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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의 꽃’ 앱솔루트의 디자인경영

[정경원의 ‘디자인 이야기’]

앱솔루트 보드카는 세계의 애주가는 물론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기억을 장악하는 힘은 바로 디자인에 있다.
글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장


요즘 한 국내 항공사가 A380 기종의 2층 라운지에서 칵테일 서비스를 제공해 화제가 되고 있다. 프레스티지 클래스 승객 전용으로 운영되는 라운지 바에서 바텐더 교육을 받은 승무원들이 앱솔루트 보드카 칵테일을 무료로 서비스한다. 다양한 브랜드들이 경쟁하는 세계 보드카 시장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 탑승객들이 칵테일 맛에 익숙해지게 하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 ‘보드카’ 하면 흔히 러시아의 독한 술을 연상하기 쉬운 여건에서 스웨덴 제품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비결은 바로 이런 적극적인 마케팅이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독특한 형태의 보드카 병을 주제로 한 기발한 광고와 포스터 디자인은 앱솔루트 보드카에 일관된 정체성을 형성해주고 있다.

100년 만에 수출로 활로 개척

앱솔루트 보드카의 역사는 18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그 해에 라르스 올슨 스미스 Lars Olsson Smith가 연속 증류라는 새로운 공정으로 ‘앱솔루트 퓨어 보드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보드카 원액을 여러 차례 증류하여 퓨젤 알콜을 제거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불타듯 독한 와인(burnt-wine)’을 만들어낸 것이다. 겨울 밀을 원료로 정제되고 알코올 농도가 아주 높은 보드카는 배앓이를 고쳐주고 전염병을 막아주는 의약품으로도 활용되었다. 스미스는 스톡홀름에서 보드카 독점 판매 권리를 따내어 큰 부를 축적했으며, 1917년부터 스웨덴의 주류 산업이 국유화됨에 따라 특별한 브랜드를 내세우지 않고 내수 시장의 공급에만 전념하였다.

창립 100주년이 되던 1979년에 이르러서야 ‘앱솔루트’라는 브랜드로 세계 보드카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첫해에 알코올 농도 40%(80도)인 앱솔루트 블루 레이블과 50%(100도)인 레드 레이블을 출시했으나 고작 9만 리터를 수출하는 데 그쳤다. 당시만 해도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 ‘스미노프(Smirnoff)’ 같은 러시아 최고급 브랜드들이 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앱솔루트는 그 존재조차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86년 허브 등의 향미가 첨가된 ‘앱솔루트 페파’를 출시하는 등 제품 다변화에 나서면서부터 매출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20년이 지난 2008년에는 9,700만 리터의 판매고를 올릴 정도로 매출이 급등했다. 앱솔루트는 회사 내에 디자인부서를 운영하는 대신, 외부의 디자인 전문가들과 긴밀히 협조하는 방식으로 디자인경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독특한 병 디자인이 만드는 신화

앱솔루트 보드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독특하게 디자인된 병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앱솔루트의 병은 사려 깊은 디자이너들의 노력이 응축돼 만들어진 것이다. 앱솔루트는 내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병의 디자인을 스웨덴의 디자인 에이젠시인 ‘카를손 & 브로맨’에게 의뢰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고심하던 카를손은 우연히 스톡홀름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구식 의약용 병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그 병을 근거로 일반 약병과 차별화시켜 목 부분을 짧게 하고 간결한 금속 스크류 마개를 덮어 현대적인 감각의 미니멀리즘 풍으로 디자인했다. 병의 디자인에 의약품 개념을 적용시킨 만큼 제작도 의약용 병 전문 유리 공장에 맡 겼다. 또한 병에 브랜드 이름과 로고를 직접 인쇄하되 레이블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앱솔루트 특유의 ‘단순함’과 ‘순수함’을 부각시켰다.

앱솔루트는 병의 기본적인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특별한 이벤트나 지역의 특성에 따라 높이나 폭, 표면 처리 등을 다르게 함으로써 디자인을 특성화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2003년 브라질의 예술가 로마노 브리또가 그린 ‘앱솔루트 브리토 Britto’가 나온 이래로 해마다 다양한 스페셜 에디션들이 출시되고 있으며, 2013년에도 앱솔루트 카니발, 앱솔루트 데님, 앱솔루트 크래프트 등을 선보였다. 로스앤젤레스,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 등 미국 도시들은 물론 런던, 이스탄불, 밴쿠버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을 주제로도 병 디자인을 특화하고 있다. 금년 2월에는 미국 시카고를 대상으로 일반 대중들이 새롭게 디자인된 병을 제안하는 이른바 ‘크라우드 소싱’을 실시하기도 했다.

일관된 광고 디자인의 효과

앱솔루트 보드카가 미국 시장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 진출한 지 불과 30여 년 만에 큰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광고대행사 TBWA와의 장기적 협력이 큰 몫을 하고 있다. 1970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된 TBWA는 공동대표 4명의 성(姓)에 있는 머리글자를 모아서 지은 이름이다. 1993년 옴니컴 그룹 Omnicom Group에 인수된 TBWA(뉴욕에 본사가 있다)는 끝없는 호기심, 열린 마음, 상식 뒤엎기, 관습에 대한 도전, 역발상 등의 ‘틀 깨기’를 통해 기발한 광고를 제작하고 있다.

1980년 TBWA의 그래픽 디자이너 제오프 헤이즈 Geoff Hayes는 술병 뒤에 광배(光背), 병마개 위에 헤일로(Halo·천사 머리 위의 링)를 넣은 데 이어, 제품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이 ‘ABSOLUT PERFECTION’이란 카피만 남긴 광고 디자인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 후 앱솔루트는 30년이 넘도록 병은 그대로 두고, 그 밑에 ‘ABSOLUT 적절한 단어’가 결합된 문안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단순하면서도 재치 있는 광고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1985년부터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아트 마케팅을 실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예술가들이 앱솔루트 병에 그들 특유의 시각적 표현을 집어넣어 병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로 큰 주목을 끌었다. 이 작업은 케니 샤프, 로버트 인디애나 등 여러 아티스트들의 손을 거쳐 이어졌다. 현재 850여 점의 아트 콜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앱솔루트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순회 전시회도 개최하고 있다.

‘앱솔루트 미학,’ 세계 주류업계 석권

단순한 형태의 병을 모티프로 순수함을 표현하는 광고 시리즈를 통해 앱솔루트는 음주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술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에선 잡지에 게재된 앱솔루트 광고 페이지를 찢어가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번 슈미트와 알렉스 시몬슨은 공동 저술한 책 ‘미학적 마케팅’에서 “앱솔루트 캠페인이 미학 전략을 통해 주류 마케팅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덕분에 매출도 덩달아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지 10년여 만인 1991년에 270만 상자를 팔아 수입 보드카 부분에서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앱솔루트는 세계 알코올음료 시장에서 바카디(Bacardi)와 스미노프에 이어 3위에 올라있다. 프랑스 페르노리카 그룹 소속으로 전 세계 126개국에서 판매된다. 2008년 페르노리카 그룹이 스웨덴 정부로부터 앱솔루트 보드카를 56억 3,000만 유로(약 8조3,721억 원)에 사들였다. 하지만 경영 환경의 변화에도 앱솔루트 보드카 디자인 경영의 전통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외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과 적극 협력하여 ‘틀을 깨는 솔루션’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다.


정경원 교수는…
한국 디자인 진흥원장을 역임한 정경원 교수는 국내 산업디자인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 본부장(부시장)을 지냈으며 현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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