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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켄의‘ 자수성가한 상속녀’

A Self-Made Heiress

샬린 데 카르발류가 47세에 하이네켄의 승계권을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그녀는 경영 수업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포춘과 인터뷰를 갖고 처음으로 자신의 경이로운 인생 여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by PATRICIA SELLERS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묻으면서 샬린 데 카르발류에겐 하나의 삶이 끝나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됐다.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 런던에 살았던 그녀가 아버지 프레디 하이네켄 Freddy Heineken과 작별을 고한 건 2002년 1월 네덜란드 노르디비크 Noordwijk의 어느 흐린 날이었다. 샬린은 아버지만큼이나 떠들썩한 것을 싫어했다. 아버지는 현대식 네덜란드 양조장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맥주 회사로 발전시킨 선구적 사업가였다. 때문에 이날 의식도 상대적으로 평범한 묘지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장례식도 따로 진행되지 않았다. 참여한 사람은 프레디의 비서, 직계가족인 아내 루실 Lucille과 사위 미첼 Michel, 당시 47세였던 딸 샬린뿐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까지 샬린이 상속 받았던 재산은 25.60유로(32 달러)짜리 하이네켄 주식 한 주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외동딸로서, 그리고 하이네켄의 유일한 상속녀로서 무려 1억 주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회사 전체 주식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25%의 주식이라면 충분히 의결권을 가질만한 지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사회의 모든 안건에 대해 그녀가 던진 표 하나가 다른 투자자들의 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샬린은 묘지에서 우울한 아침을 보내기 전만 해도 새로운 책임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남편은 아버지의 무덤을 떠나는 그녀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샬린, 열흘 내에 아버님의 일을 물려받을지 결정해야 해.”

이는 정식으로 경영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는 샬린에게 가업을 이끌라는 제안이었다. 아버지 프레디가 1989년 CEO에서 물러난 뒤에도 연 매출 93억 달러를 달성하는 데 지속적으로 기여한 바로 그 회사를 운영하란 말이었다. 그러나 샬린은 일주일도 안 돼 남편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런던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널리 퍼져 있는 하이네켄의 여러 사업을 연구하면서 유능한 오너이자 ‘왕조의 수호자’가 되는 법을 배워나갔다.

사람들은 어쩌면 샬린 데 카르발류 하이네켄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녀에겐 그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60세에 무려 11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하며 세계에게 가장 부유한 여성이 되었다. 이번 기사 때문에 포춘과 암스테르담에서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미디어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특히 31년 전 아버지가 납치를 당한 이후,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하이네켄의 직원들조차 오랫동안 그녀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삶에 만족했다.

샬린은 망설임 끝에 포춘의 요청에 응했다. 올해 70세가 된 외향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남편의 구슬림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는 투자 은행가로 시티그룹 투자 은행의 부회장이자 시티 프라이빗 은행의 유럽·중동 및 아프리카 지사 회장을 맡고 있다. 프레디가 사망하기 전까지, 미첼 데 카르발류가 아내에게 바란 건 다섯 아이를 키우는 것과 은행가의 좋은 아내가 돼 주는 것 이외엔 없었다. 그는 이제 샬린을 “보스”라고 부른다. 그녀는 아버지를 묻은 날 미첼이 했던 제안이 “나를 깨웠다”고 말했다.

사실 프레디가 딸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건 하이네켄을 깨우는 일이기도 했다. 샬린과 하이네켄 이사인 미첼은 이사회에 요청해 당시 CEO를 좀더 진취적인 인물로 교체했다. 그때 CEO에 오른 장 프랑수아 반 박스미어 Jean-Fran?ois van Boxmeer는 여전히 하이네켄의 수장을 맡고 있다. 말년에 하이네켄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프레디의 리스크 회피 성향을 뒤집고, 반 박스미어는 28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 49차례의 인수를 성공시켰다. 그 덕분에 하이네켄의 사업 범위는 2002년 39개국에서 현재 71개국으로 크게 확장됐다. 하이네켄은 안호이저-부시 인베브 Anheuser-Busch InBev와 사브밀러 SABMiller에 이어 여전히 세계 3위의 맥주 회사지만, 매출은 거의 세 배나 증가했다.

