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는 국내 제약업계에서 차별화된 길을 걸어온 기업이다. ‘만들기 힘든, 그러나 꼭 필요한 의약품’ 개발을 모토로 삼는 점에서 녹십자의 기본적인 경영이념을 읽을 수 있다. 녹십자는 백신과 혈액제제 분야에서 여느 제약업체들이 선뜻 넘보기 어려운 선구적인 발자취를 남겨왔다. 그 뚝심과 집념은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조순태 대표이사 부회장을 만나 녹십자의 성공비결을 들어봤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대담 정리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국내 1위 경쟁은 부질없는 일 글로벌 제약사 도약이 우리의 목표”
예로부터 ‘오줌도 약이 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녹십자는 그 사실을 증명한 제약기업 중 하나다. 1974년 녹십자는 국내 최초로 ‘유로키나제 Urokinase’라는 의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유로키나제는 오줌이라는 뜻의 접두사 ‘Uro’와 효소라는 뜻의 단어 ‘Kinase’를 조합한 용어다. 직역하면 ‘오줌에서 추출한 효소’라고 할 수 있다.
녹십자가 개발한 유로키나제는 사람의 오줌을 정제해 만든 ‘혈전 용해제’다. 주로 뇌졸중, 뇌혈전증, 심근경색 등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가령 뇌졸중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증세가 위급하다고 판단되면, 의사는 환자의 혈전을 용해시키기 위해 유로키나제를 사용한다.
녹십자는 1974년 이래 40여 년간 유로키나제를 생산·판매해왔다. 독일, 대만, 말레이시아 등 해외로도 수출하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녹십자의 유로키나제는 1994년 독일 보건성으로부터 ‘우수 의약품 제조품질관리기준(GMP)’ 인증을 획득한 바 있다.
조순태 녹십자 부회장은 유로키나제에 얽힌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예전에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보면 휴게소 남자 화장실에 놓인 소변 용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죠. 저희 회사가 소변 수집을 위해 놓아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예비군 훈련장이나 군부대에도 많이 비치해뒀었죠. 유로키나제의 원료가 사람의 오줌이니 그런 방법으로 원료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죠 (웃음).”
녹십자는 1967년 창립 이래 ‘만들기 힘든, 그러나 꼭 필요한 의약품’ 개발이라는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왔다. 국내 대다수 제약기업이 화학합성 의약품을 생산·판매하던 시절에 녹십자는 일찌감치 바이오 의약품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바이오 의약품은 생물체 유래 물질을 이용하거나 생명공학 기술을 활용해 만드는 의약품을 말한다. 바이오 의약품 분야는 21세기에 가장 유망한 산업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녹십자는 수십 년 전부터 바이오 의약품 분야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녹십자도 스스로 국내 생명공학 산업을 선도해왔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실제 녹십자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굵직굵직한 선구적 발자취들이 남아 있다. 일례로 1983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B형 간염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헤파박스’로 명명된 이 백신은 당시 약 13%에 달하던 우리나라 B형 간염 보균율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춰 국민건강 증진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헤파박스는 지금까지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아동기금(UNICEF) 등 60여 개의 국제기구·단체 및 국가에 보급됐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접종된 B형 간염 백신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한국 제약산업이 낳은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셈이다.
세계 최다 접종 ‘B형 간염 백신’ 개발
조순태 부회장은 말한다. “헤파박스는 1983년 출시돼 이듬해 그야말로 ‘대박’을 쳤습니다. 제가 녹십자 신입사원 시절이었을 때, 헤파박스 덕분에 영업에 큰 힘을 받았었죠. 녹십자는 헤파박스로 훌쩍 점프했습니다. 그 한 품목으로 회사 매출이 두 배로 뛰었을 정도였죠. 게다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접종된 B형 간염 백신이 바로 헤파박스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출도 많이 했죠.”
백신 Vaccine은 생명공학 기술로 제조하는 대표적인 바이오 의약품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우리에게 친숙하기도 하다. 백신은 감염증에 대한 면역을 얻기 위해 미생물 또는 바이러스를 약화하거나 죽여서 만든다. ‘항원’을 인위적으로 신체에 투입해 ‘항체’를 생성하는 원리다. 특정 감염증에 대한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은 경미한 증상을 겪은 다음 그 질환에 대해 면역을 얻게 된다.
