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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이룬 진정한 성공

[HOW I GOT STARTED] Crafting a Real Paper Success

파피루스 Papyrus는 국경을 넘나든 사랑을 바탕으로 버클리 Berkeley의 한 아파트에서 탄생했다.
Interview by Dinah Eng


마르셀 셔먼 Marcel Schurman(87)이 2차 세계대전 직후 런던에서 일하기 위해 고향인 스위스를 떠날 때만 해도, 미모의 독일 출신 유태인 피난민 마르기트 Margit(88)를 만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마르기트가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했을 때 마르셀도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은 곧 결혼했다. 이들은 얼마 후 버클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유럽에서 미술 카드를 수입하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셔먼 리테일 그룹 Schurman Retail Group은 파피루스, 칼튼 카드 Carlton Cards, 페이퍼 스레드 Paper Thread와 아메리칸 그리팅스 American Greetings의 소매 매장들을 소유하고 있다,

셔먼은 지난해 매출 2억 달러를 올렸다. 마르셀 셔먼: 나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소규모 와인 공급업자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마르기트 셔먼: 나는 독일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고급 가구와 동양산 양탄자 소매업을 했다.

마르셀: 젊은 시절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자라면서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전쟁 중에는 여행이 불가능했다. 스위스는 당시 몇 년 동안 포위된 상태라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전쟁의 결과에 따라 어디서 살게 되든 사업 경험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마르기트: 1938년 두 여동생과 함께 독일을 떠났다. 이후 몇 년을 영국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지냈다. 당시는 히틀러가 집권했던 시기였다. 나는 유태계여서 독일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가족들끼리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사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시기였다. 싫은 것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걸 그때부터 받아들이며 살았다.

마르셀: 15세 때 학교를 떠나 도제로 들어갈 자리를 찾았다. 가족 중심의 작은 회사에서 3년 동안 일하면서 다양한 업계에서 경험을 쌓았다. 저녁에는 실업 학교에 다녔다. 전쟁이 끝나고 1947년 국경이 개방됐을 때, 영국에서 직장을 잡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마르기트: 당시 하숙집에서 마르셀을 만났다. 나는 친척이 운영하는 동양산 양탄자 회사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창업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더 많은 기회를 잡기 위해 여동생들과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마르셀: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녀가 떠난 후 스위스로 돌아가 돈을 좀 더 모은 뒤, 1948년 미국비자를 받았다. 부푼 꿈과 희망을 안고(그러나 거의 빈털터리였다)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 도착했다. 당시 22살이었고 영어를 잘 못했다. 결국 건설 회사 사무직으로 일하게 됐다. 마르기트는 무역회사에서 근무했다. 내 월급은 200달러였지만 그녀는 500달러 정도를 벌었다.

마르기트: 나는 UC 버클리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몇 년 동안 버클리 지역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마르셀: 우리는 1949년 결혼했다. 마르기트는 영국에서 카드를 사곤 했는데 미국에선 좋아하는 종류의 카드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쓰려고 카드를 수입하다가, 다른 사람들도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회화와 순수미술 작품들을 고급 종이에 옮긴 복제품들이었는데, 당시에는 참신한 카드들이었다.

마르기트: 그림이 그려진 신용카드만 한 크기의 종이를 내가 백지에 고무풀로 붙여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의 첫 카드였다. 나중에는 영국과 유럽에서 카드 완제품을 수입했다. 정말 신바람을 내던 시기였다.

마르셀: 1951년 우리는 마르셀 셔먼 Marcel Schurman사를 설립했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 카드를 살지 알아보러 가게마다 찾아 다녔다. 당시에는 홀마크 Hallmark, 노크로스 Norcross, 아메리칸 그리팅스 같은 회사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운전을 할 줄 몰랐지만, 새로 배우고 중고차도 한 대 샀다. 매일 아침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나가 고객을 찾아 다녔다. 업종별 전화번호부에서 선물가게와 서점들을 찾았다. 사업은 조금씩 성장했다. 첫 해 수입은 2만 달러였다.

마르기트: 그러던 중 여동생 중 한 명이 버클리에 살 집 계약금 2,000달러를 빌려주었다. 우리는 상품들을 좁은 아파트 거실에서 그집 지하실로 옮겼다. 아주 오랫동안 가구도 없이 살았다.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을 때 주머니를 뒤져 잔돈이 충분한지 헤아려 봤던 기억이 난다. 충분하면 극장에 가고, 아니면 포기했다.

