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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브랜드 탄생 20년 구본무 회장 취임 20년

‘뚝심과 끈기’의 리더십으로<br>‘글로벌 일등 LG’기반 다지다

올해는 LG라는 브랜드가 탄생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1995년 1월 럭키금성그룹은 오랫동안 사용해온 이름을 버리고 LG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굴지의 대기업 집단이 사명(社名)을 바꾸는 것은 큰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그해 2월 구본무 회장이 LG그룹의 3대 회장에 취임했다. LG호(號)를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어갈 새로운 선장의 등장이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LG는 그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구본무 회장 취임과 함께 시작된 LG의 20년을 되짚어본다. 지난 20년간 LG가 걸어온 궤적은 앞으로 LG가 나아갈 로드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로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지난 1990년 한국 프로야구에 새로운 구단이 출범했다.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LG트윈스가 주인공이었다. LG트윈스는 창단 첫해부터 끈끈한 근성의 야구를 선보이며 한국 프로야구 판도를 뒤흔들었다. 결국 LG트윈스는 그해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하는 기염을 토했다. 창단 첫해 신생 구단이 써 내려간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구본무 LG트윈스 구단주는 선수단에게 “우리의 목표는 승리에 연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야구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1994년 LG트윈스는 창단 후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신바람 야구’의 대명사이자 명문 야구단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아울러 LG트윈스의 호쾌하고 강렬한 신바람 야구는 LG라는 브랜드를 프로야구 팬들은 물론 전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LG트윈스가 ‘국민 스포츠’인 프로야구를 쥐락펴락하던 1994년, 럭키금성그룹은 조용하게 CI(Corporate Identity) 변경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럭키금성’이라는 친숙한 브랜드를 버리고 ‘LG’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그룹의 간판에 새기는 굵직한 변화가 물밑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구본무 부회장이었다.

하지만 CI 변경 시도에 대한 그룹 내부의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럭키금성이라는 브랜드가 이미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터에 ‘왜 굳이 브랜드를 바꿔야 하는가’라는 회의적인 의견이 대두했던 것이다. 물론 타당한 반론이었다. 작은 가게조차도 상호를 바꿔 달면 단골들이 술렁이는 법이다. 하물며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이 사명(社名)을 변경한다는 것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본무 부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럭키금성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려면 반드시 CI를 변경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뚝심 있게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당시 구자경 회장은 장남이자 그룹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차세대 경영자인 구본무 부회장의 행보를 담담하
게 지켜볼 뿐이었다.

글로벌 기업 도약 위해 CI 변경 승부수

구본무 부회장이 그룹 CI 변경을 추진하던 1994년 무렵은 한국 기업들이 세계시장으로 점차 활동무대를 확장해나가던 때였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비단 그런 정치적 구호가 아니더라도 한국 기업들은 세계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이미 협소해진 내수시장을 벗어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에서 비즈니스를 펼칠 때 가장 먼저 고객에게 다가가는 것은 바로 그 기업의 브랜드다. 브랜드가 기업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첫번째 가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럭키금성은 한국에서는 익숙하지만 글로벌 브랜드로는 뭔가 어색하고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구본무 부회장의 판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권영대 인터브랜드 코리아 총괄이사는 말한다. “1990년대는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국내 10대 재벌그룹 중에서 브랜드를 변경한 사례로 LG와 SK를 들 수 있고, 반면 브랜드를 유지한 사례로 삼성과 현대를 꼽을 수 있어요. 삼성과 현대는 당시 ‘글로벌 포지션’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었습니다. 그런 터에 영어식 사명으로 바꾼다면 혼란이 생기거나 불필요한 투자가 될 수 있었죠. 반면 럭키금성은 여러 사업군을 포괄하기에는 애매한 이름인 데다, 영어권 고객들에게 다가가기에도 어색한 부분이 있었죠. 국내 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시장으로 사업을 확대하려면 CI 변경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당시 구본무 부회장은 여러 가지 CI 변경 시안(試案)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그룹 전체의 정체성과 비전, 나아가 미래를 담는 중대한 사안을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브랜드는 ‘LG’로 결론을 내렸다. LG는 화학사업 분야의 럭키(Lucky)와 전기·전자·통신사업 분야의 금성(Gold Star)이라는 양대 브랜드의 영문 첫 글자를 각각 따와서 조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의 사업군 중에서 쌍두마차 역할을 하는 두 분야의 브랜드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하나의 통합된 기업 이미지를 창출한 셈이다.

