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가모는 구두 브랜드로 시작해 라이프 토털 브랜드로 성장해 가고 있는 명품 브랜드이다. 특히 한국에선 두 자리 수 성장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 신진 브랜드 돌풍으로 전통 명품 브랜드 위축, 다양한 구매 방식으로 매장 판매량 감소, 잇따른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 불만 가중 등 악재가 겹쳤다. 결국 지난해 페라가모는 한국 사업을 책임지는 수장을 교체했다. 미켈레 노르사 페라가모 회장은 국내 행사를 기념해 방한했다고 했지만 불안한 국내 시장 점검 차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유부혁 기자 yoo@hmgp.co.kr
사진 김태환 circus-studio.net
바라슈즈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의 시그니쳐 아이템이다. 낮은 굽과 그로그레인 리본이 바라슈즈의 특징이다. 바라슈즈는 페라가모 창업자인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장녀 피아마 페라가모가 디자인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드리 햅번을 비롯한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들이 즐겨 신으며 전 세계 여성들에게 사랑받았다. ‘바라’는 이탈리어로 ‘리본’이라는 뜻이다.
지난 4월 3일, 바라슈즈 론칭 35주년을 기념한 행사가 강남구 청담동 비욘드 뮤지엄에서 열렸다. 미켈레 노르사 Michele Norsa 페라가모 회장을 비롯한 한국의 수많은 유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파티를 가졌다. 미켈레 노르사 회장은 행사 직전 숙소인 호텔 신라 23층 라운지에서 포춘코리아와 단독으로 인터뷰를 했다.
미켈라 노르사 회장은 행사에 앞서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 명품 시장 상황은 회장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이탈리아 브랜드인 구찌와 페라가모, 프랑스 브랜드 크리스챤 디올 등은 영업이익률이 크게 하락하거나 아예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노르사 회장은 “한국은 이탈리아와 시장 규모가 비슷할 정도로 중요하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좋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페라가모코리아는 작년 말 대표를 교체했다. 업계에선 2012년 대비 2013년 영업이익이 40% 넘게 떨어진 것이 결정적 이유라 말한다. 또 갤러리아 명품관에서 매장 자리를 옮겨달라는 수모를 당하고 자존심이 상해 매장을 철수하기도 했다. 최완 전 대표가 18년 동안 페라가모코리아를 이끌어 온 공적보다 휘청거리는 실적이 더 중요하고 다급했던 것이다.
노르사 회장은 “최근 몇 년간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2010년부턴 두 자리 수 성장세를 기록했다. 2013년에는 한 자리 수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말할 뿐 성장 둔화와 실적 악화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이런 사정은 페라가모 뿐만이 아닌 전통 명품 업계의 과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유통구조와 소비 패턴 변화, 해당 브랜드의 안일한 대응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최근 한국은 병행수입과 직접구매 대행이 쇼핑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아직 명품 브랜드 수입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4%로 낮긴 하지만 성장세가 계속 치솟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 배송대행업체가 늘고 있고 직접구매 사이트에선 포인트 적립으로 소비자 만족도를 높여가고 있다. 지사 설립을 통한 독점적 유통으로 시장에서 가격을 마음대로 올려오던 명품 브랜드 입장에선 마음이 편치 않다. 업계는 아직 지켜보는 입장이지만 대부분 온라인 마켓 신설, 오프라인 시장 확대를 위한 방안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역시 병행수입 활성화 방안을 내놓으며 명품 업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지난 9일 기획재정부는 통과인증 병행수입업체를 늘리고 직접구매 목록통관을 전 소비재로 확대하는 방안인 ‘독과점적 소비재 수입구조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소비자들은 시장가격이 하락하길 바란다. 하지만 명품 업계와 백화점들은 아직 관망세다. 고가 명품의 경우 직접적인 피해나 관련은 없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소비패턴 변화도 명품 브랜드를 실적 위기로 몰아가는 주요 요인이다. 페라가모는 바라 론칭 35주년 행사와 함께 온라인 프로젝트 ‘라이코나 페라가모’를 시작했다. 페라가모 홈페이지에서 주문 제작이 가능하도록 해 구매자가 직접 선호하는 색상을 골라 슈즈를 완성하도록 한 서비스이다. 좋은 선택이다. 브랜드에 대한 기존의 수동적 태도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해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싶어하는 소비자의 변화된 구매심리를 잘 읽은 것이다.
