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면 생활 영어가 가능하답니다.”
“평생 해도 제대로 못하는 영어를 한 달 만에 한다고?”
나는 포춘코리아 5월호에 실릴 기사에 대한 편집회의에서 한 기자의 보고를 이렇게 묵살했다. 그러나 그 기자는 킬-기자들 간 사용하는 속어로 기사화 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음-시킨 기사 얘기를 2차 편집회의에서 다시 꺼냈다.
“벌리츠 Berlitz 어학원 측에서 직접 체험을 해 보라는데요.” 마침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포춘 콘퍼런스 출장이 잡혀 있던 터라 큰 기대 없이 한 달간 벌리츠 어학원에서 영어훈련을 받아 보기로 했다.
채수종 편집장 sjchae@hmgp.co.kr
사진 한평화 info@studiomuse.kr
기자가 여의도에 있는 벌리츠 어학원을 처음 방문한 때는 벚꽃이 만개한 지난 4월 3일이었다. 벌리츠 어학원은 136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의 어학원으로 현재 75개국에서 550여 개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19년 전에 상륙했다. 소수 인원을 단기간에 집중교육하는 방식으로 유명하며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50개의 언어교육을 하고 있다.
예약을 한 덕분에 어학원에 도착하자마자 레벨테스트를 할 작은 방으로 곧바로 안내됐다. 이어 프로그램 어드바이저가 레벨테스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나갔다. 곧이어 알라스테어 미들턴 Alastair Middleton 벌리츠 여의도센터 교수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알라스테어는 자신의 이름이 길다며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서로 나눈 뒤 알라스테어는 “레벨테스트를 시작하겠다”며 준비해온 체크리스트를 펼쳤다. 그가 어려운 질문이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시작한 말은 “What’s, your, name?”이었다. ‘어려운 질문’이라는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웃음이 절로 났다. 이후 약 10여 개 항목에 대해 질문이 이어진 뒤 테스트가 끝났다.
알라스테어가 나간 뒤 잠시 후 프로그램 어드바이저가 다시 들어왔다. 나에 대한 레벨테스트 결과를 알려주었다. 레벨5.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는 안내 책자를 보여주며 레벨5는 ‘사적으로 또는 업무상 필요한 일상적 대화를 시작해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알려줬다. 그는 내가 영어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대해 무려 30분 가까이 상세하게 물었다. 그리고 한 달간의 수업 시간표를 작성했다. 원어민과의 1대1 수업(Private)과 특정한 날을 잡아 하루 종일 원어민과 지내는 개인 집중코스(Total Immersion)를 병행하기로 했다.
벌리츠 어학원은 활기찼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상황의 영어 프로그램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36년을 이어온 벌리츠 어학원의 저력을 살짝 맛보는 느낌이었다.
첫 수업
첫 수업은 시간표에 따라 7일부터 시작됐다. 원어민과 1대1로 90분간 진행하는 방식이다. 어학원 안내 데스크 옆에 수강생들의 이름과 배정된 방을 알려주는 표를 보고 강의실을 찾아갔다. 방에서 잠시 기다리자 앞으로 한 달간 나를 지도할 담당 인스트럭터(강사)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내가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원어민의 모습과 달랐다. 방에서 기다리는 동안 덩치 큰 노랑머리 원어민이 들어 올 때 당황하지 않고 “Nice to meet you”라고 자신있게 말하리라 되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담당 인스트럭터의 모습은 검은머리에 덩치도 그리 크지 않은 전형적인 한국인이었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Michael W. Park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덧붙였다. 국내 최고의 강사진을 자랑하는 벌리츠 어학원이, 그것도 벌리츠가 가장 자랑하는 프로그램인 1대1 개인수업의 강사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나한테는 노랑머리에 덩치 큰 북미계 원어민과 현지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한국계 미국인의 발음과 실력차이를 검증할 만한 능력이 없다. 또 수십년 경력의 베테랑과 초짜의 강의 능력을 구분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최고 경력의 북미계 원어민과 수업을 할 것이란 기대감은 버려야 했다.