2013년 249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하이네켄은 현재 암스텔 Amstel과 도스 에키스 Dos Equis, 그리고 솔 Sol 같은 부러워할 만한 프리미엄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다. 회사 이름을 딴 녹색 병 라거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맥주다.

하이네켄 브랜드가 점점 성장하면서 회사 주가도 꾸준히 상승했다. 덕분에 빠르게 통합되는 맥주 시장에서 시가 총액 약 430억 달러를 기록하며 회사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었다. 미첼은 “최상의 방어는 언제나 높은 주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이네켄의 프리미엄 브랜드 포트폴리오와 베트남-나이지리아와 멕시코 다음으로 많은 수익을 가져다 준다-같은 신흥시장에서의 강점 때문에 원치 않은 인수 러브콜을 받은 적이 있었다. 런던에 본사를 둔 사브밀러는 지난해 9월 하이네켄에 요청하지 않고 인수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자 하이네켄은 최대 주주와 협의한 끝에 사브밀러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최대 주주란 샬린을 말한다. 그녀가 막강한 힘을 갖게 된 사연은 매우 이례적이지만, 어떤 면에선 보편적이기도 하다. 장기적으로 어떻게 회사를 발전시키고 지킬 수 있는지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하이네켄과 이 회사를 지배하는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녀보다 앞서 누가 회사를 이끌었는지를 알면 도움이 될 듯하다. 1864년 샬린의 증조 할아버지 제라드 아드리안 하이네켄 Gerard Adriaan Heineken은 암스테르담의 작은 양조장인 데 호이버그 De Hooiberg를 매입, 특별한 이스트를 넣은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라드의 외동 아들 헨리 Henry는 23년 동안 하이네켄의 회장직을 맡았지만, 1942년 납세와 사업 확장을 위해 주식을 팔다가 경영권을 잃고 말았다. 프레디라고 알려진 그의 아들 알프레드 Alfred는 18세에 보리를 나르는 일로 회사에 처음 합류했다. 1954년 프레디는 돈을 빌려 하이네켄 주식을 충분히 매입해 지배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하이네켄 홀딩 NV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운영업체인 하이네켄 NV 주식을 50.005%가량 소유한 지주회사다.

이 회사의 CEO 반 박스미어는 하이네켄이 한 번도 승계 갈등을 겪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이네켄 가문은 대부분 외동딸이나 외아들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이네켄이 “상속자로 붐비지 않았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네덜란드의 노르디비크 Noordwijk라는 해안 마을에서 자란 샬린 하이네켄은 매우 전형적인 외동딸이었다. 자신의 말대로 그녀는 “극도로 수줍음”을 많이 탔고, 애지중지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듯 응석받이로 자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매일 학교에 데려다 주셨다. 하지만 기사는 없었다”며 “내 이름이 카페마다 붙어 있는 게 정말 싫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화려한 사업가였다. 그는 하이네켄의 녹색 병을 처음 고안하고 TV 광고도 시작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집에선 간소한 삶을 선호했다. 샬린과 부모는 대개 거실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TV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샬린은 아버지에 대해 “스파게티와 미트볼이 그가 원하는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하이네켄 가문은 스위스 세인트 모리츠 St. Moritz에 있는 스키 별장을 비롯해 여러 개의 별장을 소유했고, 선박 재벌 오나시스 Onassis 가문과 자동차 재벌 아?疸? Agnelli 가문, 그리고 모나코 왕자 레이니에 Rainier와 왕비 그레이스 Grace와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고, 샬린도 이 같은 삶의 방식을 선호했다. 그녀는 “사교란 정말 끔찍한 단어”라고 말했다.

