 잔니 Gianni 혹은 라보카토 l’Avvocato(실제 변호사 개업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법학 학위 때문에 생긴 별칭이다)로 알려졌다. 전성기 시절의 잔니는 눈에 띄는 미남이었고, 모든 분야에서 열정적이었고, 무모할 정도로 대담했다. 특권층으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 참전했고, 미술품과 자동차, 여자들(mistresses)을 끌어 모았으며, 왕족과 어울렸다. 셔츠 소매 바깥쪽에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고 노조를 상대로 싸워 이겼다. 요란하고 화려한 20세기 중반, 성공한 이탈리아 남자의 전형을 빠짐없이 전 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잔니는 지난 2003년 파산 직전 상태인 피아트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일한 장손인 후계자 엘칸은 키 크고 마른 체격에 볼이 빨간 곱슬머리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대학생 때부터 가문의 짐을 짊어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인물은 게르만 계통의 성을 따르고,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시내의 밤 문화 대신 가족과의 외출을 더 좋아한다. 사업가로선 어떨까? 이제 겨우 서른 일곱 살인 엑소르는 2011년에 CEO 자리를 물려 받았다. 하지만 그가 회사를 이끄는 동안 생긴 좋은 일들-피아트의 안정화, 크라이슬러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 가문의 광범위한 제국 재편-을 고려하면 선조들을 능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아넬리 가문의 주인은 존 엘칸이다.


존 엘칸의 부친 알렌 엘칸-소설가 겸 저널리스트다-은 “때론 존의 할아버지가 ‘그 애의 유년시절을 망쳐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어릴 때는 더 밝게, 더 재미있게, 책임을 덜 느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랬다. 젊을 때 빈손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하는 것과, 정말 버거운 상황을 물려받는 것은 천양지차다.”

사실 존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도 모르게 현재의 역할을 준비해 왔다. 다섯 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그는 파경 자체는 기억 안 나지만, 이혼이 성립된 후에도 부모 사이에 계속됐던 괴로움과 비난은 잘 기억하고 있다. 남동생 라포 Lapo는 “형은 맏이였기 때문에 불쾌한 상황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감정적인 면에서 강해져야 했다.” 여동생 지네브라 Ginevra도 존이 “형제들 중 가장 진지했다”고 회상했다. 지네브라는, 동생들에게 이를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 이도, 밤에 무서우면 달래준 이도, 아이들끼리 직접 영화를 만들었을 때 자신의 양복과 넥타이를 의상으로 선택한 이도 존이었다고 말했다.

존 필립 제이콥 엘칸 John Philip Jacob Elkann(가족들은 ‘자키 Jaki’라고 부른다)은 뉴욕에서 태어나 외교관의 자녀처럼 런던, 리우데자네이루, 파리에서 자랐다. 그는 이 나라들의 언어와 약간의 러시아어와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 원어민들의 평에 따르면, 그의 이탈리아어는 상당한 수준이지만 문장 구조가 마치 프랑스어에서 번역한 것처럼 어색할 때가 있다. 그는 대학 진학 시기가 되자 가장 고향처럼 느껴지는 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잔니는 밀라노의 보코니 Bocconi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기를 넌지시 권유했지만, 엘칸은 그 대신 유명한 토리노 기술대학(Politecnico di Torino)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엘칸은 그 이유를 “공학이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왠지 더 큰 도전처럼 느껴졌다.”

