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개발사업은 1~2년 내에 이뤄지지 않는다. 최소 20년 이상 꾸준히 노력해야 결과물이 나온다. 우리는 매년 이익의 15% 이상을 석유개발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꿈은 원대하고 계획적이었다. 그의 꿈은 곧 SK그룹의 목표이기도 했다. SK는 석유개발사업에 뛰어든 지 30여 년 만에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대들보로 성장했다. SK그룹의 석유화학사업을 전담하는 SK이노베이션은 오늘도 새로운 지역에서 다양한 분야의 신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1980년 11월, 알짜배기 국영 에너지기업 대한석유공사가 새 주인을 맞았다. 세계 제2차 석유파동을 겪은 정부는 더 이상 석유공사를 운영할 수 있는 동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 재계서열 10위권의 선경그룹(현 SK그룹)이 연 매출 1조 원의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최종현 회장은 섬유사업으로 경영 기반을 다진 선경그룹의 체질개선 방안으로 석유사업을 지목했다. 최 회장은 ‘석유와 섬유’라는 산업 연계성에 경영전략의 초점을 맞췄다.
시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대한석유공사에서 유공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외자원사업에 적극적으로 도전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1983년 인도네시아 카리문에서 시작한 첫 해상광구 탐사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잇단 실패는 석유사업에 대한 최 회장의 의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그리고 1984년 아프리카 지역 광구 탐사에 성공해 글로벌 에너지 기업으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그 후 유공에서 SK에너지로 사명을 전환하고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후 SK그룹의 에너지 사업은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2010년에는 SK에너지, SK종합화학, SK루브리컨츠, SK인천석유화학,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등 5개 자회사를 보유한 SK이노베이션을 만들어 모그룹의 에너지 개발사업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50여 년 동안 SK그룹은 해외 자원개발 분야에 선제적으로 진출해 세계자원개발시장에서 주목 받는 기업으로 성장해왔다. 중동, 북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으로 활동범위를 넓히며 신규 매출원 확보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 SK종합화학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화학업체인 사빅(SABIC)과 손잡고 고성능 폴리에틸렌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섰다. 지난 5월 사빅과 고성능 폴리에틸렌의 SK브랜드인 ‘넥 슬렌’의 생산 및 글로벌 시장 판매를 위한 합작법인 설립 계약(JVA)을 체결했다. 양사는 각각 절반의 지분율로 올해 안에 싱가포르에 합작법인을 설립, SK종합화학의 두 번째 넥슬렌 공장을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설할 예정이다. 양사가 합작법인 설립에 투입하는 금액은 6,000억 원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공장 설립이 본격화 될 경우 양사의 투자금액이 1조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넥슬렌은 SK가 지난 2010년 말 촉매·공정·제품 등 전 과정을 100% 독자 기술로 개발한 고성능 폴리에틸렌 브랜드다. 일반 폴리에틸렌보다 충격에 강하고 투명성과 위생, 가공성 등도 크게 강화됐다. 폴리에틸렌은 주로 고부가 필름, 자동차 및 신발 내장재, 케이블 피복 등에 사용되는데, 현재 미국 다우케미칼과 엑슨모빌 등 일부 메이저 화학사들이 글로벌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SK종합화학과 사빅의 합작법인 넥슬렌의 출범은 SK이노베이션의 향후 글로벌시장 공략에 청신호를 밝힐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중동지역 화학업계의 큰손사빅과의 협력으로 국내 석유화학업체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원가경쟁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국내 기업들은 폴리에틸렌의 원료인 나프타 생산을 위해 원유를 수입해 왔기 때문에 산유국 업체들보다 가격경쟁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도 사빅이 확보하고 있는, 천연가스에서 추출할 수 있는 ‘에탄’은 나프타 대체 자원으로도 각광 받고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에탄을 원료로 중동현지에서 폴리에틸렌을 만든다면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미 제조공정과 촉매 등의 폴리에틸렌 제조관련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에 기술사용료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의 이번 합작에 대해 최태원 SK회장이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지난 2011년 3월 최 회장이 자원경영을 위해 직접 중동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최 회장은 모하메디 알마디 사빅 부회장을 만나 고성능 폴리에틸렌 분야의 전략적 제휴를 직접 제안했죠. 그 후 2년여에 걸친 실무 협상을 벌여 결국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중동과 글로벌시장 공략에 대한 최 회장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실제 최 회장은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합작행사에 참석한 알마디 부회장에게 옥중 서신을 보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편지에는 최 회장이 직접 사업을 제의한 지 3년 만에 계약이 성사된 것에 대한 기쁨의 소회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빅과의 협업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글로벌 행보는 바로 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 전기차 배터리 분야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초 배터리와 정보전자 등 신성장 사업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수익성 극대화와 새로운 먹거리 창출을 통해 ‘정유 기업’이 아닌 ‘글로벌 에너지 기업’으로서 입지를 다져 나가겠다는 것이다.