만약 프레디에게 외동딸이 아니라 찰스 Charles라는 외동 아들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 가업에 참여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샬린은 하이네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는 내가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샬린이 17세 때 집을 떠나 대학에 진학하려 하자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너는 너무 어리다. 혼자서 기숙사에 사는 건 안 된다”고 말했다. “파리에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너무 ‘방탕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히피 친구들은 인도로 배낭여행을 가기도 했다. 내 사전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그녀는 헤이그 Hague에서 비서 과정을 끝낸 후, 라이덴 Leiden 대학에서 법을 전공했다. 그녀는 이 전공이 정말 싫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20세 때 네덜란드를 떠났다. 제네바에서 프랑스 어를, 뉴욕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그녀는 런던의 광고 에이전시에서 일한 후, 파리에 있는 하이네켄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파리 지사장에게 일을 배우며 가업을 조금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그녀는 네덜란드와 세인트 모리츠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세인트 모리츠의 고도가 너무 높아 숨쉬기 힘들어 했다. 하루에 네 갑이나 피우는 그의 흡연 습관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꿈은 내가 착한 네덜란드 남자를 만나 바로 근처에 사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샬린은 세인트 모리츠 스키 슬로프에서 미첼 데 카르발류를 만났다. 그는 어떤 삶을 원하는지 잘 모른 채 과잉보호를 받았던 상속녀에게 천생연분이었다. 잉글랜드에서 브라질 출신의 외교관 아버지와 영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역 배우로도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스카 수상작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에 피터 오툴 Peter O’Tooler과 함께 출연해 파라즈 Farraj라는 중요한 목동 역할을 맡기도 했다(그는 미첼 레이 Michel Ray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휴학하고, 1968년 영국 스키 국가대표로 프랑스 그르노블 Grenoble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메달을 따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경쟁을 좋아했던 그는 그 후 영국 루지 Luge *역주: 썰매에 누운 채 얼음 트랙을 활주하는 겨울 스포츠 경기 팀에 합류해 1972년과 1976년 올림픽에 재도전했다.

하지만 그에겐 샬린을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스포츠였다. 미첼은 “둘 사이에는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유대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스테르담에서 그를 저녁식사 테이블에 세 시간이나 앉혀 놓고, 그의 연애 전력과 은행 계좌, 그리고 심지어 시력까지 집요하게 캐물었다고 한다. 샬린의 아버지가 한 말 중 그나마 가장 친절했던 말은 “그가 돈 때문에 샬린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라고 한 것이었다. 미첼과 샬린은 1983년 가을 런던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그들이 세인트 크루아 St. Croix와 버진 고다 Virgin Gorda 섬에서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샬린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프레디 하이네켄은 암스테르담 중심부에 있는 하이네켄 본사 사무실을 나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납치범들에게 붙잡혀 운전사와 함께 소형 승합차 뒷좌석에 내동댕이쳐지는 처지가 되었다. 그후 21일 동안 샬린과 그의 어머니는 경찰과 인질 협상가 들과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남서부로 50km 떨어진 노르디비크 해변가의 자택에 함께 숨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은 일련번호가 없는 추적 불가능한 지폐로 2,0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번호가 찍힌 돈을 주었다. 2,000만 달러를 전달했지만, 그들은 아버지를 돌려 보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서를 끊임없이 추적한 경찰들은 어느 날 밤 암스테르담 북부에 있는 한 창고를 습격했다. 그들은 콘크리트 가벽 뒤에서 묶여있는 프레디와 운전 기사를 발견했다. 그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지만, 건강은 대체로 양호한 상태였다. 후에 프레디는 “그들이 내게 칼스버스 Carlsberg 맥주를 마시게 했다”며 “그건 고문이었다”고 농담을 했다.

