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정통과학으로서의 법의학

미국에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정도의 자금과 차고만 있으면 누구나 법의학 연구소 설립이 가능한 실정이다.

1978년 7월 26일 아침. 63세의 택시기사 존 맥코믹이 자신의 집 현관에서 강도를 당하고 총에 맞아 숨졌다. 총소리에 깨어난 그의 아내는 스타킹을 쓴 채 도망치는 범인을 목격했고, 수사관들은 사건현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스타킹을 발견했다.

경찰이 지목한 유력 용의자는 산테 트리블이라는 17세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재판장에서 FBI는 현미경 분석 결과, 스타킹에서 찾아낸 머리카락 한 올과 트리블의 머리카락이 완벽히 일치한다고 증언했다. 5~6명의 증인들이 트리블의 알리바이를 입증했지만 FBI의 증언은 배심원들의 신뢰를 얻었고,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23년간 복역한 뒤 2003년에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런데 2012년에 이르러 당시 증거로 제출됐던 머리카락 샘플의 DNA 검사가 이뤄지면서 트리블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놀랍게도 그 머리카락은 개털이었다. 이처럼 지금껏 미국에서만 유죄 판결 후 DNA 검사를 통해 무죄가 입증된 사람이 350명 이상이다. 그중 18명은 사형 집행 뒤 무죄가 밝혀졌다. 과학계에서 법의학을 정통과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에는 이런 엉성함이 한 몫을 한다.

실제로 억울하게 옥살이 중인 사람들을 구제하는 단체인 이노센트 프로젝트에 따르면 DNA 검사로 무죄가 밝혀진 사건 가운데 50% 이상은 공인 받지 않았거나 부적절한 법의학 분석기법을 사용한 것이 원인이었다. 또한 미 국가연구위원회(NRC)는 2009년 328페이지에 달하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하고 머리카락, 이빨 자국, 발자국, 타이어 자국 등을 분석하기 위해 널리 쓰이고 있는 법의학 기법들의 허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의학은 ‘나쁜 과학’이 아니다. DNA 분석, 혈액형 분석 등 일부 기법은 철저하고 신뢰성 높은 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적절한 과학교육과 관리감독, 표준화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기법들을 사용한다는 게 핵심이다.

미국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한 법의학 연구소의 사례가 그 방증이다. 이 연구소는 2012년 모든 마약 및 지문 분석을 중단했다. 이곳 직원들이 표준화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기초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다 더러운 실험도구를 사용했다는 변호사들의 이의가 공식 제기된 뒤였다.



미국 내 여러 법의학 연구소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공신력을 지닌 법의학 조직의 인가를 받지 않은 상태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런 인가를 요구하는 주정부는 소수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NRC의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어느 정도의 자금과 차고만 있으면 거의 누구나 법의학 연구소 설립이 가능하다.”

다행인 점은 느리게나마 이 문제가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올 1월에만 해도 미 법무부와 상무부가 법의학자, 변호사, 경찰관 등이 참여하는 법의학 국가위원회를 창설해 표준 확립에 나섰다.

바라건대 이에 더해 사법부는 그동안 경시돼 왔던 법의학 교육프로그램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해야 한다. 미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존 프로그램 대다수는 대학원 수준에 불과하고, 그나마 과학이나 통계학보다는 사법제도에 대한 비중이 더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도 분석관들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389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는 미국 내 법의학 연구소의 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