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인들에게 이는 매우 혁명적 개념이었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르네상스 시대가 열릴 때까지 유럽은 확고한 신분 사회였기에 모든 사람은 귀족, 장인, 농노 가운데 하나의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한번 정해진 신분은 대대로 세습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기회가 열렸고 인쇄공, 항해사 등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그런데 이들은 기존 직업과 달리 길드(guild), 다시 말해 동업자 조합이 없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누구든 스스로 기술을 습득할 경우 오랜 도제교육을 받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었다는 얘기다. 설명서는 이를 가능케 해줄 최고의 도구였다.
물론 기계실습 이전에도 설명서는 존재했다. 일례로 집을 짓기에 좋은 장소와 집 짓는 방법, 계절에 따른 방의 방향 같은 지침을 담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10서’만 해도 진정한 의미의 설명서 중 하나로 꼽힌다. 덧붙여 인쇄술 발명 이전의 중세 저술가들도 필사본 설명서를 제작했다. 성(性) 지침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이 그 실례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여러 분야의 개요서를 활용, 지식들을 짜깁기한 것에 불과했다.
반면 기계실습 류의 책들은 복잡한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체계적 처방이 포함돼 있었다. 도르래를 이용해 새끼손가락으로 말을 들어 올리는 방법, 성벽 쌓는 법, 토지 측량법 등 기발한 기술과 지식이 넘쳐났다. 게다가 책을 읽는다는 새롭고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그 지식을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대중의 호응이 이어지면서 모든 분야, 모든 제품에 설명서가 난무했다. 또한 갈수록 복잡해지고 두꺼워져 가독성이 떨어졌다. 그리다보니 어느 순간 설명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이 돼 버렸다.
이 상황을 반전시킨 변화는 1980년대에 나타났다. 설명서의 두께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아예 설명서가 없는 기기도 생겨났다. 최신 아이폰의 매뉴얼만 해도 크리스마스카드만큼 간략하다. 그나마 사용자들은 잘 읽지도 않는다. 매뉴얼은 언제든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을 수 있고, 인터넷에는 설명서보다 유용한 정보들이 넘쳐나는 탓이다.
그런데 현대인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의 대다수는 고장이 났을 때 직접 문제를 찾아내거나 고치기가 어렵다. 혹여 우리는 실체가 부정확한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 도구에 대한 자주적 통제능력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설명서를 없앤 사람
오늘날과 같은 축소지향적 매뉴얼의 시대를 연 사람으로 존 캐롤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7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언어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BM의 왓슨연구소에 입사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작업효율성을 높이는 것. 캐롤 박사는 일반인들이 컴퓨터를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서 해법을 찾았다. 이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당시 IBM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컴퓨터 연구시설을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일상적 사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는 연구실에 비서를 채용해 컴퓨터와 사용설명서를 지급한 뒤 일상적 사무를 처리토록 지시했다.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피실험자인 비서들이 매뉴얼을 읽을수록 오히려 혼란에 빠지는 사례가 많았던 것이다.
“비서 희망자들이 매뉴얼을 읽은 뒤 저를 올려보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일은 제가 못하겠어요.’라고요. 그리고는 일어서서 코트를 입고 사라졌죠.”
그렇게 10년이 지나 독일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캐롤 박사는 축소지향주의적 작품의 원고를 탈고했다. 아직 제목을 붙이지 못한 채 휴가를 즐기던 중 그는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한 성의 지하실에서 우연히 독일의 전설을 묘사한 그림엽서 하나를 보게 됐다. 머리에 깔때기를 꽂은 학생이 도서관에 있었고, 교수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책장에서 책을 골라 깔때기에 넣어 주고 있는 그림이었다.
캐롤 박사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과학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인 체계론적 접근법을 떠올렸다. 세상을 분류 순서와 행동 규약으로 구분하는 이 이론은 컴퓨터공학에서 난해하고 까다로운 컴퓨터 언어를 학습하고, 정확한 명령을 내리는데 꼭 필요하다.
훗날 ‘뉘른베르크의 깔때기’로 명명된 캐롤 박사의 책은 새로운 철학의 기반을 제시했다. 시스템 설계자의 요구와 가치가 아닌 비서 같은 최종 사용자에게로 논의의 초점을 옮긴 것이다.