고통스러운 사건이 벌어진 후 샬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암스테르담을 떠나 남편과 런던에 정착했다. 그는 당시 크레디트 스위스 Credit Suisse에서 일했다. 미첼이 전 세계를 다니며 고객들과 만나고 있을 때, 샬린은 집에 머무르며 잇달아 아이를 낳았다. 1984년 첫째 알렉산더 Alexander가 태어난 이후 샬린은 4년도 안 돼 쌍둥이 자매를 포함해 세 아이를 더 낳았다. 37세의 나이에 7세 이하 자녀들을 다섯이나 두게 되었다. 그녀는 행복했지만 동시에 스트레스도 받았다. 그녀는 “방에 앉아 거의 강박적으로 레고를 색깔별로 분류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내 삶의 단 한 부분이라도 정돈되길 바랐다.” 보통 네덜란드에선 여성들이 결혼한 후에도 원래 성을 함께 쓰지만, 샬린은 런던에 거주하며 ‘하이네켄’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그녀는 “두 개의 성을 쓰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항상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데 카르발류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친구들이 내 출신을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샬린은 미첼에 대해 “그의 집에서 그의 월급과 보너스로 생활했다”고 말했다. “나는 은행가 아내로서의 삶을 살았다.” 샬린은 가업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거의 없었다. 1988년 그녀의 아버지가 샬린을 하이네켄 지주사 이사회에 합류시켰을 때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프레디는 말을 잘 듣는 사람들만 이사로 선출하는 독재자 스타일의 보스였기 때문이었다. 샬린은 “아버지는 권위적인 사람이었다”며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경영방식은 도전을 좋아했던 젊은 시절과 다르게 프레디가 나이가 들수록 점차 신중해지고 인색해지면서 더 큰 문제가 됐다. 샬린은 “납치 사건으로 아버지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 생각엔 그가 갈수록 ‘골목대장(king of the mountain)’ 같은 느낌을 조금 덜 가졌던 것 같다.”

한편 맥주 업계에선 당시 대규모 계약이 잇따라 성사되고 있었다. 사브는 자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공세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고, 벨기에 기반의 인터브루 Interbrew-현재는 AB 인베브의 자회사다-는 라바트 Labatt를 20억 달러에 인수했다. 모두 프레디 하이네켄이 캐나다 브랜드 라바트 인수를 주저한 후 일어난 일이었다. 샬린은 “라바트는 이 업계의 터닝포인트였다”라며 “돌이켜보면 그 회사를 인수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프레디가 2002년 1월 3일 사망했을 때, 하이네켄의 수익 성장률은 둔화됐고 주가도 떨어지고 있었다. 미첼은 우려했다. 그가 묘지에서 샬린에게 경영을 맡으라고 제안했을 때, 단지 그녀만 전면에 나서라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 자신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시티그룹으로 이직한 상태였기 때문에, CEO였던 샌디 웨일 Sandy Weill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일주일 중 하루 이틀쯤은 네덜란드에서 아내를 도와 하이네켄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퇴직을 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샌디는 답장을 보내 ‘블랙베리나 휴대폰을 이용할 수 있는데, 암스테르담에 있으나 런던에 있으나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자유를 택한 그와 샬린은 함께 전 세계 하이네켄 양조장과 사무실을 돌며 고충을 들어주고, 인재를 찾기 시작했다.

미첼은 “우리가 회사를 팔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부부는 전 세계를 돌며 관리자들과 투자자들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며 긴 밤을 보냈다. 샬린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들은 일상적인 기업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네 가지 분야를 개편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회사 이미지, 대차대조표, 기업 인수, 그리고 이사 및 핵심 임원 선출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첼은 하이네켄 회장에게 서신을 보내 “샬린에게서 친절하고 유순한 면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샬린은 반 정도는 아버지를 닮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닮은 성격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당신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이네켄이 글로벌 시장에서 기회를 잃고 있었을 때, 샬린과 미첼은 이사회에 CEO 소니 루이스 Thony Ruys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그다음 그들은 내부 후보자를 평가한 후 반 박스미어를 최종 낙점했다. 그는 공격적인 경영인이었다. 1984년 하이네켄에 합류한 후 몇몇 신흥시장에서 근무했으며, 콩고에선 하이네켄 사업을 이끌기도 했다.