문제는 심벌마크였다. 심벌마크는 언어로 표현되는 브랜드와 달리 도형이나 그림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훨씬 더 고차원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인 느낌을 주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시안이 구본무 부회장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L과 G를 붉은 원 안에 배치한 다음 마치 화룡점정처럼 사람의 눈을 콕 찍은 ‘미래의 얼굴(The Face of the Future)’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미래의 얼굴’은 최종 낙점을 받았고, ‘LG의 얼굴’이 됐다.

‘미래의 얼굴’은 세계, 미래, 젊음, 인간, 기술 등 다섯 가지의 개념과 정서를 담고 있다. 아울러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이라는 LG그룹의 경영이념을 형상화했다. 또한 ‘미래의 얼굴’ 안에 그려진 하나의 눈은 목표 지향성과 집중성, 미소를 의미한다. 원의 바탕색인 짙은 붉은색, 이른바 ‘LG 레드(Red)’는 세계의 고객들에게 따스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주는 동시에 세계를 향한 LG의 도전 의지를 선명하게 부각했다는 게 LG그룹 측의 설명이다.

LG그룹 관계자는 ‘미래의 얼굴’에 대해 “L과 G를 둥근 원 속에 담아 인간이 LG경영의 중심에 있음을 상징한다”며 “또 세계 어디서나 고객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고객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LG인의 결의를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L과 G, 그리고 ‘미래의 얼굴’로 이뤄진 LG그룹의 새로운 CI는 마침내 1995년 1월 1일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산뜻하면서도 세련되고, 무엇보다 친근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LG그룹의 새 CI는 금세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적극적인 광고홍보 캠페인도 주효했지만, 역시 CI 자체가 가진 강한 흡인력이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당시 LG그룹의 새로운 CI가 선을 보이자, 많은 전문가들도 호평을 보냈다.

권영대 인터브랜드 코리아 총괄이사의 설명이다. “브랜드는 언어적 표현과 시각적 표현의 두 가지 표현으로 이뤄집니다. 표현의 관점에서 LG 브랜드는 매우 훌륭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LG의 CI를 볼 때 느끼는 심미적 이미지 역시 아주 좋다는 데 저는 100% 동의합니다.”

구본무 회장 취임식서 ‘초우량 LG’ 선언

1995년 2월 22일, 새로운 CI의 산파역인 구본무 부회장이 드디어 LG그룹의 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만 50세 생일을 갓 지난 때였다. 젊고 역동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LG호의 출범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구본무 회장은 취임식에서 ‘초우량 LG’를 미래의 큰 화두로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임직원 여러분, 저는 LG를 반드시 초우량 LG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고를 성취해왔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고 저력입니다. 이제 그 전통을 한층 새롭게 합시다. 세계 초우량을 진정으로 갈구하고, 오직 초우량을 목표로 삼는 강한 LG를 만듭시다. 조직 전 부문의 역량을 선진기업과 당당히 겨룰 수 있도록 세계 초우량 수준으로 끌어올립시다. 그 역량을 바탕으로 21세기에 유망한 사업을 적극 선취해나갑시다.”

사실 구본무 회장은 부회장 시절부터 이미 LG그룹의 미래 성장동력 발굴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일례로 현재 세계 시장 1등을 차지하고 있는 LG화학의 중대형 2차전지는 구본무 회장이 부회장 시절에 직접 발굴해 추진한 사업 아이템이었다.

1991년의 일이다. 당시 구본무 부회장은 미래 성장동력 발굴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세계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산업 및 기술 트렌드를 살펴보다가 영국 출장길에 한 가지 아이템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2차전지였다. 2차전지는 한 번 쓰고 버리는 일반적인 건전지가 아니었다. 전지를 충전만 해주면 여러 번 반복해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신기술이었다.

그해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업체 소니는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전지를 상용화했다. 리튬이온전지는 무게가 가벼운 데다 고용량을 구현할 수 있어 오늘날 2차전지 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당시 구본무 부회장은 2차전지가 미래에 큰 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음을 직감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당시 계열사였던 럭키금속에 2차전지 연구개발 임무를 맡겼다. 그 후 회장에 취임한 뒤인 1996년에는 2차전지 연구개발 조직을 LG화학으로 옮겼다. 2차전지 연구개발을 더욱 강하게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차전지 연구개발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1997년 LG화학 연구진이 소형 2차전지 시험생산에 성공했지만 양산(量産)하기에는 품질이 미흡했다. 게다가 당시 2차전지 분야는 일본 기업들이 선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술력과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했다. 지속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자, 2차전지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05년에는 2차전지 사업에서만 2,000억 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우려의 시선은 더욱 강해졌다.

