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라마나 Dal LaMagna는 의외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회사를 밑바닥부터 일궈냈다.
Interview by Dinah Eng
달 라마나의 생각이 편협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렸을 때 그는 교황과 백만장자가 되고 싶었다. 여러 번의 모험적인 시도에 실패한 후, 라마나는 마침내 연간 5,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미용용품 생산업체 트위저먼 Tweezerman을 설립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현재 회사는 츠빌링 J.A. 헹켈스 Zwilling J.A. Henckels가 소유하고 있다). 라마나(67)는 정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정책과 상업분야에 관여하고 있다.
그는 현재 재활용 유리와 시멘트로 테이블 상판을 제조하는 아이스스톤 IceStone의 CEO다. 나는 뉴욕 퀸스 Queens에서 5남매 중 한 명으로 자랐고, 천주교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소방관과 부두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우리를 부양하기 위해 일을 두세 개나 하셨다.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기부 받은 캐딜락을 상품으로 주는 추첨행사를 열어 모금을 진행했다. 추첨권을 가장 많이 판매하면 슈운 레이서 Schwinn Racer라는 자전거를 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3학년 때 부모님은 내게 자전거를 사줄 형편이 안됐다. 그래서 나는 추첨권을 48개 팔아 자전거를 받았다. 그게 내 사업 경력의 시작이었다.
나는 시간당 보수를 받는 노동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고, 백만장자가 되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버드, 컬럼비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지원했고, 하버드와 컬럼비아에 합격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온 길은 아이비리그의 명문들보다 윌리 로먼 Willy Loman *역주: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 주인공. 현재는 힘들지만 언젠가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꾸다 삶을 마감한다 경영대학원에 더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하버드를 다니면서 시야가 크게 넓어졌다.
학부 및 MBA과정을 거치는 동안 10개 이상의 사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한번은 자동차 영화관을 자동차 디스코텍으로 개조했는데, 11일 연속 비가 오면서 접어야 했다. 또 하버드 스퀘어 Harvard Square에서 물침대 매장을 열었는데, 임대인이 물침대가 샐 것 같다며 우리를 내쫓은 적도 있다. 1971년 하버드를 졸업했고, 영화제작자가 돼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10년 동안 영화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결국 캘리포니아 주 베니스 비치 Venice Beach에 다다랐다.
1979년 나는 베니스 비치에서 아이스크림 판매업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옆집에 살던 두 자매와 옥상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는데, 자매 중 한 명의 남자친구가 왔다. 자연스럽게 커플이 함께 있고, 나와 다른 자매 한 명이 삼나무 위에 앉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엉덩이가 가시투성이였는데, 박힌 삼나무 가시가 염증을 일으켰다. 약국에서 뾰족한 족집게를 구입하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때 가시제거용 족집게를 판매하는 사업을 떠올리게 됐다.
그때까지 시도했던 이런저런 사업은 모두 실패했고, 서른둘의 나이에 빚이 15만 달러나 됐다. 그래서 일단 뉴욕에 돌아와 최저임금을 받으며 전자회사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생산라인 노동자들이 가느다란 족집게로 다이오드를 집어내는 것을 보았다. 팔려고 생각했던 상품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자산업용 족집게를 가시제거용 족집게로 바꿔 철물점과 벌목장에 판매하기로 했다.
500달러로 사업을 시작했고, 부두 일을 그만둔 아버지도 내 아이디어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18만 달러를 빌려 12%의 이자를 드렸다. 아버지는 복권을 사서 하루아침에 100만 달러가 생기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느 시점엔가 아버지가 빌려준 18만 달러의 절반 정도를 회사 주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내가 회사를 매각했을 때, 아버지가 소유한 주식의 값어치는 100만 달러나 됐다. 정말 기쁜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 20개 정도의 족집게 생산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료용 족집게를 생산하던 스위스의 듀몽 Dumont을 선정해 제품을 공급해 달라고 설득했다.
포장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그래서 포장형틀을 만드는 업자를 찾아가 공짜로 비닐팩 100개를 얻었다. 여기에 손수 상표를 붙여 벌목장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족집게를 10달러에 구매했다. 하지만 이걸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미용실에서 일하던 형의 전 여자친구가 내게 “끝이 뾰족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족집게를 구해온다면 손님들에게 팔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다이아몬드 족집게를 찾아냈고, 이를 표준 크기의 튜브에 담아 토요일마다 롱 아일랜드 지역의 미용실을 돌기 시작했다. 하루에 150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이 되었다. 무엇보다 고정비용이 없었다. 족집게를 4달러에 사들여 10달러에 팔았고, 항상 수익이 남았다. 첫해에 매출 8만 달러, 그다음 해에는 18만 달러, 또 그다음 해에는 35만 달러를 기록했다. 그후 연간 매출은 매년 계속 20%씩 성장했다.