53세의 반 박스미어는 프레디가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칼스버그 Carlsberg와 파트너십을 맺고 155억 달러에 에든버러 Edinburgh에 있는 스코티시 앤드 뉴캐슬 Scottish & Newcastle을 인수했다. 이 계약으로 유럽 맥주 시장에서 하이네켄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졌고, 빠르게 성장하는 사과주 시장에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후 2010년 하이네켄은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큰 맥주 회사 펨사 세르베사 Femsa Cerveza를 사들였다. 76억 달러 규모의 이 계약이 성사되자 직원 수도 2만 명 더 늘어났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8만 1,000명의 직원이 하이네켄에서 일하고 있다.

반 박스미어는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대주주가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실제 데 카르발류 가문의 뜻대로 회사가 운영되면, 하이네켄은 훨씬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미첼은 “언제나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를 정말 자극하는 건 누군가 계속 의심을 품으며 ‘우리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다.”샬린 데 카르발류 하이네켄에게 가장 큰 고민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몇 초 고민한 끝에 “때때로 성공이 자만을 낳는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녀와 미첼은 지난해 9월 사브밀러가 하이네켄의 인수를 시도했을 때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브의 최고 경영진이 비공식적으로 수차례 합병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미첼은 “우리는 관심이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최근 있었던 사브의 접근에 대해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미첼의 표현에 따르면 “스위치 통제권을 쥔 여성”이 하이네켄 의결권의 50% 이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수 시도에 대해선 최고가 되려는 합당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첼은 “우울한 상황에서도 한줄기 빛은 있다”며, 인수 시도는 하이네켄 CEO가 8만 1,000여 명의 직원들에게 “우리 모두가 더 열심히 일해 주가를 높여야 한다”고 독려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또 이는 장 프랑수아가 더 손쉽게 강력한 CEO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미첼은 승계를 걱정하고 있다. 2017년이 반 박스미어의 세 번째 4년 계약의 마지막 해이기 때문이다. 그와 샬린은 반 박스미어가 재계약을 하길 바라고 있다. 미첼은 “장 프랑수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CEO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분명한 후임이 없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다. 차기 CEO는 내부 인사가 될 것인가? 샬린은 “그게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미첼은 “만약 임원 서너 명이 스스로를 후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매우 실망스러울 것”이라며 “하지만 미국과 달리 네덜란드나 런던에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위치에 올려 놓았다간 화를 자초하기 십상”이라고 덧붙였다.

왕조를 유지할 방법을 배우는 건 데 카르발류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샬린과 미첼은 최근 영국인 상속재산 상담가 마틴 젠킨스 Martin Jenkins를 고용했다. 미첼이 지난해 6월 다섯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썼듯이 “야망, 욕구, 의문, 그리고 심지어 유산을 물려받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에 대해 가족 상담을 받기 위해서였다. 젠킨스는 가족 전체는 물론, 자녀들을 각각 따로 만나 상담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현재 23~29세로 샬린과 미첼은 이들을 “G-5”라고 부르고 있다. 지난해 9월 샬린이 사브 밀러의 인수 제안을 거절한 날, 그녀와 미첼은 시카고에서 바이런 트로트 Byron Trott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했다. 골드만삭스 임원 출신인 그는 BDT & Co.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소수 주주 기업을 소유한 억만장자들에게 자문을 제공하고 투자도 하는 업체다. 이 회의에서 데 카르발류는 자신들처럼 부로 인한 부담을 가진 사람들-월튼 Walton과 스머커 Smucker, 코흐 Koch 등-과 이야기를 나눴다. 미첼은 “우리는 정말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말했다. 샬린은 “하지만 가족 관계는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덧붙였다.

경영권 승계에 대해 이들이 얻은 최고의 조언은 무엇일까? 미첼은 “신중하게 고려해 ‘한 명’을 낙점하라”였다며 “그것이 우리가 얻은 메시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들은 두 명 이상의 자녀에게 가업을 승계하는 쪽으로 선택할지 모른다(박스 기사 참고). 아직까지 데 카르발류 부부는 자신들이 죽거나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다섯 아이 중 누가 하이네켄을 이끌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첫째 아들 알렉산더가 그중 한 명이 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는 런던의 사모 펀드이자 기업 인수·합병 전문업체인 라이온 캐피털 Lion Capital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난 2013년에는 하이네켄 지주회사 이사회에도 합류했다.