구본무 회장은 그룹 총수이지만 주변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구본무 회장은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합시다.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겁니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구본무 회장의 ‘뚝심과 끈기의 리더십’은 결국 달콤한 열매를 맺었다. LG화학은 현재 중대형 2차전지 분야에서 명실공히 세계 1위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2013년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내비건트리서치가 전기자동차 배터리 및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배터리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국제 경쟁력을 평가한 결과, LG화학이 두 분야 모두 1위에 올랐다. 실제 LG화학은 현재 현대·기아차, GM, 포드, 르노, 상하이 자동차, 아우디 등 전 세계 20여 개 자동차 제조업체를 전기차 배터리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또 ESS 특허 출원 건수에서도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적자에도 꾸준히 투자한 2차전지 마침내 결실

황유식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의 설명이다. “LG화학은 2008년 미국 GM의 전기차 ‘볼트’에 배터리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전기차 배터리 대중화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습니다. 자동차 부품은 장기간 안전성과 신뢰성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LG화학의 2차전지를 장착한 전기차가 사고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안전성과 신뢰성을 확보했다는 뜻이죠. LG화학은 2000년대 후반 소형 2차전지 분야에서 수익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중대형 2차전지 분야는 아직 적자이지만 전기차 시장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흑자 사업으로 돌아설 것으로 봅니다. 특히 2016년쯤 가격과 주행거리 문제를 개선한 2세대 2차전지가 상용화되면 전기차 시장도 본격적인 성장 국면에 들어갈 겁니다.

2차전지는 전기차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품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해요. 즉 검증된 제품을 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LG화학은 전기차용 2차전지 1등 기업으로서 향후 시장에서 ‘승자독식’의 과실을 누릴 수 있을 전망이에요. 2차전지의 미래를 내다본 구본무 회장이 수익이 나지 않는데도 꾸준하게 투자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봐요.”

2차전지는 휴대전화,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등 휴대용 전자기기는 물론 전기자동차의 핵심 부품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와 함께 21세기 산업에서 필수불가결한 3대 전자부품으로 꼽힌다.

LG그룹은 과거 럭키금성 시절 일찌감치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사업에 진출한 바 있다. 1979년 금성반도체(훗날 LG반도체로 사명 변경)를 설립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데 이어, 1987년에는 금성사(현 LG전자) 중앙연구소가 TFT-LCD 개발을 시작했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한 1995년에는 LG반도체가 D램 분야 세계 5위에 올랐고, LG소프트웨어(현 LG디스플레이)는 구미 LCD 1공장에서 양산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사업에 돌입했다. LG소프트웨어는 1985년 설립된 금성소프트웨어의 후신(後身)이다.

당시 사업 구도를 보면 LG그룹은 미래 전자·정보기술(IT)산업의 3대 필수 부품으로 부상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분야를 모두 육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구본무 회장 취임 당시에 가장 큰 성과를 내고 있었던 분야는 반도체 사업이었다.

하지만 LG반도체는 몇 년 후 뜻밖의 비운을 맞게 된다. 1997년 말 우리나라는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된다. 국난으로 일컬어진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그와중에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부가 선택한 정책수단 중 하나가 이른바 ‘빅딜(대기업 간 사업 맞교환)’이었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게 빅딜 정책의 취지였다. 1998년 7월 정부와 재계는 당시 5대 재벌그룹의 빅딜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5대 그룹은 기존의 주요 사업 중에서 일부를 서로 내주게 됐다.