그의 축소지향주의적 접근법은 애플을 세운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이끌었다. 짧고 간결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사용자의 능동적 학습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기기를 제어하는 감각과 자율성을 익혀 추가학습 욕구를 창출한다는 캐롤 박사의 판단을 인정한 결과였다.
“회의론자들은 이것이 사용자에게 충분한 이론적 기반을 제시해주지 못한다고 비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뉴얼의 분량을 줄여야 초기 학습속도는 물론, 더 복잡한 내용을 배워야 하는 추가학습의 속도도 빨라집니다.”
거울로서의 설명서
매뉴얼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트기, 핵발전소 등 극히 복잡한 기기들의 경우 방대한 분량의 매뉴얼을 자랑하는 전자적 자원관리(ERP) 시스템에 의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비재에 있어 매뉴얼은 ‘물체’라는 형태에서 벗어나 기기로 인해 짜증이 난 유저의 도움 요청에 부응하는 ‘서비스’나 ‘반응’, ‘행동’의 형태에 가까워지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과거 매뉴얼에서 찾았던 도움말들은 현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앱을 통해 거의 습득할 수 있다. 또한 매뉴얼은 ‘네이버 지식인’ 같은 사용자 참여형 Q&A나 유튜브의 리뷰 동영상이 대신할 수도, ‘시리’와 ‘코타나’ 등 낮은 수준의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앞으로 매뉴얼은 예언적 형태를 띨지도 모른다. 사용자의 키 입력 또는 음성을 분석, 미래에 예상되는 문제를 회피하도록 조언해줄 수 있는 것. 이미 제록스는 메디케어(노인 의료보험)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험) 대상자의 요구에 효율적으로 부응하기 위한 예측분석을 시작했다. IBM도 동시에 수백만 건의 고객관계관리(CRM) 데이터를 분석해 효과적인 해법과 미래의 문제를 예견하는 차세대 인지 컴퓨팅 기술을 개발했다.
이외에 머지않아 구글 글래스 등의 증강현실 기기들이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형 매뉴얼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는 게 캐롤 박사의 생각이다. 이처럼 매뉴얼의 형태 변화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간과 기술의 소통을 다루는 ‘기술 소통(technical communication)’ 관련 학회에 발표되는 연구논문들을 보면 이제 사람들은 매뉴얼이 있어도 굳이 읽거나 활용하지 않는 경향이 클 정도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도구에 관한 제어권을 갈수록 많이 포기하는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컴퓨터공학자이자 가상현실 분야의 선구자인 재론 래니어 박사는 저서 ‘누가 미래를 소유할까(Who Owns the Future?)’에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을 비유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 작품에서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게 만든다. 소비자들도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편리함에 매혹돼 배의 제 어권을 잃어버린 선원 꼴이 날 수 있다는 경고다.
미국 켄터키주 소재 소비자 서비스 컨설팅 업체 MCP의 공동설립자인 킴벌리 나시에프 역시 애플의 매뉴얼이 자신을 바보 유저로 만든 반면 안드로이드 태블릿 PC를 처음 사용했을 때는 운영체제(OS)의 복잡성 때문에 훨씬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안드로이드 OS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아이폰은 그럴 필요가 없었죠. 애플이 저 대신 생각해주니까요. 이는 장기적으로 위험할 수 있어요. 기계가 모든 것을 대신 처리해주면서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되면 기술에 뒤쳐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기술적 뒤처짐에 의한 위험은 이미 오늘날 현실화되고 있다. 간단한 매뉴얼을 독파한 많은 아이폰 유저들은 스스로 아이폰을 마스터했다고 자위하면서 더 이상 배우려하지 않는다. 이런 유저들이 늘면서 애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편안한 사용을 위해 자신보다 많은 것을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은 제어권을 넘겨주고 있다.
설명서가 멸종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편의성과 제어권의 가치를 다시 한번 저울질해볼 필요가 있다. 설명서가 완전히 멸종되면 극소수의 전문가에게 제어권이 몰리는 또 다른 형태의 계급사회가 찾아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건축 10서 Ten Books on Architecture.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Aristotle’s Master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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