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를 접수한 땅콩 도둑들이 화제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한국 영화 최대 흥행성적을 쓰고 있는 3D 애니메이션 ‘넛잡’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넛잡의 흥행으로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한 불안한 시선은 여전하다.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은 과연 넛잡의 성공을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설연휴가 시작된 지난 1월 29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에 위치한 대한극장에 박근혜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박 대통령이 극장을 찾은 이유는 바로 국내 3D 애니메이션 영화 ‘넛잡(Nut Job)·땅콩 도둑들(이하 넛잡)’ 관람을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의 관람 이후 이 영화는 창조경제의 대표적인 사례로 떠오르며 주목받고 있다.
현재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북미 박스오피스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는 넛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과 함께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사실, 업계에서는 흥행 성적과 관계없이 이번 넛잡의 개봉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홀대받던 국내 애니메이션시장에서 탄생한 토종 콘텐츠가 할리우드에 안착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할리우드 접수한 넛잡, 그 비결은?
지난달 3일 미국 NBC 방송의 간판 아침뉴스 ‘투데이 쇼’에서는 올해 주목해볼 만한 영화를 선정해 방송했다. 이날 방송에서 가장 극찬을 받은 작품은 ‘넛잡’이었다. 이 날 방송에 참석한 세 명의 영화평론가와 패널들은 ‘넛잡’에 대해 “아주 괜찮은 애니메이션”이라고 호평했다. 특히 패널 중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예매 사이트인 판당고 Pandango 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인 타라 맥나마라 Tara McNamara 는 넛잡을 이렇게 평가했다. “넛잡은 ‘올해 가장 기대되는 패밀리 무비’다. 넛잡과 비교할만한 애니메이션이 개봉지 않는 만큼 높은 흥행수익도 기대된다.”
실제로 넛잡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45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넛잡’은 지난 1월 17일 북미 3,000여 개 상영관에서 개봉해 불과 나흘 만에 2,5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특히 미국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며 한국 영화 사상 북미 최고의 흥행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450억 원의 제작비는 인디 애니메이션 수준이다. 비교적 저렴한 제작비가 투입된 국내 3D 애니메이션이 미국을 넘어 글로벌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넛잡을 만든 회사는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 레드로버다. 지난 2004년 설립된 레드로버는 자본금 120억 원(지난해 기준) 규모의 조그마한 회사다. 그리고 하회진 레드로버 대표와 레드로버는 ‘넛잡’의 성공을 발판으로 창업 10여 년 만에 가장 주목받는 기업인, 기업으로 떠올랐다. 원래 레드로버는 3D 모니터를 만드는 제조업체였다. 우여곡절 끝에 전문가용 3D 모니터는 개발했지만 정작 이 모니터로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3D 게임 ‘로보칸’이다. 로보칸으로 큰 흥행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3D 콘텐츠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 대표는 본격적으로 3D콘텐츠 제작사업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3D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특히 관련 분야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시장을 뚫기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하 대표는 말한다. “영화 기획안을 들고 투자자를 찾았지만 시선은 차가웠죠.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하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 대표는 차별화된 전략을 세웠다. 처음부터 국내가 아닌 해외시장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특히 미국은 전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로 빅 마켓이다.
또 캐나다 제작사 튠박스와의 협업은 현지화 작업의 열쇠였다. ‘토이스토리’ ‘라따뚜이’ 등 굵직굵직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피터 레페티오티스 감독과 작가 론 카메론이 넛잡의 제작을 진두지휘했다. 미국판 넛잡의 더빙은 세계적인 배우 리암 니슨, 캐서린 헤이글이 맡아 경쟁력을 높였다.
시장 파악도 진행했다. 미국 어린이들이 미키마우스와 같은 쥐 캐릭터에 호감이 높다는 조사결과를 토대로 콘티를 구성했다. 배경 역시 1959년 미국의 공원으로 설정하며 친숙도를 높였다. 완성도는 자신 있었다. 지난해 아메리칸필름마켓(AFM)에서 공개된 넛잡의 짧은 영상은 미국 배급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 워너브라더스의 계약 제안은 하 대표가 성공을 예감한 시점이었다. 당시 미국 영화 유통업계 큰손으로 불리는 마이크 카즈 워너브라더스 수석프로듀서는 할리우드 대형 배급사에 넛잡을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마침내 미국 배급사 오픈로드가 넛잡의 할리우드 배급을 담당하게 됐다. 이례적으로 오픈로드는 넛잡의 홍보마케팅비로 2,500만 달러(약 269억 원)를 투입하기로 결정하며 넛잡의 흥행을 도왔다. 워너브라더스와 와인스타인컴퍼니는 영국과 북미 이외의 글로벌시장 배급을 담당한다.