이때 가장 진통이 컸던 게 현대그룹과 LG그룹의 ‘반도체 빅딜’이었다. 당시 빅딜은 형식상 당사자 간의 자율적인 협상에 따라 진행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5대 그룹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한 성격이 짙었다. LG그룹의 LG반도체와 현대그룹의 현대전자산업(현 SK하이닉스)은 어느 한쪽의 우위를 쉽사리 단정할 수 없을 만큼 대등한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LG그룹은 1999년 1월 6일 반도체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

구본무 회장은 반도체 빅딜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1998년 말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당시 LG전자와 LG반도체에 흩어져 있던 TFTLCD 사업을 떼어내 LG소프트웨어와 합친 것이다. 이렇게 해서 LG LCD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이 결정은 반도체 사업을 내려놓을 수도 있는 상황에 대비한 포석이었다는 설명이다. 즉 여차하면 반도체 사업의 대안으로 디스플레이 사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LG그룹 관계자는 “당시 구본무 회장은 그룹의 운명과 장래를 생각해 많은 고민 끝에 대규모 장치산업인 디스플레이 사업 육성이라는 결단을 단호하고 신속하게 내렸다”고 말했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한국의 주력 산업 중 하나다. 또한 한국의 두 기업이 나란히 세계 시장점유율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다. 양사는 치열한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한국을 세계 최고의 디스플레이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반도체 빅딜’ 비운 딛고 디스플레이 1등 키워

현재 평면 디스플레이의 주류는 LCD다. LCD를 처음 상품화한 것은 일본 전자업체 샤프였다. 시장을 본격적으로 키운 것도 샤프, 파나소닉, 도시바 등 일본 기업들이었다. 1990년대 디지털혁명이 가속화하면서 휴대전화, 노트북 컴퓨터, TV 등을 중심으로 LCD 수요가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국내 기업들은 디스플레이 시장의 거대한 잠재력을 내다보고 90년대 초중반부터 과감한 투자를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을 따라잡기 위한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본격 가동한 것이다. 서동혁 산업연구원 신성장산업연구실장은 말한다.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기업 천하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한국 기업들이 ‘5세대 LCD(유리기판 크기에 따른 세대 구분)’ 생산라인 구축에 선제적이고 대대적인 투자를 하면서 생산능력 면에서 일본 기업들을 압도하기 시작했죠. ‘5세대’ 투자는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디스플레이 산업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분수령이었습니다. 5세대 이후로는 일본 기업들이 한국을 따라잡기는커녕 더욱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운도 좀 따랐다고 할 수 있어요. 일본 기업들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다 보니 시장 전망이 확실하지 않으면 몸을 사렸어요. 반면 한국 기업들은 오너 경영자들이 ‘리스크 테이킹(Risk-taking)’을 하면서 과감하게 투자를 단행했죠. 그 결과 LG와 삼성 두 회사가 세계 시장의 약 절반을 차지하게 된 겁니다.”

기업의 투자 결정은 치밀한 시장 조사와 고도의 판단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욱이 사운을 건 대규모 투자의 경우는 타이밍이 성패를 가른다. 그런 점에서 구본무 회장의 LCD 투자 확대는 절묘한 시점에 이뤄졌다는 평가다. 2000년대 이후 평면 디스플레이를 채택하는 디지털기기 시장이 팽창 일로를 달렸기 때문이다.

LG그룹의 LCD 사업이 일대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네덜란드 전자업체 필립스와의 전략적 제휴를 성사시키면서부터다. LG그룹은 반도체 빅딜 직후 필립스와 LCD 사업 합작 협상에 나섰다. 당시 세계유수의 전자업체였던 필립스는 LCD 분야의 기초 기술에 강점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LG는 LCD 응용기술이 우수했다. 두 회사가 손을 잡으면 높은 시너지 창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협상은 14개월 동안 이어졌다. 숨 가쁜 마라톤 협상이었다. 마침내 1999년 5월 협상이 타결됐다. LG는 당시 민간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6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그해 8월에 드디어 LG와 필립스의 합작법인 LG필립스LCD가 출범했다.

필립스와의 LCD 사업 합작은 ‘신의 한 수’였다. LCD 분야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대규모 장치산업이다. 당연히 투자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LG그룹은 필립스의 기술력과 자본력을 활용하면서 리스크를 대폭 줄였다. 아울러 디스플레이 시장이 급성장하는 호기를 확실하게 잡게 됐다.

서동혁 산업연구원 신성장산업연구실장의 설명이다. “1990년대 말 당시에는 삼성이 LCD 분야에서 LG보다 좀 더 앞선 상황이었어요. 자본과 기술 면에서 둘 다 그랬죠. 그 무렵 LCD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LG그룹은 단독으로 투자하기에는 재무적으로 좀 벅찬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필립스라는 전략적 파트너와 손잡으면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수 있었죠. 물론 결과도 좋았습니다.”

