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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워치·올림픽 공식 타임키퍼… 시계 산업에 새로운 영감을 던지다

시계 브랜드 이야기 ⑨오메가

오메가는 이 시대의 워치메이커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브랜드다. 워치메이커들의 열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때에 오메가는 다소 황당할 정도의 결과물들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시계 산업에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1950년대의 황금시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과거에는 천재 워치메이커들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는 등 시계 산업이 다른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했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워치메이커들의 열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모든 워치메이커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적어도 오메가의 시계 장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이 시대의 워치메이커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다. 오메가 워치메이커들이 주목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계 장인들의 식어버린 열정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들도 한때 굉장히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 기술개발에 대한 열정이 불탔고 자존심 또한 강했다. 시계 장인들은 몇 날 며칠이나 뜯고 붙이기를 반복하며 좀 더 완벽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가 반전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1950년대 손목시계가 유행하면서부터다. ‘완벽한 시계를 만드는 것’에서 ‘빠르게 시계를 만드는 것’으로 작업장의 패러다임이 변해갔다. 워치메이커들은 장인이라 불렸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기계 관리자로 전락해버렸다. 하이엔드라는 타이틀을 달았음에도 한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하루 시계 수가 수백 여 개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시장논리로만 접근한다면 이때를 황금시대라 부를 만했다. 하지만 이 황금시대는 1970년대 쿼츠시계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금방 막을 내렸다. 전지를 이용하는 쿼츠시계는 시간의 정확도에서나 제조공정의 용이함에 있어서나 기계식 시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저가 쿼츠시계의 범람 속에서 하이엔드 기계식시계 브랜드들의 경영은 날로 악화됐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는 더 심각했다. 수십 년에 걸친 경영진의 생산 속도 향상 노력과 쿼츠시계의 등장 때문에 장인들의 무기력감은 극에 달했다. 이들은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 들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다시 장인들의 손길을 거친 ‘진정한’ 기계식 시계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각 브랜드들도 예전의 속도전 대신 품질 향상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분위기를 좇지 못했던 브랜드들은 도태되거나 박리다매의 저가 브랜드로 추락했다. 일종의 옥석 가리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인들의 새로운 기술 개발 의지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작은 몇몇 시도가 마케팅을 통해 과장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시계 산업에 르네상스가 도래했지만, 시계 장인들의 식어버린 열정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메가, 전설의 시작

하지만 오메가는 좀 유별났다. 심심하게 변해버린 하이엔드 워치 산업계에 다소 황당할 정도의 소식들로 새로운 재미를 부여했다. 이 브랜드는 도전의식에 가득 차 있으며 항상 활기가 넘친다. 물론 이 브랜드에 매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오메가 역시 창사 이래 최악의 브랜드 존폐 위기를 겪기도 했다.

오메가의 탄생은 18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3살의 젊은 청년이었던 루이 브란트 Louis Brandt는 스위스 라 쇼드 퐁 La Chaux-de-Fonds 지역에 시계 공방을 열고 시계 조립 및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시계 장인으로서의 역량도 뛰어났지만 대단한 수완가이기도 했다. 그는 시계 제작을 하지 않는 여름 기간 동안 직접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시계를 판매하곤 했는데, 시계는 물론이거니와 인물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자연스레 그의 시계는 ‘루이 브란트’라는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1879년 루이 브란트가 54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기업의 경영권은 두 아들 루이 폴 Louis Paul과 시저 Cesar에게로 넘어갔다. 당시만 해도 공방 규모가 창립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져 있었기 때문에 둘은 1880년에 비엔 Bienne 지역의 건물을 통째로 구입, 새로운 작업장을 차리게 된다. 2년 후 1882년에 같은 비엔 지역 내 구제른 Gurzelen으로 다시 이전했는데, 그 후에는 자리를 옮기지 않아 지금도 이곳에 본사가 위치해 있다.