우선 배터리 사업부와 정보전자(I/E) 소재 사업본부를 신성장사업 (New Biz Development·NBD)으로 통합, 새로운 회사 내 회사(CIC)를 신설했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 사업의 경우, 지난 1월 베이징전공과 베이징기차와의 합작법인인 ‘베이징 베스크 테크놀로지Beijing BESK Technology’를 설립하고 중국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중국시장은 신소재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 간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지는 곳이다.
한재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주요 에너지 시장 중 하나인 중국에서 국내 기업의 고부가가치 신소재 기술 경쟁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적극적인 투자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야 할 시점이기 때문에 SK이노베이션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연간 전기차 1만 대에 공급할 수 있는 배터리 팩 제조라인을 오는 하반기까지 구축할 예정이다. 오는 2017년까지는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 규모를 2만 대까지 늘려 중국 내 전기차 배터리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서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이번 합작법인 설립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전기차 시장으로 성장할 중국 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했다”며 “SK이노베이션 등 3개사의 각 영역별 기술력과 사업 경험을 결합해 앞으로 중국 전기차 시장을 선도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SK이노베이션은 리튬이온 분리막(LiBS)을 비롯한 정보전자소재 사업에도 집중한다. 국내 1위, 세계 3위에 오른 LiBS 사업에선 8~9호 라인을 확장할 예정이다. 회로기판에 쓰이는 얇은 동판인 연성동박적충판(FCCL) 부문도 하반기 2호 라인 증설이 완료되면 연간 총 900만㎡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럴 경우 글로벌시장에서 생산능력 기준 세계 2위로 수직 상승한다.
한편 SK이노베이션의 핵심 사업인 석유개발분야에서도 성장이 기대된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은 한층 더 과감한 석유개발 사업 투자로 글로벌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SK이노베이션은 모로코 서부 해안에 있는 탐사 광구 포움 아사카의 지분 12.5%를 320만 달러(약 32억 원)에 인수했다. 아직 탐사단계인 포움 아사카 광구에 대한 본격 개발이 시작되면 앞으로 수천억 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지난 2010년 콜롬비아 광구 인수 이후 첫 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큰 규모의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아프리카 우간다 정유사업 참여는 동아프리카 자원시장을 노린 포석이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25억 달러 규모의 우간다 정유공장 건설 사업자를 선정하는 입찰에 참여해 적격예비후보(Short list)로 선정된 바 있다.
최근 우간다를 포함한 동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활발한 개발이 이뤄지고 있어 다양한 글로벌 기업들이 이 지역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영국 페트로팍Petrofac, 석유 중개업체 비톨Vitol등 6개의 업체와 경쟁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자회사 SK석유개발(E&P)아메리카를 통해 미국 내 석유 생산광구 2곳의 지분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번에 인수한 석유 생산광구 지분은 오클라호마 주에 있는 그랜트·가필드 카운티 생산광구의 지분 75%, 텍사스 주 크레인 카운티 생산광구 지분 50%로, SK이노베이션은 이 지분에 약 3,900억 원을 투자했다.
이번 지분 인수로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진출 후 처음으로 현지 석유광구 운영권을 직접 확보하게 되었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세계 3위 산유국인 미국에서 석유광구를 운영하면서 최신 기술을 배우고 사업 역량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에 따라 지분 인수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SK이노베이션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김승우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번 지분 인수는 지난 2011년부터 추진해온 미국 E&P 기업 인수합병 전략과 비교했을 때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합리적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들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경기 침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SK에너지는 올해를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는 해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원재료 수급 다변화를 통해 공정을 유연화하고 마케팅 방식을 최적화할 계획이다. 북미와 동남아, 아프리카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에너지 관련 프로젝트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지난해 7월 출범한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SK인천석유화학도 올해를 사업 원년으로 삼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각오다.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은 안정적인 원유 확보와 수출시장 확대에 주력하고, 트레이딩 사업 모델 개발과 사업영역 확대를 추진할 계획이다. SK인천석유화학은 초경질원유(콘덴세이트)를 기반으로 PX와 같은 고부가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설비 증설을 완료하고 중국을 포함한 글로벌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윤활유 전문 생산업체 SK루브리컨츠는 품질 경쟁력 향상을 통해 글로벌 시장 공략을 강화한다. 스페인 최대 정유사 렙솔과 합작해 짓고 있는 윤활기유 공장을 오는 10월부터 본격 가동할 예정이다. 윤활기유는 윤활유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원료로, SK루브리컨츠의 스페인 공장이 완공되면 고급 윤활유 원료인 ‘그룹3 윤활기유’를 하루 1만 3,300배럴가량 생산할 수 있게 된다.
SK루브리컨츠는 스페인 공장을 거점으로 올해 유럽시장 공략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유럽의 환경기준 통과가 까다로운 만큼 현지에서 생산한 고급 윤활유 관련 제품을 적극 활용한다. 이를 통해 그룹3 윤활기유 시장의 선두 업체로서 더욱 탄탄한 입지를 다지겠다는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