배급사가 결정되자 제작비 지원이 이어졌다. 국내 콘텐츠펀드들의 자금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정부출자 투자조합 및 은행권에서도 수십억 원의 제작·홍보비를 지원했다. 특히 넛잡 성공의 경우, 정부의 역할이 컸다. 설 연휴 박 대통령이 넛잡을 관람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 대통령도 영화 관람 전 인사말을 통해 “이 영화는 저한테도 남다른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연은 이러하다. 박 대통령이 넛잡을 처음 접한 건 지난해 5월 청와대에서 열린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다. 회의에 참석한 제작사 관계자가 “좋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홍보·마케팅 자금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자 박 대통령이 직접 금융기관과 정부차원의 지원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넛잡은 할리우드 시장에서 토종 애니메이션의 위력을 과시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미 120개국에 선판매됐고, 지난달 초 기준 5,000만 달러의 극장수입을 올렸다. 4년간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하 대표는 말한다. “사실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조그만 코스닥 상장사가 애니메이션을 한다고 발표하자 ‘양치기 소년’이라는 비아냥거림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쌓아온 기술력을 믿었죠. 그리고 이번 성공을 통해 제2, 제3의 넛잡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넛잡은 1편의 성공에 힘입어 속편 제작이 확정된 상태다. 오는 2016년 1월 개봉을 목표로 제작에 돌입한 넛잡2는 1편 제작비보다 90억 원 늘어난 5,000만 달러(약 541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다.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 성장 가능성 확인
넛잡은 분명 국내 애니메이션 영화와 관련 시장의 가능성을 입증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장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지난 1월 13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어린이들에게 ‘뽀통령’으로 불리는 뽀로로와 라바, 로보카 폴리 등 40여 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애니 캐릭터가 국회를 찾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움에 부닥친 애니메이션 시장을 살려달라는 외침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주요 애니메이션 단체 7곳이 모여 설립한 ‘한국애니메이션발전연대’는 지난해 발의된 ‘애니메이션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하 애니메이션 육성법)의 임시국회 통과를 위해 이 같은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캐릭터를 갖고 있음에도 정작 이를 활용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어려움을 겪는 시장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20~30분가량의 애니메이션 한편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평균 8,000만~1억 원. 하지만 방송사 구매 단가와 부가수익을 합해도 제작비의 20~25% 정도만 회수 가능하다. 한마디로 ‘밑지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다.
이러한 상황은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대다수 국가에서도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프랑스 등 주요 국가에서는 문화산업기금예산을 활용해 애니메이션 산업 보호·육성정책을 펼치고 있다. 정부에서도 지난해 방송통신발전기금 1조 1,729억 원을 애니메이션 유통지원에 활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산업 주관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발전기금 운영주체인 방송통신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부, 기금 승인 주체인 기획재정부의 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정부뿐 아니라 대형 콘텐츠 투자조합 역시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다. 이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이유는 국내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을 낮게 보기 때문이다. 하회진 대표 역시 이 같은 의견에 동조했다. 하 대표는 “미국 배급사는 위험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의 질과 성공 가능성만 보고 배급을 지원해 줬습니다”라며 국내 투자사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애니메이션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넛잡의 흥행이 애니메이션 시장에 단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시장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죠. 정부와 콘텐츠 투자자들의 지원이 없다면 애니메이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최근 애니메이션 시장의 가능성을 높게 본 주요 콘텐츠 공급 시장과 정부가 애니메이션 활성화를 위해 적극 나서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지난 1월 SK브로드밴드는 서울시 중소기업지원기관 서울산업통상진흥원(SBA), KBS와 함께 총 30억 원 규모의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 활성화 및 안정적인 배급환경 조성을 위한 ‘애니버라이어티 2014’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애니버라이어티 2014’는 IPTV 사업자, 지상파 방송사, 지원기관이 함께하는 국내 최초의 협력 모델로 애니메이션 콘텐츠 생태계 구축 및 새로운 상생모델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번 사업을 통해 각 사는 공모전을 거쳐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2편을 선정, 총 30억 원(편당 15억 원 내외)을 투자·지원한다. 선정된 작품은 KBS 지상파와 SK브로드밴드의 IPTV 서비스를 통해 방영된다. 이 밖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최근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 사업 개선, 방영권료 인상을 골자로 한 애니메이션 시장 활성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업체들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특히 해외시장의 경우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이와 연관된 캐릭터 사업이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뽀로로의 제작사 아이코닉스는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베이징에 뽀로로를 테마로 한 실내 테마파크 ‘뽀로로 파크’를 건설 중이다. 이미 식품, 생활용품, 완구 등 다양한 뽀로로 상품들을 출시해 중국에서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는 아이코닉스는 중국 현지 법인을 설립해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이코닉스는 뽀로로파크 북경점 오픈 이후 광주, 상해, 대련, 청도 등 중국 대도시에 순차적으로 테마파크 건립을 추진할 방침이다.
로이비쥬얼의 로보카 폴리는 이미 중국에서 ‘국민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특히 로보카 폴리는 지난 1월 중국 공안부 산하 중국도로교통안전협회와 중국적십자기금회로부터 ‘길 위의 천사’ 어린이 교통안전 캠페인의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지난해 8월 중국 국영방송 CCTV 어린이채널 ‘진궤이즈성곽’을 통해 방영된 ‘폴리와 함께하는 교통안전 이야기’는 애니메이션 채널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라바의 경우 캐릭터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콘텐츠로 승부를 걸었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내세운 라바는 대사 없이 몸짓만으로 진행된다. 언어와 문화적 장벽에 가로막혔던 기존 애니메이션의 단점을 이겨내기 위한 전략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재 라바는 해외 100여개의 공중파와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다. 일본, 대만, 홍콩, 남미 등 20여 개국에서 캐릭터 상품화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라바는 오는 2월 열리는 ‘국제에미상’ 키즈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에미상은 TV 부문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릴 만큼 권위 있는 시상식이다. 라바는 프랑스, 영국 등 3개 작품과 진검승부를 펼칠 예정이다.
반면 중소 애니메이션 업체들은 해외시장 진출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캐릭터 사업의 경우 해외시장에서 상표권을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고가의 등록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진출을 망설이는 업체가 상당수다. 중소 애니메이션 업체 관계자는 “해외 중소 업체의 경우 정부차원의 지원책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에 나서고 있다”며 “정부가 나서 상표권 등록을 포함한 해외 사업을 지원해준다면 시장 전체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