토리노에 있는 동안 그는 조부 잔니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둘은 종종 식사를 같이 하고, 사업에 대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곤 했다. 엘칸은 “가문의 회사 어딘가에서 내 미래가 조금씩 분명히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21세 때 아넬리 가문의 저택 ‘빌라 프레스콧’ Villa Frescot-소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토리노를 굽어 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에서 나눈 짧은 대화에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넬리 가문의 연장자인 친척 한 명이 카포 지위를 위해 후계자 수업을 받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피아트 이사회 자리 하나가 빈 상황이었다. 엘칸은 “그날 점심 식사 후 할아버지가 ‘이사회 이사 자리에 대해 생각 중인데, 네가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여쭤봤다”고 회상했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잔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할아버지와 손자는 분명히 같은 집안임을 알 수 있을 만큼 닮은 점이 있었다. 그러나 둘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잔니는 악마적 매력이 있는 화려한 인물이었던 반면 엘칸은 성격도 외모도 거의 아이처럼 순진해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수줍음 많은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뉴욕과 토리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식적인 인터뷰를 갖고, 링고토본사 길 건너편의 이탈리 Eataly 레스토랑에서 그의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토리노에서 로마까지 회사 전세기를 함께 타고, 중국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 Ai Weiwei의 북경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등 최근 엘칸과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필자는 ‘그가 수줍움을 많이 탄다’는 말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최고급 양복을 입고, 요트와 작고 빠른 차 (“절대 속도보다는 가속이 중요하다”고 한다) 타기를 즐기고, 여 백작과 결혼해 세 아이를 레오네 Leone (사자), 오세아노 Oceano (대양), 그리고 비타 Vita(삶)라고 이름 지은 억만장자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필자가 아는 엘칸 정도의 부와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은 모두 항상 카메라를 의식한다. 그에 비해 엘칸은 때때로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봐서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버릇이 있다. 오히려 그가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셈이었다.

잔니는 항상 직접 차를 몰았다. 하지만 엘칸은 일하고 있을 땐 운전사가 모는 차를 타는 데 만족한다. 차가 만석이면 그는 빈 자리 어디든, 뒷좌석 가운데 자리라도 끼어 앉는다. 토리노 근처의 새로운 마세라티 조립 공장인 그루글리아스코 Grugliasco 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는 경호원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그의 콰트로포르테 Quattroporte 자동차를 링고토까지 운전해 달라고 고집하기도 했다.

유대인인 그의 아버지가 ‘탈무드식’이라고 말하는 엘칸의 선천적인 겸손함, 직접적인 갈등을 피하고 기꺼이 질문을 하는 그의 태도 덕분에, 그는 ‘가문의 인큐베이터’ 안에서 성장할 여유가 있었다. 엘칸은 “모두가 나를 도와주려 했다”고 말한다. 그는 어린 시절 아넬리 가문의 오랜 ‘고문(consigliere)’인 잔루이기 가베티 Gianluigi Gabetti의 세심한 지도를 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매우 어렸다.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고, 그것이 분명 도움이 되었다. 내가 만약 마흔 살이었다면 가족 내의 역학관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잔니 아넬리는 2003년 1월 사망했다.
16개월 후에는 그의 동생 움베르토 Umberto 도 짧은 투병생활 후 형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엘칸만이 남게 됐다. 후계자 수업-어느해 여름 영국 버밍엄 Birmingham의 헤드라이트 공장에서 익명으로 일하고, GE의 저명한 기업 감사요원(Corporate Audit Staff)들과 세계순방 등을 했다-이 끝난 것이었다. 아넬리 가문의 일원인 루포 라타치 Lupo Lattazzi는 “당시 그가 너무 젊어서 걱정했냐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매우 힘든 시기였다. 그는 거의 파산 상태인 피아트를 물려받았다. 그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과제들이 어마어마하게 있었다.”

아넬리 가문의 주력사업이 표류하고 있었다. 두 차례에 걸쳐 막대한 자본을 투입했지만 허사였다. 피아트는 매일 200만 달러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주가는 폭락하고 30억 달러 이상의 전환사채를 보유한 은행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아넬리의 사업 왕국은 늘 그 가문 출신의 수장이 이끌었던 반면, 피아트를 포함한 개별 회사들은 때때로 외부 CEO를 영입하기도 했다. 움베르토가 사망할 당시 피아트의 CEO는 주세페 모르키오 Giuseppe Morchio였다. 그는 이사회에 자신에게 회장직도 맡기라고 압력을 넣었다. 아넬리 가문 사람들 대부분은 모르키오가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 전권을 외부인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꺼렸다. 모르키오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사표를 쓸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엘칸은 제네바로 날아가 비밀리에 마르키온네를 만났다.