나는 예상을 빗나간 상황에 당황하며 더듬는 말로 인사를 마쳤다. 첫인상을 좋게 심어주고 싶었는데 잘 안됐다. ‘체스 chess’ 같은 간단한 영어 단어도 잘 생각이 나지 않고 입에서 맴돌아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이클은 분위기를 편하게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질문한 뒤 내가 답하면 다시 덧붙이는 방식으로 내게 부족한 부분을 짚어나갔다. 에너지가 넘치는 마이클과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사실, 이날 수업 전에는 90분 동안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걱정이 많았다. 2년 전에 프리토킹 전화영어 수업을 할 때 3분만 말하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수업 90분이 마치 90초처럼 흘러갔다. 그는 좋은 학생과 훌륭한 학생의 차이점은 단어실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매일 단어를 외우라고 주문하며 단어가 빼곡하게 적힌 인쇄물을 건네줬다. 방법은 그냥 단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만들어 외우라고 했다. 마이클은 “수업 시작 때는 말이 느리고 많이 끊겼는데, 중반 이후 자신감 있게 잘 말하고 있다”고 칭찬하며 “단어 실력이 훌륭한 학생을 만든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수업
두 번째 수업은 처음보다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의사표현이 자유롭지 못해 답답했다. 처음엔 벌리츠 교재로 수업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프리토킹을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나의 사무실에서의 생활과 최근에 쓴 기사, 인터뷰를 꼭 하고 싶은 사람 등에 대해 물었다. 마이클은 여러 질문을 했고 내가 답을 하면 반드시 추가 질문을 해 왔다. 그래서 내가 먼저 질문을 하면 상황이 좀 쉬워질까 싶어서 선수를 쳐봤지만 그의 집요한 질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영어실력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아무리 좋은 강사의 도움을 받아도 말이다.
세 번째 수업
오늘은 좀 가벼운 기분으로 수업을 했다. 그래서 머리로 하는 생각은 줄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해봤다. 마이클은 가끔씩 ‘완전한 콩글리시(100% Konglish)’라고 소리쳤지만, 대부분은 ‘굿’이라며 격려했다. 수업 태도를 조금 바꾸어서인지, 아니면 세 번째 진행되는 수업이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하기가 조금 편해졌다.
네 번째 수업
마이클과 주말 얘기로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느닷없이 여성 인스트럭터가 들어왔다. 그는 이름이 줄리 Julie Harvey이며 워싱턴에서 살다 왔다고 소개했다. 그는 어머니가 한국계 미국인이고, 홍보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으며 아주 짧게 잡지사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벌리츠에서는 다양한 영어 액센트와 억양을 배우기 위해 여러 지역출신의 인스트럭터가 돌아가며 수업을 진행한다는 프로그램 어드바이저의 설명이 떠 올랐다.
새로운 인스트럭터와 수업을 하니 분위기도 달랐다. 하지만 기존에 하던 수업의 연속성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줄리는 마이클과 수업방식이 조금 달랐다. 마이클은 특정 상황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하지만 줄리는 편하게 대화하면서 내가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사용하면 그때마다 수정해 줬다. 틀린 부분을 적어주는 줄리와의 수업이 조금 더 편했다. 하지만 마이클의 수업이 조금 더 깊은 맛은 있는 것 같다. 원어민들과 집중적으로 얘기를 하다 보니 영어로 의사표현을 하기가 조금 쉬워졌다. 덜 답답한 느낌이다. 실력이 늘어난 것인지 아니면 조금 상황에 익숙해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섯 번째 수업
오늘 수업도 줄리가 진행했다. 진행방식은 지난번과 동일했다. 줄리가 나한테 주요 관심사에 대해 묻고, 내가 답하면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수정해 주는 방식이다. 내가 기자로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부터 우리나라 통일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영어로 여러 번 얘기해 봤던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서는 크게 어렵지 않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통일 등 무게 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자주 막혔다. 그때마다 줄리는 내가 문장을 완성하기를 기다렸다가 수정해 줬다. 줄리가 시간이 다 됐다고 말했다. 시계를 보니 수업 시간 90분을 지나 10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중간 휴식시간도 없이, 수업시간을 넘겨 가면서까지 인내심을 갖고 대화에 응해준 줄리가 고마웠다.
여섯 번째 수업
마이클과 수업을 했다. 우리는 교재와 관계없이 진도해역에서 침몰한 세월호 이야기부터 평소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친구와 얘기하듯 주제 제한없이 다양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마이클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잘 이끌어줬다. 내가 하는 말에 때론 맞장구 치며, 때론 인내심을 보이며 끝까지 들어줬다. 틀린 문장을 재빠르게 수정해 주는가 하면, 완벽하다고 칭찬도 쏟아냈다. 재밌다.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일곱 번째 수업
줄리가 들어왔다.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방한 및 방일에 앞서 한일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양국간 얽힌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오늘 수업시간도 100분을 넘겼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된 주제를 영어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며칠동안 자신감이 좀 붙은 것 같았는데, 역시 쉽지 않다.