1894년 루이 브란트 소속 시계 장인이자 당대 손꼽히는 워치메이커 기술자였던 프랑수아 슈빌라 Francois Chevillat가 19 Line Pocket Caliber를 발명하면서 루이 브란트 브랜드는 다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칼리버는 모든 부품을 표준화했기 때문에 부품을 갈거나 수리하기가 쉬웠다. 바야흐로 시계 대중화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19 Line Pocket Caliber의 발명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루이 브란트의 시계 공방을 ‘오메가 Omega’라 부르게 됐다. 오메가(Ω)는 그리스 자모의 맨 끝 글자로 ‘끝, 최후’라는 뜻이 담겨 있다. 루이 브란트의 시계 공방이 시계 기술의 끝을 완성했다는 의미였다. 몇몇 유명인들은 폴과 시저 형제에게 아예 브랜드명을 오메가로 바꿀 것을 제안했고, 이를 타당히 여긴 형제는 1894년 오메가 이름을 국제 상표로 등록, 1902년부터 루이 브란트라는 이름 대신 오메가를 공식 브랜드 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02년 당시 오메가는 이미 스위스에서 손꼽히는 시계 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성장, 그리고 위기

브랜드 명칭이 바뀐 이듬해인 1903년, 폴과 시저 형제가 둘 다 사망하면서 오메가에 잠시 경영 혼란이 일어난다. 두 형제의 네 자식이 오메가를 물려받았는데, 이들은 나이가 어려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제일 연장자였던 폴 에밀 브란트 Paul Emile Brandt도 1903년에는 23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때의 어려웠던 경험은 폴 에밀 브란트가 이후 오메가를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스위스 시계 업계에 불황이 불어닥쳤을 때도, 오메가는 오히려 위기를 기회 삼아 경쟁 관계에 있던 주요 브랜드들을 합병해 1930년 무렵에는 거대기업 SSIH(Societe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ere)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후 SSIH는 1970년대 중반까지 스위스 시계 산업을 주도했다.

SSIH는 설립 후 40여 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다른 기계식 시계 제조사들이 그랬듯이, 1970년대 쿼츠시계의 범람으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급기야 1981년에는 파산 위기까지 겪었지만, 은행의 유동성 공급으로 목숨만은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또 다른 스위스 거대 시계 그룹이었던 ASUAG(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두 회사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 이후, 서로 중복되는 부분을 줄이기 위해 1983년 ASUAG-SSIH로 완전히 합병했다.

ASUAG-SSIH는 합병과 동시에 마크 니콜라스 하이에크 Marc Nicholas Hayek가 이끄는 개인투자자 그룹에 인수되어 1985년 SMH(Societe de Microelectronique et d’Horlogerie)로 사명이 변경됐다가 1985년에 다시 이름이 바뀌어 현재의 스와치그룹 Swatch Group Ltd.이 되었다. 스와치라는 브랜드명은 두 번째 시계라는 뜻의 영어 ‘Second Watch’를 줄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SIHH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오메가는 스와치그룹 산하에서도 가장 경쟁력 있는 브랜드로 활약하며 현재까지도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다.

달에 간 최초의 손목시계 브랜드

오메가의 여러 기술적 시도들은 세계 시계 산업계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오메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비범한 재주가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듣는다. 그중 가장 황당한 건 달에 다녀온 유일무이한 손목시계라는 것이다.

1969년 7월 21일은 인류사에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의 지표면을 밟았다. 시계 브랜드들도 충격에 빠졌다.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Speedmaster 시계가 닐 암스트롱을 비롯한 우주비행사들의 오른 손목에 채워져 이 우주여행에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오메가는 미국과 러시아 우주 작전에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시계 브랜드였다.

오메가의 우주여행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보다 4년 전인 1965년 미국의 제미니 Gemini 3호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들도 오메가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오메가 측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사에서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나사 직원들은 우주여행을 함께할 시계를 찾기 위해 당시 시판되고 있는 수십 종의 시계를 직접 구입해 비밀리에 실험을 진행했다. 최종 후보에 오른 시계들은 적어도 일상에선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최악의 환경에서 실험을 받았는데, 그때 마지막까지 정상적으로 작동했던 시계가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였다.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는 영하 50도와 영상 100도를 오가는 극한의 온도 변화 등 최악의 실험 조건을 모두 버텨내면서 유일무이한 문 워치 Moon Watch 자격을 얻었고 이는 스피드마스터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올림픽 공식 타임키퍼