조순태 부회장의 설명이다. “백신은 생(生)백신과 사(死)백신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생백신은 바이러스 자체가 살아 있죠. 하지만 사람 몸에 들어가더라도 병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가령 홍역 백신을 맞은 사람은 본인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가볍게 홍역을 앓고 지나갑니다. 인체는 홍역을 한번 앓았기 때문에 스스로 홍역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홍역을 ‘방어’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녹십자는 국내 제약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백신의 명가다. 1983년 B형 간염 백신 개발을 필두로 1988년 세계 최초 유행성출혈열백신 개발, 1993년 세계 두 번째 수두 백신 개발, 2009년 국내 최초 신종플루 백신 생산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 2009년 당시 전남 화순군에 국내 유일의 백신 공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으로 보건당국이 초긴장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녹십자는 신종플루 백신을 내놓으면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수호천사로 활약한 바 있다. 당시 정부는 글로벌 제약기업들과의 신종플루 구매 협상에 난관을 겪고 있었다. 바로 그때 녹십자가 신종플루 백신 양산 체제를 갖추고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조순태 부회장은 “30여 년간 녹십자에 근무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신종플루 백신을 선보였을 때”라며 “그때 신종플루 백신을 발판으로 회사 규모도 훨씬 커졌을 뿐 아니라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큰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녹십자의 또 다른 주력 의약품은 혈액제제(血液製劑)다. 백신과 혈액제제는 녹십자의 성장을 견인해온 쌍두마차다. 혈액제제는 사람의 혈액을 원료로 생산하는 의약품을 말한다. 혈액 분획(分劃: 각종 구성 성분을 분리하는 조작)을 통해 혈장(血漿)에서 면역이나 지혈 등의 작용을 하는 단백질만을 골라내 만든 의약품이다. 알부민, 면역글로불린 제제, 혈액응고인자 제제가 대표적이다. 알부민은 삼투압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단백질로, 대량 출혈에 의한 쇼크 상태나 화상, 간경변을 보이는 환자에게 사용된다. 면역글로불린은 항체 작용을 하는 단백질로, 면역 결핍 질환 치료에 쓰인다. 또 혈액응고인자는 지혈이 안 되는 혈우병 환자에게 사용된다.
녹십자의 2014년 총 매출액은 약 9,760억 원에 달했다. 1조 원 클럽을 코앞에 두고 있다. 올해 1조 원 돌파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녹십자는 매출 규모 기준으로 국내 제약업계 2위 기업이다. 1위 유한양행과는 근소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수출 실적이 매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어 국내 1위 고지 정복도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분석이다.
제약업계 최초로 수출 2억 달러 돌파
녹십자 전체 매출에서 백신과 혈액제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다. 두 주력 사업 분야가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거의 비슷하다. 녹십자는 2014년 연간 수출액 2억 달러를 돌파했다. 국내 제약기업 중에서는 최초의 기록이다. 특히 2013년 대비 수출액이 약 40%나 늘어났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녹십자가 수출시장에서 호조를 띠는 것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품목을 보유하고 있는 덕분이다. 녹십자는 지난해 백신 부문에서만 약 6,000만 달러의 수출액을 달성했다. 전년 대비 무려 60%의 성장세다. 세계 최대 백신 수요처 중 하나로 꼽히는 세계보건기구 산하 범미보건기구(PAHO) 입찰에서 독감 백신과 수두 백신 수주 물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에는 수두 백신 입찰에서 전량을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금액으로는 7,500만 달러 규모다. 이는 국내 제약기업의 국제기구 의약품 입찰 역사상 단일 제품 기준으로는 최대 규모에 해당한다.
녹십자의 백신 기술력은 세계가 인정한다. 일례로 세계보건기구의 독감 백신 사전적격인증(PQ)을 보유하고 있는 단 4개 기업에 녹십자가 포함된다. 특히 다인용 및 1인용 독감 백신을 국제기구에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은 녹십자를 비롯해 2개사뿐이다. 글로벌 독감 백신 시장에서 녹십자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녹십자의 경쟁력 원천은 연구개발(R&D)에 있다. 녹십자는 연간 매출액의 약 10%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국내 제약기업 평균이 5% 선인 점을 고려하면 녹십자가 R&D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는 지표다. 녹십자의 R&D 분야 인력도 전체 직원의 약 20%에 달한다. 조순태 부회장은 말한다. “저희 녹십자는 ‘R&D가 회사의 미래다’, ‘R&D가 미래의 매출이다’라는 내부 슬로건을 갖고 있습니다. 제약산업은 R&D가 미래를 결정합니다.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임상 시험도 전임상, 1상, 2상, 3상을 거쳐야 합니다. 제품 개발에서 시판까지 최소 10년은 걸리죠. 그러다 보니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R&D에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 녹십자의 모습도 10년 전부터 준비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제약산업은 전자, 자동차, 철강 등 다른 주요 산업과 달리 글로벌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국내 최대 제약기업의 연간 매출액도 1조 원 언저리에 그친다. 화이자, 노바티스 등 세계유수의 제약기업들이 연간 수십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데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국내 제약업계가 점차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조순태 부회장의 말이다. “국내에서 1위냐, 2위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약기업이 R&D에 많은 투자를 하려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춰야 합니다. 제가 녹십자를 대표해 지난해 12월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글로벌 시장 개척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날 LG디스플레이 사장, GS칼텍스 부회장도 함께 훈장을 받았죠. 그런데 옆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제가 너무 왜소한 느낌이 들더군요. 두 회사는 매출 규모가 수십조 원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이지 않습니까. 반면 국내 제약산업 전체의 연간 매출 규모가 20조 원이 채 안 되는 상황이에요. 저는 그 자리에서 ‘우리 제약산업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뼈저리게 들더군요. 한국 제약기업들이 세계시장으로 반드시 진출해야 하는 이유죠.”