마르셀: 담보가 없었기 때문에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웠다. 사업을 시작한 지 7년 됐을 때 친구 한 명이 보증을 서줘 은행에서 1만 달러를 빌릴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유럽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참석해 새로운 공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결과 최신 카드와 포장지, 문구를 팔 수 있게 되었다. 1961년 처음으로 사업이 100만 달러 규모로 커졌다. 1965년에는 직원을 몇 명 고용하고 창고도 갖췄지만 여전히 작은 규모의 사업이었다.

마르기트: 1973년이 됐을 때, 혼자만의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클리에 우리 제품들을 파는 작은 가게를 냈다. 고대에는 종이를 파피루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게 이름을 ‘파피루스’라고 지었다. 가게를 여는 데는 1,000달러도 채 안 들었다. 중요한 건 상상력이었다. 합판을 벽에 비스듬히 기울여 기대놓고, 거기에 카드들을 진열했다. 카드를 펼치고 낚싯줄로 고정해서 마치 카드를 전시한 미술 갤러리처럼 만들었다. 카운터를 향나무로 만들어 향긋한 냄새가 나게 했다. 세련된 분위기 때문에 가게는 곧바로 성공했다.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가게였다.

마르셀: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 전까지는 소규모 선물 가게에서만 우리 제품을 팔았다. 대형 카드 회사들이 큰 매장들의 진열대를 꽉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매 사업을 운영했고 마르기트는 소매 쪽을 책임졌다.

마르기트: 계속 여기저기서 매장을 개업했고, 결국 미국 전역에 우리 가게들을 열기 시작했다. 창의력이 필요한 부분은 내가 전담하고, 회사의 다른 직원들이 회계와 재무를 맡았다.

마르셀: 도매와 소매 자금을 어떻게 분배할지가 항상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차츰 영업에서 얻은 이익을 사업에 재투자하고, 공급업자들로부터 신용도 얻을 수 있었다. 도매와 소매 양쪽을 순조롭게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기트: 1978년 우리 매장들은 번창일로에 있었다. 프랜차이즈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회사가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프랜차이즈 계약을 시작하자 내가 그 분야를 관리하게 됐다.

마르셀: 1980년대에는 판매사원을 더 많이 채용하고 전국 각지에 전시장을 열었다. 당시 연간 수입이 1,000만 달러에 가까웠다. 우리는 파피루스라는 이름으로 미국 내 생산을 처음 시작하고, 유럽과 일본에서 신제품을 들여와 더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91년 65세 때 은퇴하면서 막내딸 도미니크 Dominique에게 사업을 물려줬다. 15살 때 일하기 시작해 50년이나 일했기 때문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늘 관심을 가졌던 조각을 시작해 지금은 돌과 설화 석고(alabaster)를 재료로 작업하고 있다.

마르기트: 나는 1999년 파피루스에서 은퇴했다. 전쟁통의 런던, 기숙학교 생활 등 인생의 수많은 질곡을 넘는 노력 끝에 마침내 정말 사랑하는 것을 내 손으로 직접 일궜다. 후임자들이 회사를 맡은 직후에는, 파피루스매장에 들어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지적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일에 집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언가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데 계속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 판화를 판매하는 스크립텀 닷컴 Scriptum.com이라는 온라인 사업을 시작했다.

마르셀: 나는 우리 회사가 매우 자랑스럽다. 업계 1위는 아니지만 가장 훌륭한 회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카드업계가 인터넷과 이카드(e-card) 같은 것들 때문에 많은 변화를 겪겠지만, 잘 적응할 것이라 생각한다.

마르기트: 사람들은 여전히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침대 옆 탁자에 놓을 수 있는 카드를 받는 것과 온라인으로 안부 인사를 받는 것은 천지차이다.

마르셀: 카드가 사라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언젠가는 우리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취향과 품질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것이다.

“카드가 사라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취향과 품질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것이다.” -마르셀 셔먼

“사람들은 여전히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침대 옆 탁자에 놓을 수 있는 카드를 받는 것과 온라인으로 안부 인사를 받는 것은 천지차이다.” -마르기트 셔먼



우리의 충고
마르셀과 마르기트 셔먼
셔먼 리테일 그룹 창업주 부부

열정적으로 일하라.
에너지를 집중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미쳐야 한다.
우린 처음에 집에서 일했다. 아기가 의자에 앉아 우리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품질 경영을 하라

우리 제품들은 품질과 디자인 면에서 수준이 높았다. 고객 서비스도 그것을 확실히 반영하도록 꾸준히 노력했다.

절약하라
우리는 호화로운 사무실을 쓴 적이 없다. 직원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는 했지만, 그것도 호화롭게 한 적은 없다. 우리는 지금도 평범한 집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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