오메가는 올림픽 공식 타임키퍼로도 유명하다. 오메가는 193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이후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 25회에 걸쳐 올림픽 타임키퍼로 활약해왔다. 오메가와 올림픽의 82년에 걸친 인연은 오메가가 스포츠 타임키핑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스포츠 타임키핑 분야와 관련해 오메가의 혁신성이 돋보이는 최초의 발명품은 1945년에 개발한 세계 최초의 ‘휴대용 독립 방수 광전지’였다. 이 광전지의 개발 자체는 별로 주목 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광전지의 발명은 세계 최초의 판정용 포토 피니시 카메라인 레이슨드 오메가 타이머 Racend OMEGA Timer 등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레이슨드 오메가 타이머는 육상경기 등에서 여러 명의 선수가 거의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할 때 생기는 판정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스포츠 분야에 전자 계측을 도입한 최초의 시계 브랜드도 오메가다. 오메가는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오메가 타임 레코더 OMEGA Time Recoder를 사용해 이 분야에서 최초 기록을 세웠다. 오메가 타임 레코더는 뉴샤텔 천문대(Observatory of Neuchatel)에서 24시간 동안 0.05초 이내의 오차로 그 정확성을 인증받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의 인가를 획득했다. 같은 해 오메가는 이 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올림픽위원회로부터 올림픽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1961년 오메가는 각 선수의 시간 기록을 TV 스크린 위에 디지털 방식으로 덧입혀 보여주는 오메가스코프 OMEGAscope도 개발했다. 오메가스코프가 계측한 전자 기록 시간은 1966년 부다페스트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공식 시간으로 인정받아 오메가 스포츠 타임키핑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부다페스트 유럽선수권대회는 오메가스코프 전자 기록 시간이 공식 시간으로 인정된 최초의 유럽선수권대회였다. 현재는 올림픽을 비롯한 여러 경기에서 이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이듬해인 1967년, 오메가는 수영 대회용 터치패드를 경기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 터치패드는 물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선수와의 접촉에만 반응해 판정 불만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터치패드 기술은 현재 전 세계 주요 수영 경기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후로도 오메가는 1990년 보급형 포토 피니시 카메라인 스캔 오 비전 Scan‘O’Vision을 출시해 스포츠 타임키핑의 대중화를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기계식시계에 혁명을 일으킨 코-액시얼 무브먼트

영국의 워치메이커 토마스 머지 Thomas Mudge는 18세기에 스위스 탈진기를 개발했다. 그가 개발한 스위스 탈진기는 조금 더 발전되어 현재 거의 모든 기계식시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스위스 탈진기는 몇몇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품 간 마찰이 커 상대적으로 주유 시기가 짧고, 톱니바퀴와 팔레트의 접촉과 분리 과정이 커 한쪽으로 쏠린 기름이 응고되는 게 문제였다.

스위스 탈진기가 개발된 지 25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영국의 유명한 시계 장인 조지 다니엘스 George Daniels는 스위스 탈진기의 문제점을 보완한 새로운 탈진 시스템을 구상한다. 그리고 오메가는 1999년 조지 다니엘스의 새로운 탈진 시스템을 상용화한 코-액시얼 탈진기(Co-Axial Escapement)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코-액시얼 탈진기는 현재에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1999년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코-액시얼 칼리버 2500부터 2013년형 코-액시얼 8508까지 인하우스화 및 경량화, 항자성을 비롯한 여러 고기능들이 꾸준히 접목 과정을 거쳤다. 가장 최근에 나온 코-액시얼 8508은 상식을 뛰어넘는 항자성으로 유명세를 탔다.

코-액시얼 8508을 장착한 씨마스터 아쿠아 테라 >15’000 가우스는 이름처럼 1만5,000가우스(1.5테슬라) 이상의 자기장에도 견딜 수 있는 시계로 화제가 됐다. 이 모델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로 평가 받던 시계가 약 6,000~7,000가우스 정도의 항자성이었으니 1만5,000가우스 항자성이 얼마나 대단한 수치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쟁 브랜드들은 보통 1,000가우스 정도의 항자성만 돼도 엄청난 것인 양 호들갑을 떨 정도다. 오메가의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네이버, 한국i닷컴, 서울경제 홈페이지에서 ‘시계 브랜드 이야기’를 쳐보세요. 하이엔드 워치들에 대한 다양한 기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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