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가톨릭을 믿어온 페루는 피임을 금기 시하는 가톨릭의 교리로 인해 피임법의 보급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지난 10여년간 국민들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산아제한 정도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됐지만 여전히 응급피임약 또는 사후피임약의 사용만큼은 도덕적·윤리적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사후피임약과 관련한 또다른 논란이 제기되며 페루 보건당국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 논란이란 바로 페루 내에서 유통되는 사후피임약에 가짜가 너무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는 페루의 성(性) 보건 관련 비영리단체인 ‘프로살루드 인터어메리카나(Prosalud Interamericana)’가 사후피임약 시장의 증대에 맞서 국민적 경각심을 높이고자 실시했다. 앨런 램버트 회장에 따르면 이 단체는 그동안 페루의 약국에서 판매되는 피임약 중 일부가 광고와 달리 제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의혹을 품어왔었다.
“물론 약국에서 팔리는 모든 피임약은 당국의 허가를 받은 제품입니다. 하지만 허가 과정이 그리 엄격하지 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결국 프로살루드 인터어메리카나는 과거 가짜 말라리아약 유통실태를 연구한 경험이 있는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생화학과 파쿤두 페르난데스 교수팀에게 피임약의 진위 여부 조사를 의뢰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페루 리마의 여러 약국을 돌며 구입한 사후피임약 4개 중 1개가 피임 효과가 전혀 없는 가짜였던 것이다. 페르난데스 교수가 밝혀낸 가짜 약의 성분은 주로 싸구려 항생제였다.
“약사들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이 약들을 저희에게 건넸습니다. 진품으로 착각하고 판매한 약사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약사도 있을 겁니다.”
진짜와 가짜
이 같은 가짜 피임약은 위험성이 매우 크다. 일부는 단순히 피임 효과가 없을 뿐이었지만 유해물질이 섞여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잘못 복용하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제품까지 있었다. 판매 전에 법에 정해진 검사를 통과했고, 그 사실이 문서로 남아있는 제품이었음에도 말이다.
페르난데스 교수에 의하면 이번 연구에 참가한 여성 박사후 과정생들이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다. 거의 모든 여성들은 피임약과 피임도구를 신뢰하고 있고, 제대로 복용 또는 사용하면 성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적어도 페루의 여성들은 그 믿음에 걸맞은 대가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모든 가짜가 그렇듯 가짜 의약품 역시 포장부터 진짜와 구별이 안 갈만큼 똑같다. 알약 자체도 진품을 옆에 놓고 비교해야 간신히 알아챌 수 있는 수준이다. 페루의 가짜 사후피임약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연구팀은 사후피임약 25회분을 구입했다. 9개국 20개 업체에서 생산한 제품이었다. 페르난데스 교수는 진짜 사후피임약에는 여성의 배란을 억제하는 레보노게스트렐(levonorgestrel) 호르몬이 활성성분으로 함유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 분자 지문 비교를 통해 진위를 판별했다.
“페루에서 구매한 제품의 분자 지문과 진품의 분자 지문을 비교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신속히 가짜를 찾아낼 수 있어요.”
도대체 가짜 의약품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가장 흔한 방법은 진품보다 저가의 원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의도치 않게 진품과 유사한 효능을 내기도하지만 대다수는 약으로서의 유효성이 발휘되지 않는다. 사후피임약을 예로 들면 레보노게스트렐 호르몬 대신 항생제를 넣게 된다.
두 번째는 약의 코팅 재질을 저렴한 것으로 교체하는 방법도 있다. 이때는 활성성분이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늦게 흡수돼 제 효과를 보기 어렵다. 마지막은 엉뚱한 성분으로 겉모양만 유사하게 만든 가짜 약이다. 이러한 약은 유해물질이 함유됐을 개연성이 높다.
페루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식으로 만든 가짜 약이 발견됐다. 실제로 25개의 표본 중 72%는 진짜 사후피임약과 성분 및 함량이 동일했지만 6개는 레보노게스트렐 호르몬이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늦게 방출됐다.
“함량이 너무 적거나 코팅물질이 제대로 역할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특히 1개는 아예 레보노게스트렐를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요로 감염 및 부비강(코곁굴) 감염 시 흔히 처방되는 항생제 성분인 설파메톡사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 약을 먹는다면 절대로 피임 효과를 얻을 수 없으며, 그 사실을 알아차릴 시점에는 이미 때를 놓쳤을 개연성이 높다. 자칫 설파메톡사졸에 알레르기가 있는 여성이라면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의약품 유통망의 빈틈
페르난데스 교수는 페루에서 발견된 가짜 사후피임약의 제조자로 국제 폭력조직을 지목한다. 과거 마약사업을 펼쳤던 조직들이 정부의 단속을 피해 업종변경을 했다는 것이다.
“마약보다는 가짜 의약품 제조가 훨씬 안전한 사업이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마약은 사형에도 처해질 수 있지만 가짜 의약품 제조는 기껏해야 징역형이니까요.”
최근 가짜 의약품 거래에 대해 책을 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로저 베이트 연구원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그에 의하면 가짜 의약품 제조업자들은 자신의 제품이 관계당국의 감시를 피해 약국에서 팔릴 수 있도록 의약품 유통망의 빈틈을 공략한다.
문제는 특정 약국을 지목해 가짜 의약품을 적발하기는 쉽지만, 유통 단계에 있는 가짜 의약품은 적발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제조·유통망은 여러 대륙과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는데다 의약품의 원료 소재 또한 세계 각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 한곳으로 모아진 뒤 약으로 탄생한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제약사와 관계당국은 제조와 유통의 전 단계에서 이상여부를 점검·검사한다. 그러나 가짜 의약품과 가짜 원료 소재는 진품과 유사한 경우가 많아 검사과정에서 적발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
지난 2008년에 미국에서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 가짜 혈액 항응고제 ‘헤파린’이 그 실례다. 중국에서 수입된 이 약을 복용하고 140여명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으며,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사결과, 가짜 원료와 불순물이 20% 가량 함유돼 있었다. 서류검사의 허점도 많다. 의약품이 두바이처럼 감시가 취약한 자유무역지대를 통과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가짜 의약품 제조업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관에 위조 서류를 들이민다는 게 베이트 연구원의 전언이다.
“이렇게 관계당국의 감시망을 유유히 통과한 가짜 의약품들은 진품과 똑같은 품질보증서를 달고 당당히 약국의 진열대에 자리 잡게 됩니다.”
상황이 이런 만큼 전문가들도 가짜 의약품들이 얼마나 많이 침투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라고 다르지 않다. 추산치조차 내놓지 못한다. 베이트 연구원이 전 세계에서 판매되고 있는 의약품의 최대 50%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다소 극단적 주장을 펼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페르난데스 교수처럼 몇몇 연구자들이 특정 시점, 특정 장소에서 유통되는 특정 종류의 가짜 의약품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다수의 국가에서 가짜 피임약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들이 경종을 울려준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사후피임약을 복용해야할 상황이라면, 그리고 약국의 사후피임약이 가짜인지 의심스럽다면 약사에게 동일 제품을 하나 더 보여 달라고 부탁해 비교해보라고 권한다. 과거에 사후피임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면 포장지를 보관해두고 새로 구입한 제품과 비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0배 사후피임약에는 일반 피임약의 10배에 달하는 고용량 호르몬이 함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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