1982년 미용사들에게 초정밀 눈썹용 족집게(Precision Eyebrow Tweezers)를 튜브에 넣어 판매하고 있었는데, 상품에 내 이름을 넣어 미용제품 업체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 달 라마나 그루밍 Dal LaMagna Grooming 족집게를 판매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용실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족집게맨(Tweezerman)이 왔다!”고 소리쳤다. 나는 즉시 상품명을 트위저먼으로 바꾸고 판매 담당자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1984년 트위저먼의 총매출은 100만 달러에 가까웠고, 그다음 해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금 유동성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신용카드업체들이 우리에게 신용카드를 보내주곤 했다. 나는 거의 모든 신용카드를 만들어 45개까지 소유했던 적이 있다. 월급을 주고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현금서비스를 많이 이용했다. 결국 신용카드 빚이 18만 달러에 달했는데, 당시 이자는 12~16%였다. 1986년 즈음에 나는 체이스 맨해튼 뱅크 Chase Manhattan Bank를 찾아가 18만 달러를 대출받아 신용카드 빚을 모두 갚았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정직함 때문이었다. 나는 한 주 주말 동안 판매행사를 통해 8만~9만 달러를 벌기도 했는데, 그 돈을 항상 모두 은행에 예금했다. 현금을 따로 보관한 적도, 거짓말을 한 적도 없었다. 은행직원은 내게 “당신은 유능하고 정직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 현금을 쥐고 있으려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유사한 족집게를 색다르게 포장해 다양한 유통경로를 통해 판매했다. 샐리 뷰티 서플라이 Sally Beauty Supply에는 트위저먼 프로페셔널 Tweezerman Professional, 베드 배스 앤드 비욘드 Bed, Bath & Beyond에는 스파 트위저먼 Spa Tweezerman, 그리고 워그린 Walgreens이나 편의점 같은 체인점에는 트위저먼 리미티드 Tweezerman Limited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했다.
어려운 점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미용용품으로 사업을 확대하기 전까지 족집게만 팔기로 나 자신을 제어해야 했다. 몇 해가 지나면서 우리는 큐티클 니퍼, 눈썹 빗, 미용가위 등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미용용품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제품이 200종에 달했다. 당시에는 내가 공급하던 품질의 제품을 비슷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업체가 없었다.
2004년 매출이 3,200만 달러까지 성장했다. 나는 이라크전쟁을 반대했고, 반전 영화에 자금을 대면서 정치활동가가 되었다. 여생을 족집게맨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회사를 인수할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다만 4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정리해고를 해선 안 된다. 둘째,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으니 회사를 이전해서도 안 된다. 셋째, 직원들에게 생계유지가 가능한 급여를 보장할 수 있는 책임성 있는 자본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넷째, 인수 금액은 최소 4,000만 달러여야 한다.
츠빌링 J.A. 행켈스가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5,700만 달러를 제안했다. 나는 기업을 매각하고 지난해까지 트위저먼의 이사로 활동했다. 이제는 더이상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트위저먼을 매각하면서 세상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재활용 유리와 시멘트로 테이블 상판을 제조하는 아이스스톤에 5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 사업은 환경친화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제품을 생산한다. 지난 몇 년간 더 많은 자금을 투자했고, 이제는 아이스스톤의 사장이면서 CEO, 그리고 최고운영책임자(COO)이기도 하다. 나 스스로 단지 기업을 회생시켜 매각하려는 사람에서, 아이스스톤을 친환경 건축자재 생산업체로 탈바꿈시키려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마치 내가 트위저먼을 일궈내면서 했던 것과 같다.
많이 실패해봐야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정말로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누구나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력, 끈기, 그리고 협력이 필요하다. 사람들과의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업을 한다면, 매우 공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 오히려 성공을 두려워하라. 성공하면 하루 24시간 꿈속에서 살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이 정말로 원하는 일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달 라마나
“나는 얼마 동안 달 라마나 그루밍 족집게를 판매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용실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트위저먼(족집게맨)이 왔다!’고 소리쳤다. 나는 즉시 상품명을 트위저먼으로 바꿨다.” -달 라마나
나의 조언
달 라마나
트위저먼의 설립자이자 아이스스톤 현 CEO
실패를 두려워 말라. 성공을 두려워하라.
성공하면 하루 24시간 꿈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이 정말로 원하는 일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직원들에게 힘을 실어줘라.
나는 직원주주플랜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허리케인 샌디 탓에 아이스스톤의 모든 장비가 물에 잠겼을 때, 직원들은 장비를 교체하는 대신 직접 수리에 나섰다. 덕분에 400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투자하라. 나는 직원들에게 “회사에 불필요한 요소를 찾아낸다면, 그 부분을 절약해 건강보험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직원들이 회사 소유 휴대폰을 포기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직원은 그에 비례해 건강보험에 더 많이 불입한다. 공장 직원은 매달 40달러, 관리직은 140달러를 건강보험으로 낸다. 물론 직원 모두가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