LG필립스LCD는 출범 이듬해인 2000년 세계 최초로 20.1인치 크기의 TV용 LCD를 개발했다. 또 2002년에는 세계 최초로 5세대 LCD생산라인 가동에 들어갔다. 삼성(당시 삼성의 LCD 사업은 삼성전자가 수행했다)의 5세대 라인 가동보다 약 4개월 앞선 것이었다. LG필립스 LCD는 그해 말 대형 TFT-LCD 시장점유율에서 최초로 세계 1위(분기 기준)에 오르는 개가를 올렸다. 세계 1등 디스플 이 기업으로 처음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 LG그룹은 2008년 필립스와의 합작관계를 청산하고 단독법인인 LG디스플레이를 출범시켰다. 이미 홀로서기에 충분한 기반이 닦인 뒤였다.

구본무 회장은 LCD 사업 육성을 위해 엄청난 집념을 발휘했다. 1995년 취임 이후 20년간 LCD 사업에 투자한 금액만 총 40조 원을 웃돈다. 20년 전 LG그룹의 LCD 사업은 고작 15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 LG디스플레이는 무려 20조 원 중반대의 매출을 거두는 세계 1위 디스플레이 기업으로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대기업 중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 전환 ‘모범’

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의 최고경영자로서 사업 외적인 부분에서도 몇 차례 통 큰 결단을 내려 세상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계열분리를 꼽을 수 있다. 대기업 중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 전환 ‘모범’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의 최고경영자로서 사업 외적인 부분에서도 몇 차례 통 큰 결단을 내려 세상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계열분리를 꼽을 수 있다.

1997년 말 한국에 닥친 외환위기는 그야말로 국난이었다. 물론 기업에게도 악몽이었다. 한보, 진로,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들이 잇달아 무너졌다. 재계 서열 2위의 대우그룹마저 해체됐다. 이른바 ‘대마불사’의 신화가 여지없이 붕괴된 파란의 시기였다. 저마다 사정은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분모가 한 가지 있었다. 엄청난 부채비율이 그것이었다. 그 시대 한국 대기업집단은 문어발식 확장으로 사세를 키웠다. 문제는 자기자본이 아닌 금융조달로 사업을 확장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수많은 계열사들은 순환출자와 상호출자로 얽히고설켜 있어, 덩치에 비해 자본력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그런 터에 외환위기로 자금조달이 경색되자, ‘한 방’에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외환위기는 한국 기업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특히 재벌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그 무렵 구본무 회장은 세간의 목소리를 경청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골자는 대기업을 향한 비판의 핵심이었던 순환출자 및 상호출자 고리를 끊어내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2003년 3월 LG그룹은 지주회사인 ㈜LG를 출범시켰다. 3년에 걸친 지주회사 체제 전환 작업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LG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은 국내 대기업집단 가운데 최초였다. 투명하고 선진적인 경영시스템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1999년 정부가 민간기구 형태로 출범시킨 ‘기업지배구조개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전 GE코리아 회장)은 말한다. “한국 기업 대부분이 외환위기 때 큰 경영위기를 겪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도 그 때문이죠. 당시 ‘기업지배구조개선위원회’는 미국 등 선진국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광범위하게 조사했어요. 사실 그때는 국내 기업들에게 지배구조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 정도였죠. 어쨌든 위원회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상당 부분 반영한 지배구조 개선안을 도출했습니다. 사외이사 제도, 지주회사 제도 등이 포함됐었죠. LG그룹의 지주회사 전환은 구본무 회장의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 국내 대기업들이 여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구본무 회장은 선구적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여 투명한 경영시스템을 구축했죠.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이 아직도 지주회사 전환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LG그룹의 결정은 돋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LG그룹은 잘 알려진 대로 구씨와 허씨의 동업으로 창업한 기업이다.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은 경남 진주의 갑부였던 사돈 허만정 씨로부터 사업자금을 지원받아 1947년 오늘날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했다. 이후 LG그룹은 구인회 회장의 형제들과 허만정 씨의 아들들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사세를 키워나갔다. 두 집안은 특히 많은 자손을 뒀다. 그러다 보니 LG그룹 오너 일가 구성원 중에서 경영에 참여하는 사람만 해도 수십 명을 훌쩍 넘었다.