마르키온네는 당시 엑소르 산하의 스위스 기업 SGS의 CEO였다. 그는 1년 반 전에 피아트 이사로 선출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토스터와 유아용 장난감을 테스트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나는 자동차나 트랙터를 만들어 본 적이 전혀 없었다”고 회상한다.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마르키온네가 제네바에서 가장 좋아하는 식당인 앙글레테르 호텔 Hotel d’Angleterre의 윈도스 Windows에서 식사를 했다. 나중에 그라파를 마실 때가 되자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엘칸은 마르키온네와 함께 줄담배를 피우면서 그에게 정중하게 도움을 청했다. 만약 모르키오가 그만두면 피아트의 차기 CEO가 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엘칸에게 “내가 필요할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7시, 마르키온네는 아넬리 가문의 고문 가베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마르키온네는 “그는 ‘어제 젊은 엘칸을 만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엘칸은 온 가문을 대표해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며 당시 통화 내용을 회상했다. 마르키온네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사회가 신임 회장으로 피아트에서 잔뼈가 굵은 루카 코르데로 디 몬테쩨몰로 Luca Cordero di Montezemolo (현 페라리 회장)를 선출하자 모르키오가 사임을 했다. 이틀 후 마르키온네가 CEO 자리를 이어받았다. 아넬리 가문 외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마르키온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그는 아직도 GM의 CEO 릭 왜고너 Rick Wagoner가 ‘깔보는 표정’으로 자신을 대했다며 펄펄 뛴다). 그러나 그의 CEO 선임은 피아트, 그리고 결국은 크라이슬러의 전환점이 됐기에 엘칸으로서는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2013년 1월 24일, 아넬리 가문 사람들이 잔니 사망 10주기 추도식을 위해 토리노 대성당으로 모였다. 이탈리아의 조지오 나폴리타노 Giorgio Napolitano 대통령을 비롯해 장관들, 은행가들, 사업가들, 미국 대사, 그리고 유벤투스 축구팀 전원이 참석했다. 아넬리 가문 사람들은 좌석 일곱 줄을 차지했다. 일반 토리노 시민들은 신도석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외부 광장에까지 자리를 메웠다. 토리노 대주교는 교황이 보낸 서한을 대독했다.

엘칸은 맨 앞줄에 아내 리비아나 Liviana , 두 아들(한 살배기 딸은 집에 두고 왔다), 잔니의 미망인 마렐라 Marella 와 함께 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10년 전 장례식 날에는 토리노의 하늘이 잿빛이었다. 당시 분위기는 아넬리 가문의 한 시대가 저무는 가운데, 그들의 슬픔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그대로 담은 듯했다.

하지만 10주기 때의 하늘은 현 상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청명했다. 결과는 일주일 후에야 발표됐지만, 엘칸은 이미 그때 피아트가 가장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적으로 크라이슬러의 이익이 급증한 덕분이었다. 피아트의 2012년 순익은 18억 6,000만 달러였다. 크라이슬러가 없었다면 13억 8,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엘칸은 2009년 크라이슬러 인수 결정에 대해 “그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고 말했다.

피아트의 경영 성과에 미처 드러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가문의 사업이 갈수록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면서, 엘칸이 얼마나 급격한 변화를 잘 관장해 왔는지 새로운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10년 전에는 이탈리아 시장이 피아트와 그 자회사 브랜드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10%가 채 안된다. 크라이슬러의 긍정적 기여가 중요한 원인이지만, 브라질에서의 매출 급증과 유럽 전역 자동차 시장의 붕괴에 따른 부정적 영향도 컸다. 작년 이탈리아 내 모든 브랜드의 매출은 1979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와 같은 글로벌화는 엑소르 전반에 걸쳐 더욱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10년 전 엑소르 매출의 4분의 3이 유럽에서 창출됐으나, 현재는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금 엑소르의 최대 시장은 미국이며, 브라질, 유럽, 아시아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에 따라 엑소르는 경영성과를 MSCI 세계 지수로 측정한다. 엑소르의 2012년 순자산가치는 전년 대비 20.6% 상승한 100억 4,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벤치마크로 삼은 MSCI 세계지수를 9% 포인트 이상 능가한 수치다.

이런 변화를 관리하는 것은 경영상의 도전인 동시에 까다로운 정치적 과제이기도 하다. 피아트는 단순한 일개 기업이 아니다. 바로 이탈리아 국가 정체성의 핵심에 가깝다. 최근 거행된 잔니의 추도식 조문객 숫자는 이를 또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피아트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소식을 처음 접한 노조들이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벌어진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마르키온네와 엘칸은 이탈리아 총리와의 면담을 이유로 로마에 소환 당했다.