올해 29세인 알렉산더는 여덟 살 때부터 기업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주가를 확인하고, 이사회 안건을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메모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17세가 되던 해 그를 총애하던 할아버지 프레디를 여의었다. 그는 심하게 긁힌 데다 디자인도 낡고 단순한 할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매일 차고 있다. 회사에 갈 때도 하이네켄 상표가 붙은 택시를 타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쓴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거나 밤에 자기 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하이네켄”이라고 말했다.

알렉산더의 부모는 아들이 가업을 지키고 이끌길 원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인터넷 회사에 다니는 23세의 둘째 아들 찰스 Charles와 영화사에서 근무하다가 현재는 런던의 주류 회사에 다니고 있는 첫째 딸 루이자 Louisa 역시 배제하지 않고 있다. 쌍둥이인 이사벨 Isabel과 소피 Sophie는 각각 미술과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 그들은 하이네켄의 자선 사업과 사회적 책임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샬린은 자녀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만약 너희들이 뭔가에 열정이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의무보다 열정에 따라 일하게 되면, 훨씬 더 그 일을 잘할 수 있다.” 그녀의 조언은 달고도 씁쓸한 것이었다. 기업 경영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뒤늦게 발견한 데서 온 깨달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경영을 공부하지 않은 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며 “하지만 경영 공부를 안 한 것이 나에게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일에 대한 존경심을 부여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존경심은 돈으로 살 수 없다. 110억 달러를 줘도 말이다. 정말 얻기 어려운 가치인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가업을 물려 주는 방법

가업을 이끄는 사람에겐 다음 세대로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이 가장 도전적인 리더십일 수 있다. 샬린 하이네켄의 남편이자 은행가인 미첼 데 카르발류는 “이것이 잘못되면 이제까지 힘들게 일궈놓은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주식 시장에서 하이네켄의 가치는 440억 달러에 이른다. 샬린은 아버지가 했던 것보다 더 현명하게 자신이 가진 25%의 주식과 의결권을 물려주길 바라고 있다. 때문에 그녀와 미첼은 가업 승계의 모범 사례를 지금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왕조의 규모가 어떻든, 기본적으로 적용되는 규칙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한 명을 택해라
다른 억만장자 가업 경영인들은 데 카르발류에게 재산을 어떻게 분할하든, 다섯 아이 중 회사를 이끌 한 명의 후계자를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미첼은 “샬린과 나는 아직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3명 정도도 괜찮지 않을까?” 그는 후계자에게 경영은 외로운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만약 샬린이 사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부담감을 가졌을 것이다.”

아이들을 시험해라
전 골드만삭스 임원인 바이런 트로트 Byron Trott-그의 종합금융회사 BDT & Co.는 소규모 주주들이 지배하는 회사에 투자하라고 조언한다-는 “아이들을 올가미에 가두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만의 열정을 찾도록 해줘라.” 트로트는 데 카르발류 부부가 철학이든 예술이든 경영이든, 다섯 자녀들이 스스로 흥미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사모펀드 회사에 다니는 첫째 아들 알렉산더가 하이네켄의 경영권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트로트는 “나는 이사회 일원으로서 금융계에 종사하기 때문에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조언자를 곁에 둬라
프레디 하이네켄은 이사회를 예스맨으로만 채웠다. 때문에 2002년 샬린이 경영권을 물려받기 전까지 회사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부부가 장남 알렉산더든 다른 아이든 회사를 이끌어갈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이렇다. “예스맨이나 아첨꾼이 아닌 최고의 인재들로 주위를 채워라.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멀리 봐라
트로트는 “가족이 기업을 운영하면 ‘월가의 일시적인 변덕’ 같은 것으로부터 경영권을 지킬 수 있다. 결국 장기 성장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데 카르발류 가문에 대해 “이러한 기업들은 장기적으로 시장을 능가할 수 있다”며 “지금 매우 잘하고 있으니 계속 그 길을 가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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