과거 소비자는 그들이 선호하는 브랜드에서 아이템을 일괄 구매했다. 페라가모를 좋아하는소비자는 구두부터 향수, 타이, 지갑 등을 모두 페라가모로 구매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이템별 선호 브랜드가 다르다. 미켈레 노르사 회장 역시 “젊은 세대가 부각되는 만큼 그들에게 주목하고 있다”고 말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소비자를 공략할 것임을 예고했다. 기존의 명품 이미지를 탈피하고 젊은 소비자 기호에 맞도록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노르사 회장이 강조한 젊은 세대는 직접구매와 병행 수입을 통해 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길 바란다. 또 국내에 판매하지 않는 보다 다양한 아이템을 원한다.
노르사 회장은 국내의 잇따른 가격 인상에 대해선 “가격 차이는 대부분 관세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다른 나라에 비해 두 배 정도의 관세가 적용된다. 한국 가격은 절대 비싸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쇼핑관광이 늘어나며 유럽에서 쇼핑하고 돌아온 구매자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아시아 소비자들이 유럽 여행에서 비싼 세금을 물면서도 기어코 쇼핑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내 판매 가격이 높다는 인식은 경험으로 확산된 셈이다. 페라가모 관계자 역시 중국이나 홍콩에 비해 한국 판매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장 가격을 비싼 곳을 기준으로 싸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라서 회장이나 관계자의 말은 큰 설득력이 없다.
또 에르메스, 샤넬 등과 같은 노세일 브랜드 제품과 달리 페라가모는 시즌이 지나면 세일 판매하는 점, 아울렛 매장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에 페라가모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점도 충분한 가격 하락 요인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들 스스로 브랜드 파워가 약해졌음을 인정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또 새롭고 독특한 브랜드가 늘며 이들을 찾는 소비층이 늘고 있는 것 역시 페라가모를 비롯한 전통 명품 업계엔 타격이다.
마지막으로 명품 브랜드의 안일한 대응이 실적 악화를 불렀다는 분석이다. 명품 브랜드는 소비자에게 갑이다. 때만 되면 당연하다는 듯 올리는 가격에 소비자는 따를 수밖에 없다. 점점 친절해지고 소비자 위주로 변해가는 유통 구조와는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 페라가모 관계자는 “본사 정책이라 할 말이 없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가격은 여전히 중국이나 홍콩 등과 비교해 아시아 시장에서 저렴하게 판매된다”라고 되풀이했다. 페라가모코리아는 작년 11월에 이어 올 4월 다시 가격을 인상했다. 관세에 따른 가격 형평성이나 본사 가격 정책 등을 이유로 들었다.
최근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주목 받고 있다. 하지만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재무제표상 페라가모코리아의 기부금은 0원이다. 벌어들이는 데는 적극적이지만 기부에는 인색한 브랜드의 이런 행태 역시 브랜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생전 “나는 구두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 페라가모 브랜드 역시 구두로 성장했다. 하지만 최근 페라가모는 제품군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떨어지지 않을까 물었다. 노르사 회장은 “여전히 여성슈즈가 브랜드의 중심이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이다”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페라가모코리아 관계자는 “여느 명품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라이프 토털 브랜드로 성장해 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하며 “브랜드 제품군 확장은 브랜드의 욕망과도 같다”고 말했다.
최근 휘청이는 명품 시장에서 꿋꿋하게 성장하는 부문이 시계이다. 페라가모 역시 지난 2008년 시계 비즈니스에 뛰어 들었다. 전략을 묻는 질문에 노르사 회장은 “한국에 오기 직전 머문 곳이 스위스 바젤이다(스위스에선 매년 3월 말 세계 최대 시계박람회인 바젤월드를 개최한다). 스위스 타이멕스 Timex에서 페라가모 시계를 담당하고 있다. 페라가모는 시계 사업을 2~3년 안에 두 배 이상 성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계 핵심인 무브먼트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라이선스를 통해 업계에서 경쟁력을 갖춰 성장하기란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회장은 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노르사 회장은 “페라가모는 시계와 선글라스만을 라이선스로 사업하고 있으며 이들 제품군은 라이프 스타일에 속해 있어 브랜드 아이덴티티에도 지장이 없다. 시계는 페라가모에게 큰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자신했다.
페라가모는 설립 후 80년 가까이 지속해온 가족경영 전통을 깨고 지난 2006년 미켈레 노르사 회장을 CEO로 영입했다. 이후 미켈레 노르사 회장은 구두명품 브랜드에 머물러 있던 페라가모를 글로벌 명품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페라가모는 2011년 밀라노 증시에 상장했다. 노르사 회장의 취임 첫 목표가 IPO였다. 당시 유럽경기 침체로 IPO는 번번이 미뤄지며 노르사 회장에 시련을 안겼다. 상장 당시에 비해 페라가모 주가는 3배 이상 올랐다.
그래서일까. 명품 시장이 된서리를 맞았지만 노르사 회장은 당장의 시장상황에 크게 염려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말한다. “여전히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페라가모 타이를 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