여덟 번째 수업
오늘도 줄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줄리는 항상 차분히 인내심을 갖고 듣는 스타일이어서 이야기하기 편하다. 주로 우리나라 주요 산업과 주요 업체들의 경쟁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분야여서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 수업보다 편했다.
오늘은 수업이 끝난 뒤 별도 상담을 했다. 원어민이 5~6가지 항목으로 정리한 상담서에 기록을 했다. 대부분 수업에 대한 내 생각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업을 진행한 마이클과 줄리 모두 좋은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자꾸 묻길래, 미국인이나 캐나다인 원어민과도 수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외모가 중요하지는 않다고 강조하더니, 내가 더 많은 다른 인스트럭터와 만나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진행되는 수업에 대한 수강생의 의견을 파악해 반영하려는 노력이 좋아 보였다.
아홉 번째 수업
상담에서 외국인 인스트럭터와 수업을 하고 싶다는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오늘 수업은 미국인 커트니 Courtney Brittan가 들어왔다. 백인 여성이다.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지만 생각같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마이클이나 줄리와 이야기 할 때보다 분위기가 좀 딱딱해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이야기를 들어주며 틀린 표현을 잡아주는 마이클이나 줄리와 달리 커트니는 특정 상황에서의 표현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수업은 효율적인 것 같은데, 재미는 덜했다.
열 번째 수업
오늘은 벌리츠가 자랑하는 토털 이머전 Total Immersion을 체험했다. 말 그대로 영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하루 종일 원어민 강사와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6명의 원어민 강사들이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 15분까지 나눠서 진행했다. 특히 마이클, 도미닉 Dominic Montano과 함께 한 2대1 수업이 흥미로웠다. 처음 만난 미국인 인스트럭터인 도미닉이 나한테 질문을 하고 내가 답하는 과정에서 마이클이 추가 질문을 했다. 두 사람은 내가 말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감기에 걸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 종일 여러 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무척 피곤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인지, 우리말로 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다. 마이클은 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격려해 줬다.
점심시간도 좋았다. 줄리와 함께 점심을 한 뒤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소소한 얘기를 했다. 그동안 식당이나 커피숍 같은 데서 외국인과 영어로 얘기를 나누는 사람을 볼 때마다 눈길이 갔었는데, 이제 내 버킷리스트에서 하나는 지워도 될 것 같다. 토털 이머전은 영어를 배우는데 정말 효과적인 프로그램인 것 같다.
열한 번째 수업
수업하기 가장 편한 줄리가 들어왔다. 결혼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또 몇가지 조크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어로 조크를 하며 함께 공감하고 웃어보기는 처음이다.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오늘따라 줄리의 말이 빨랐다.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소통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줄리는 내가 처음보다 많이 유창해졌다고 칭찬했다.
열두 번째 수업
일주일 만에 하는 수업이어서 그런지 말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인스트럭터인 도미닉은 대학에서 국제 비즈니스를 전공했다. 그래서 삼성, 현대차 등 우리 기업들과 GE 등 미국 기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재미있는 주제여서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도미닉은 내가 문장을 하나씩 완성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을 조용히 들어줬다.
열세 번째 수업
마지막 수업이다. 토털 이머전에서 만났던 패트릭 Patrict Bradley이 들어왔다. 한국 경제 현황과 대기업 집단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서로 생각이 잘 통해 편안하고 재미있었다. 마음 잘 맞는 회사 동료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벌리츠 체험 후기
벌리츠와 약속한 한 달간의 수업이 마무리됐다.
그동안 내 영어실력은 어떻게 변화됐을까? 교육 시작 전에 평가받은 레벨5에서 레벨6로 한 계단 올라섰을까? 내 진단으로는 지금도 ‘능숙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는 수준’인 레벨6에 못 미친다. 여전히 즉각적인 응답과 세밀한 감정전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큰 변화가 있었다. 외국인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면서 말하기 실력이 확연하게 늘었다. ‘잘 말하려면 많이 말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이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특정 주제에 대해 영어로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누군가 ‘벌리츠 교육이 효과가 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물론 내 경우를 일반화해서 모든 사람한테 벌리츠 교육이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달이면 생활영어가 가능한지 여부도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확실한 것은 벌리츠는 효율적인 교육 시스템과 유능한 인스트럭터들이 외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의 목적에 맞는 교수법을 찾아 집중 교육하는 곳이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