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대표하는 광화문 앞에 가면 모퉁이에 교보생명 빌딩이 우뚝 솟아 있다. 이 빌딩은 여러 가지로 유명하다. 국내 최대 규모 서점(교보문고)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도, 타 지역에 위치한 교보생명 빌딩들이 모두 이 빌딩을 본떠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유명한 것은 ‘광화문 글판’이라고 불리는 빌딩 외벽에 내걸린 가로 20m, 세로 8m짜리 글판이다.
이 글판이 유명한 건 최신 유행을 반영한 화려한 디자인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글판은 참으로 소박하다. 글판엔 단지 짧은 글 몇 줄이 쓰여 있을 뿐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 글을 보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우리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항상 아름답거나 교훈적인 내용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1998년 경제위기 직후에는 사회상을 반영한, 아픔을 달래는 글이나 희망을 노래한 글들이 올랐다. 고은 시인의 시 ‘길’에서 따온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같은 문구가 그랬다.
1991년 처음 등장한 광화문 글판은 1년에 4번 옷을 갈아입는다. 3개월마다 새 글로 바뀐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교보생명 광화문 본사 사옥에만 게시되었지만, 현재는 전국에 위치한 7개 교보생명 사옥에 똑같은 내용이 동일하게 걸리고 있다.
광화문 글판은 고(故)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 창업자는 ‘기업 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이 글판은 교보생명의 기업 홍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서울시민들 대부분은 이 글판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내용이 바뀔 때마다 이를 알리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될 정도다. 이러니 교보생명을 알리는 효과가 없을 수 없다. 교보생명 관계사들의 긍정적인 이미지 형성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광화문 글판이 이처럼 널리 알려지게 된 건 교보생명이 글판 행사를 20년 이상 꾸준히 진행했기 때문이다. 한두 해 하다 그만두었다면 광화문 글판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곧 잊혀졌을 것이다. 이처럼 소비자들에게 특별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선 단기간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 동일한 이미지를 꾸준히 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기업들은 일관된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바뀌거나 주변의 상황이 바뀌면 기업의 메시지도 바로 바뀐다. 1년에 몇 번이나 바뀌는 기업들도 있다. 그 같은 상황에선 기업이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친절하게 기억하는 소비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드물지만 교보생명 외에도 오랜 시간 일관성을 유지하는 기업들이 있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1897년 탄생한 우리나라 최고(最古)브랜드 동화약품의 ‘부채표 활명수’가 유명하다. 동화약품이라는 회사 이름을 잘 모르는 소비자라도 ‘부채표 활명수’라는 브랜드명은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다.
활명수는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 씨에 의해 궁중 비방으로 탄생했다. 활명수의 포장 디자인과 광고는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했지만, 변함없는 분위기와 이미지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효과 좋은 소화제’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부채표 활명수가 유명해진 건 광고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다. 조금씩이나마 수십 년 동안 일관된 메시지를 전해왔기 때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활명수의 이름이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유한양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26년 창립 이후 수십 년 동안 유한양행은 설립자 고(故) 유일한 박사의 유지를 받들어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기업’이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해 왔다.
유 박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선 우선 국민부터 건강해야 한다’라는 신념하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며 기업의 제1 목표는 이윤 추구인데, 이윤은 성실한 기업 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한다’는 고인의 경영철학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고인은 1971년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익재단에 유증하기도 했다.
동일한 내용의 메시지를 알리려는 노력이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결과, 유한양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그리고 가장 사회공헌을 많이 한 기업으로 유명해졌다. 자회사인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캠페인 역시 사람들의 뇌리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재밌는 예도 있다. 수많은 침대 회사 중 하나였던 에이스침대는 창립 초기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카피를 만들었다. 이 광고를 처음 본 대다수 사람들은 그 발칙함에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에이스침대는 수십 년 동안 이 카피를 사용해 왔고, 이제 이 카피는 에이스침대 하면 생각나는 조건반사적인 문구가 되었다.
에이스침대는 ‘침대는 과학’이라는 광고 카피를 만들어 다른 회사들과 차별화 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가구를 살 때도 침대만은 따로 더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을 정도다. 초등학생 중에는 침대가 가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수십 년 동안 똑같은 이미지와 카피를 사용해 경쟁 업체와 구별되는 엄청난 광고 효과를 올린 게 틀림없다.
다시 광화문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교보생명 빌딩 바로 뒤편의 대림산업 사옥을 살펴보자. 이 건물은 건설회사 사옥 치고는 상당히 수수하다. 건물의 외양처럼 대림산업의 슬로건 역시 담백하다. ‘남들은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원칙을 지키고 약속을 맨 앞에 두는 것이 보수라면 대림은 보수적입니다. 남들은 고지식하다고 합니다. 편법을 모르고 정도만을 걷는 것이 고지식이라면 대림은 고지식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보수적이거나 고지식하다는 말이 부정적인 뜻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말에는 부정적인 뜻만 있는 건 아니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는 얄팍한 사람들이 오히려 요령 있고 융통성 있게 사는 사람들로 치부되는 요즘, 보수적이고 고지식하다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부각될 수 있다.
기업은 직시해야 한다. 기업이 생존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려면 얕은꾀나 꼼수가 아니라 원칙과 약속을 고지식하게 지키는 ‘정도’로 가야 함을. 그런 길은 오래 걸리기 때문에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진리는 서로 맞닿아 있다고 했던가? 이는 앞서 말한 마케팅의 ‘꾸준히 실천하는 지혜’와도 닮아 있다. 설령 내 임기 내에는 별로 효과가 없더라도, 수십 년 후의 회사 발전을 위해 과감히 정도의 방향으로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