구본무 회장은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끝낸 다음 두 집안의 오랜 동업을 청산하기로 결심했다. 오너 일가 구성원들의 복잡한 지분구조를 단순화시키고 핵심사업에 주력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마침내 2005년 1월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의 57년에 걸친 동업에 마침표를 찍었다. 허씨 가문의 GS그룹이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구인회 창업주의 형제 일가들도 LIG그룹(1999년), LS그룹(2003년), LF(2007년) 등으로 잇달아 독립했다.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은 생전에 ‘인화’를 경영의 근간이자 집안의 가훈으로 삼았다. 그 덕분에 LG그룹은 구씨와 허씨 두 가문의 수많은 자손들이 경영에 참여했지만, 이렇다 할 잡음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몇 차례에 걸친 계열분리를 할 때도 재산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지 않았다. 가장 많은 계열사와 자산을 떼어낸 GS그룹의 독립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간에서는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칭송할 정도
였다.

재산 다툼 없는 계열분리 ‘아름다운 이별’ 찬사

2005년 계열분리를 마친 GS그룹의 자산 규모는 18조 7,200억 원이었다. 또 LG그룹의 자산 규모는 50조 8,800억 원이었다. 구씨 가문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자산과 비교할 때 40% 가까운 자산을 허씨 가문에 내준 셈이다. 특히 당시 그룹의 캐시카우였던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 LG건설(현 GS건설), LG유통(현 GS리테일) 등을 주저 없이 GS그룹에 넘겼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말한다. “구본무 회장이 추진한 계열분리는 굉장히 잘됐다고 봅니다. LG그룹은 구씨가 사업을 키우고 허씨가 자본을 대며 살림을 맡는 역할분담 구도로 크게 성장한 기업이죠. 구씨 가문이든, 허씨 가문이든 서로가 없었으면 오늘날 LG그룹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두 가문은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있겠죠. 우리나라 재벌 가문들은 재산을 둘러싼 다툼이 빈번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구본무 회장의 계열분리 과정은 다른 기업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LG그룹은 GS, LS, LIG, LF 등의 계열분리로 사세가 적잖이 위축될 법도 했다. 하지만 전자·화학·통신서비스의 3대 핵심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한 덕분에 계열분리의 여파를 상쇄할 수 있었다. 구본무 회장 취임 직전 연도인 1994년 LG그룹의 전체 매출 규모는 약 30조 원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4년 LG그룹의 매출 규모는 약 150조 원에 달했다. 4차례의 계열분리로 다수의 알짜배기 사업을 떼어내고도 20년간 5배의 매출성장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성과
다. 아울러 2014년 기준으로 매출의 3분의 2를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이는 한편 해외 현지법인 수도 290여 개에 이르는 등 ‘글로벌 기업’의 면모를 갖췄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 표방한 ‘글로벌 일등 기업’의 꿈에 성큼 다가섰기 때문이다.

구본무 회장은 취임 10주년을 맞은 지난 2005년, LG그룹 임직원들의 사고 및 행동의 기반이 되는 ‘LG 웨이(LG Way)’를 선포했다. ‘LG 웨이’는 ▲LG의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바탕으로 ▲LG의 행동방식인 ‘정도경영’을 실천함으로써 ▲LG의 궁극적 지향점인 ‘일등 LG’를 달성하자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일등 LG’는 글로벌 시장을 이끄는 선도기업이 된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 특히 ‘일등 LG’는 단순한 시장 1위 기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고객과 투자자, 인재들이 신뢰할 뿐 아니라 경쟁사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LG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들어 구본무 회장은 ‘시장선도’라는 새로운 경영 화두에 몰두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격화되는 시대를 맞아 최고의 고객가치를 담은 선도적인 상품과 서비스로 시장을 주도해나가자는 것이다. 고객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거듭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LG그룹 관계자는 “구 회장은 철저한 미래 준비가 있어야만 LG가 시장선도 기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며 “5년 또는 10년 후를 내다보며 기존 사업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향상시키는 동시에 잘할 수 있는 신사업 분야로 진입하기 위해 부단한 실험과 시도를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시장선도’ 화두로 ‘일등 LG’ 채찍질