한국 제약산업 글로벌화 롤모델 될 것
세계 제약시장은 올해 약 1,300조 원 규모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게다가 연평균 성장률도 6%대에 이른다. 이 황금시장의 70% 이상을 미국, 유럽 등 제약산업 선진국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신흥국가들이 새로운 거대시장으로 떠오르면서 세계 제약시장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한국 제약기업들에게는 글로벌 시장 진출을 본격화할 수 있는 기회다.
국내 제약업계에서 수출 선봉장으로 떠오른 녹십자는 글로벌 시장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인데, 그 비중을 수년 안에 50%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우선 백신 부문에서는 차세대 독감 백신 개발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더욱 제고한다는 목표다. 또한 혈액제제 부문은 중국, 인도, 중동 등 신흥시장으로 수출을 적극 확대해나가기로 했다. 특히 녹십자는 캐나다 및 미국 현지법인을 앞세워 북미시장 공략을 꾀하고 있다. 조순태 부회장은 말한다. “박세리 선수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진출의 선구자 역할을 한 덕분에 지금 한국 여자 프로골프 선수들이 LPGA에서 맹활약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처럼 저희 녹십자도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인 결실을 맺어 나간다면 우리나라 제약기업들에게 글로벌화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동제약 주주제안은 주주의 정당한 권리”
최근 녹십자는 일동제약과 함께 나란히 세간의 시선을 끌고 있다. 발단은 지난 2월 초 녹십자가 이사 선임 요구를 골자로 한 ‘주주제안서’를 일동제약에 보내면서 시작됐다. 녹십자는 일동제약 지분 29%가량을 보유한 2대 주주다. 일각에서는 녹십자가 일동제약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녹십자의 지분율과 일동제약 최대주주인 윤원영 회장 측의 지분율은 불과 3% 정도 차이다. 따라서 녹십자가 추가 지분을 사들이면 최대주주로 올라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조순태 녹십자 부회장은 “주주로서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를 행사한 것일 뿐”이라며 항간의 시각을 일축했다. “녹십자는 일동제약 이사회에 사외이사 1명과 감사 1명을 선임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회사와 주주 간의 원활한 소통과 양사 간의 시너지 창출을 통해 기업가치 및 주주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겁니다. 2대 주주로서 총 13명의 이사 가운데 2명을 선임해달라고 제안한 것을 적대적 M&A 시도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일동제약의 경영이 잘 이뤄지면 녹십자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아가 한국 제약산업 발전에도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주주제안서를 보낸 것일 뿐입니다.
글로벌 혈액제제 시장에서 금맥 캔다
녹십자는 유전성 희귀질환인 헌터증후군 치료제 ‘헌터라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헌터라제는 녹십자가 2012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한 헌터증후군 치료제다. 헌터증후군 치료제의 세계시장 규모는 약 6,000억 원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11%에 달한다. 수년 내 시장규모가 1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헌터증후군 치료제 세계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게 녹십자의 목표다.
녹십자는 의약품 제조 플랜트를 통째로 수출하는 성과도 낳았다. 지난 2013년 태국 적십자에 혈액제제 플랜트를 수출한 것이다. 국내 제약기업 중 생물학적 제제 플랜트를 해외에 수출한 첫 사례였다. 현재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도 수출 협상을 진행 중이다.
녹십자는 혈액제제 수출시장 확대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최대 혈액제제 시장인 북미시장 본격 진출을 앞두고 있다. 녹십자의 캐나다 현지법인 GCBT는 몬트리올에 연간 최대 100만 리터의 혈장 처리 능력을 갖춘 공장을 2019년까지 준공할 계획이다. 또 미국 현지법인 GCAM은 안정적인 원료혈장 확보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혈액제제는 국내보다 해외시장 가격이 훨씬 높게 형성돼 있다. 가령 녹십자의 면역글로불린(Immunoglobulin: 항체작용을 하는 단백질) 제품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은 인도나 중남미 등 신흥시장에 수출하면 국내 가격의 2배를 받는다. 또 북미 시장에서는 가격이 4배로 껑충 뛴다. 녹십자가 혈액제제 제품의 글로벌 시장 공략에 강한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순태 부회장은…
1954년생. 1977년 중앙대 사회사업학과 졸업.
1981년 녹십자 입사, 1998년 녹십자 상무,
2003년 녹십자 부사장, 2009년 녹십자 대표이사 사장,
2010년 한국제약협회 부이사장,
2014년~현재 한국제약협회 이사장,
2015년~현재 녹십자 대표이사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