피아트는 전성기 시절 이탈리아에서 최대 30만 명의 공장 노동자를 고용했지만, 현재는 6만 2,000명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최근 6세대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를 생산하기 위해 그루그리아스코에서 채용한 950명이 포함되어 있다(엘칸이 수출용 럭셔리카 생산을 위해 그 기반을 이탈리아에 재배치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엘칸은 “우리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그 차를 만들 기회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글로벌 시장이 아니었다면 “회사가 파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엑소르는 SGS 지분의 상당 부분을 벨기에 그룹 브뤼셀 랑베르 Groupe Bruxelles Lambert에 26억 달러에 매각했다. 엑소르의 순자산 가치 20%를 추가로 현금화해 40억 달러에 가까운 ‘군자금(war chest)’을 확보한 셈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엑소르가 그 돈으로 크라이슬러의 남은 지분을 매입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엑소르는 이미 그럴 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엘칸은 아직 젊은 데다 가문의 든든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또 전 세계 자산이 말라붙은 시기에 엄청난 현금을 깔고 앉아 있다. 그는 곧 중요한 행동에 착수할 전망이다. 지금까지 100년 넘게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 온 아넬리 가문이 새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그는 거의 파산 상태인 피아트를 물려받았다.”- 루포 라타치

“크라이슬러가 그렇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 존 엘칸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삶
A Tough Act to Follow
엘칸의 조부 잔니는 아넬리가의 여러 거물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인물이었다.

아넬리가는 종종 케네디가와 비교된다. 이는 권력, 부, 화려함, 그리고 비극을 아우르는 편리한 비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가 아넬리가의 불꽃이 한 세기 넘게 얼마나 밝게 타오르며 미국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과 사업적 성공, 가십거리로 이탈리아를 사로잡았는지를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말쑥한 바람둥이 사업가 잔니 아넬리-이탈리아에선 무관의 제왕이라고도 알려져 있다-는 뛰어난 리더십을 앞세워 피아트를 전 세계적 거대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아버지 에도아르도가 1935년 수상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역할을 떠맡게 됐고, 이후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ㆍ근심걱정 없는 호화로운 삶)’의 전 세계적 상징이 됐다. 그는 축구(아넬리가는 이탈리아의 가장 유서 깊은 축구단 유벤투스의 소유주다)와 아름다운 여성들(유명 여배우 리타 헤이워스 Rita Hayworth, 아니타 에크베르그 Anita Ekberg 등과 염문을 뿌렸다), 큰 배, 빠른 차, 그리고 미술품을 사랑했다.

이 같은 삶은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잔니의 아들인 또 한 명의 에도아르도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가업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신비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2000년 토리노의 한 다리에서 투신자살했다. 조반니 알베르토 Giovanni Alberto가 삼촌 잔니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으나 33세의 나이에 희귀한 급성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제서야 잔니는 손자 존 엘칸을 후계자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엘칸은 현재 피아트와 가문의 지주회사인 엑소르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엘칸의 경영권 승계는 아넬리 가문 일원들에게는 행운이었다. 가문의 일원인 티치아나 나시 Tiziana Nasi는 “우리는 현재 생활, 그리고 이탈리아 전역과 전 세계에 훌륭한 저택들을 유지할 수 있어 행복하게 지낸다”고 말했다. 그러나 잔니가 사망한 2년 후, 그의 딸 마르게리타 아넬리 데 파렌 Margerita Agnelli de Pahlen은 유산이 너무 적다고 소송을 걸었다. 그녀의 아들 엘칸은 어머니에 맞서 나머지 가족들 편을 들었다. 같은 해, 엘칸보다 더 화려한 인물인 남동생 라포가 토리노의 한 성전환자 매춘부의 아파트에서 코카인과 헤로인을 과다 복용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3일간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회복했다. 이후 패션안경 업체를 창업한 후 최근 기업공개를 했고, ‘라포: 내 스타일의 규칙들(Lapo: Le Regole del Mio Still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아넬리 가문의 ‘대서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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