구본무 회장의 ‘시장선도’ 화두는 점차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디스플레이, 중대형 2차전지, TFT-LCD용 편광판, 전자제품·자동차용 고부가가치 합성수지 ABS 등 기존의 세계 시장 1등 분야 외에 다른 사업 분야의 약진이 눈길을 끈다.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초고화질 올레드(OLED) TV, 휴대폰 사업의 부진을 털어내고 재도약을 이끌고 있는 G시리즈 스마트폰,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받는 대형 OLED 패널 양산 돌입, 과감한 LTE 네트워크 투자에 따른 이동통신
시장점유율 20% 돌파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구본무 회장의 ‘시장선도’ 경영은 차세대 성장엔진 육성에 대한 강한 드라이브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LG그룹은 주요 계열사들을 총동원해 에너지 솔루션과 친환경자동차 부품 양대 분야에 전사적인 역량을 투입하고 있다. 두 분야 모두 향후 거대한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에너지 솔루션 사업은 정보기술을 활용해 에너지의 생산, 저장, 사용에 이르는 전 과정에 효율을 높이는 토털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목표다. 또 친환경자동차 부품 사업은 전기자동차, 지능형자동차 등 차세대 자동차에 장착되는 각종 부품 및 솔루션 시장을 집중 공략할 계획이다.

구본무 회장은 평소 “LG의 사업성과에 대한 판단 기준은 한 해 동안 거둔 이익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씨를 뿌리고 얼마나 시장을 이끄는 시도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역설하곤 한다. 그는 현재 집중 육성 중인 차세대 성장엔진에 관해서도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신사업들은 일등을 하겠다는 목표로 철저하고 용기 있게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강점인 IT 융복합 역량에 틀을 깨는 창의력을 더해 시장의 판을 흔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구본무 회장 취임 20주년을 맞는 올해, LG그룹은 다음 10년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 글로벌 시장은 갈수록 급변하고 있다. 불투명성과 불확실성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 일등기업이 되는 것도, 일등기업을 유지하는 것도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구본무 회장의 ‘일등 LG’를 향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에너지솔루션·친환경자동차부품
양대 신성장동력에 미래 건다

LG그룹은 범그룹 차원에서 ‘에너지 솔루션’과 ‘친환경자동차 부품’ 사업을 양대 신성장동력으로 집중 육성하고 있다. LG그룹이 두 분야를 낙점한 것은 기후·환경·에너지 등 범세계적 이슈와 연관성이 깊기 때문이다. 즉 21세기 글로벌 이슈에 선제적으로 대비함으로써 새로운 사업을 창출한다는 구상이다. 먼저 에너지 솔루션 분야에서는 친환경 에너지의 생산부터 저장, 효율적 사용에 이르는 ‘완결형 에너지 밸류체인’ 사업 역량을 확보해 국내 선두주자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이다.

LG는 2013년 태양광 모듈,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등을 포함한 에너지 솔루션 사업 분야에서 2조 3,0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린 바 있다. 향후 2~3년 안에 매출을 4조 원대까지 키운다는 목표다. 에너지 솔루션 사업에는 양대 주력 계열사인 LG전자, LG화학을 비롯해 LG CNS 등 에너지 사업 관련 계열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420MW였던 태양광 모듈 생산량을 530MW로 늘리며 글로벌 태양광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아나간다는 계획이다. 특히 전 세계 태양광 모듈 수요의 20%에 달하는 일본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LG화학은 전기차용 2차전지 분야 세계 1위 경쟁력을 바탕으로 ESS 시장 공략도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 독일 지멘스와 ESS 사업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향후 지멘스 ESS 사업에 대한 배터리 공급 우선권을 확보하는 등 해외사업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LG CNS는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 사업 확대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LG CNS는 지난해 폴란드 최대 전력회사 타우론전력이 발주한 약 33만 대 규모의 스마트 전력계량기(Advanced Metering Infrastructure, AMI) 공급 및 시스템 구축 사업을 경쟁입찰 끝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1조 원대 이상으로 예상되는 폴란드 AMI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는 평가다.

LG그룹의 친환경자동차 부품 사업에는 LG전자, LG화학,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 CNS가 힘을 합쳐 시너지를 내고 있다. LG전자는 2013년 VC(Vehicle Components)사업본부를 신설하고 자동차 부품 사업의 핵심 연구개발 기지 역할을 담당할 ‘LG전자 인천캠퍼스’를 본격 가동했다. LG전자 인천캠퍼스는 차량용 핵심 부품과 친환경 기술 개발을 중점 수행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세계 유수의 자동차업체에 CID(Center Information Display, 중앙 정보 디스플레이), 계기판 등 자동차용 디스플레이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자동차용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매년 30% 이상 성장해 2016년 매출 10억 달러로 세계 1위를 달성한다는 목표다.

LG이노텍은 차량용 모터와 센서, 카메라 모듈, 무선통신 모듈, LED, 전기차용 배터리 제어시스템, 전력변환 모듈 등 차량용 전장부품 라인업을 대폭 다변화하고 있다. 현재 보유한 제품군이 20여 종에 이른다.

LG화학은 현재 연간 20만 대의 전기차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에 연간 10만 대 생산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LG화학은 2016년 이후 수백만 대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납품 물량을 이미 확보한 상태다.

LG CNS는 전기차 충전 솔루션 개발과 충전 인프라 구축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자회사 에버온을 통해 ‘씨티카’라는 브랜드로 ‘카 셰어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첨단 R&D 메카
‘LG사이언스파크’가 온다
서울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 LG그룹의 미래를 짊어질 첨단 연구개발 메카가 들어선다. 지난해 10월 기공식을 열고 본격적인 건설에 들어간 ‘LG사이언스파크’가 그것이다. LG사이언스파크는 축구장 24개 크기인 17만여㎡(약 5만 3,000평) 부지에 연 면적 111만여㎡(약 33만 7,000평) 규모의 연구시설 18개 동이 들어설 예정이다. LG사이언스파크의 1단계 공사가 완료되는 2017년에는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화학, LG생활건강, LG생명과학, LG유플러스, LG CNS 등 10개 계열사의 선행연구 조직이 입주한다. 2020년 전체 공사가 마무리되면 전자·화학·통신·에너지·바이오 분야 2만 5,000명의 연구인력이 집결해 융복합 연구 및 핵심·원천기술 개발을 수행하게 된다. 구본무 회장은 지난해 기공식에서 “LG가 2020년까지 약 4조 원을 투자할 LG사이언스파크는 다방면의 두뇌들이 모여 창조적 혁신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최대 융복합 연구단지가 될 것”이라며 “수만 명의 다양한 인재들을 유치하고 육성해 기술 간, 산업 간 융복합을 촉진하고 시장을 선도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구본무 회장의 ‘인재 사랑’ 20년

‘LG글로벌챌린저’는 1995년 구본무 회장 취임과 함께 시작한 LG그룹의 대학생 해외 탐방 지원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매년 대학(원)생들을 선발해 여름방학 동안 2주간에 걸쳐 ▲자연과학 ▲정보통신·공학 ▲경제·경영 ▲인문·사회 ▲문화·예술·체육 등 5개 부문별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정부기관, 연구소, 대학, 기업, 사회단체 등을 탐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LG글로벌챌린저는 지난 20년간 655개 팀 및 2,590명의 대원을 배출했으며, 탐방 장소는 59개국 470여 개 도시에 이른다. 무엇보다 연구 분야 및 탐방 국가, 탐방 예산 등에 제약을 두지 않고 지원자들의 ‘창의와 자율’을 적극 지지해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탐방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구본무 회장은 LG글로벌챌린저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기울여왔다. LG글로벌챌린저 발대식과 시상식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것이 단적인 예다. 젊은 인재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지난해 발대식에서 청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꿈이 없는 사람은 가슴이 설레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 주저앉지 말고, 열정과 패기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구본무 회장 취임 후 LG그룹의 주요 연혁
1995년 1월 그룹 CI, 럭키금성에서 LG로 변경
1995년 2월 구본무 회장, LG그룹 3대 회장에 취임
1996년 7월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 설립
1999년 1월 반도체 빅딜로 LG반도체 포기
1999년 11월 LG필립스LCD 출범
1999년 11월 LIG그룹 계열분리
2000년 1월 데이콤 계열편입
2001년 4월 LG화학, LGCI·LG화학·LG생활건강 3개사로 분할 출범
2002년 4월 LG전자, LGEI·LG전자 2개사로 분할 출범
2003년 3월 지주회사 ㈜LG 출범
2003년 11월 LS그룹 계열분리
2004년 3월 LG필립스LCD, 세계 최대 규모의 파주 LCD단지 기공
2005년 1월 GS그룹 계열분리
2005년 3월 LG Way 선포
2007년 11월 LG패션(현 LF) 계열분리
2008년 12월 매출 100조 원 돌파
2009년 4월 LG하우시스, LG화학에서 분할
2010년 1월 LG유플러스 출범
2012년 9월 ‘시장선도’ 경영 화두로 제시
2014년 10월 LG사이언스파크 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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