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달러 환율이 1,130원대를 넘나들고 엔-달러 환율이 120엔대 초반에서 형성되는 등 달러의 강세 기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원-엔 환율은 100엔당 930원대를 형성하면서 엔저 여파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원-엔 환율이 100엔당 1,500원 근처까지 갔던 2008년에는 명동에 일본인 관광객이 엄청나게 몰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인 관광객만이 명동을 누비고 있고 일본인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오히려 일본에 가면 중국관광객과 우리나라 관광객이 넘쳐난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다. 환율은 이처럼 중요하고도 민감한 변수이다. 환율이 관광객 유입 여부에 즉시 영향을 주듯, 제품 수출과 수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모든 국가는 환율 문제만 나오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1929년 대공황 직후엔 극심한 경제 부진에 시달리던 각국 정부가 줄어드는 내수에 대응하기 위해 자국 통화를 절하해 수출을 촉진하고, 동시에 상대국으로부터 수입을 줄이기 위해 관세를 인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자국의 수입은 상대국의 수출이므로 자국 수입을 줄이면 상대국 수출도 감소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국 수출이 줄면 상대국 국민소득이 위축되면서 수입 여력도 함께 감소하게 된다. 결국 내 수출도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나만 살려고 하다가, 상대방이 힘들어지면 나도 같이 힘들어지는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 채 각국이 경쟁적 평가절하에 나섰기 때문에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어려울 때 혼자만 살겠다는 식의 대응이 왜 근린궁핍화정책(beggar-thy-neighbor policy 직역하면 ‘네 이웃을 거지로 만드는 정책’)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는 까닭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최근 우려할만한 움직임이 관찰되고 있다. 바로양적완화가 그것이다. 일본과 유럽이 양적완화를 실행하면서 돈이 풀리고 이에 따라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현상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론 양적완화이지만 속으론 환율전쟁이다. 재정이 엉망이 된국가들이 통화정책을 기본으로 하는 거시정책을 실행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양적완화라는 이름이 붙은 비전통적 통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정책의 요체는 금리를 제로로 만들면서 계속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다. 금리중심 통화정책 기조를 통화량 중심으로 바꾸면서 유동성을 풍부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는 금융기관으로 전달되는데, 이때 유동성이 풍부해진 금융기관이 대출을 통해 이를 시중에 풀면 화폐량은 급속히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의 위기 국면에선 금융기관이 위험관리에 주력하느라 그다지 활발하게 대출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시중에 도는 돈은 중앙은행이 발행을 늘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증가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돈이 적절한 속도로 돌기 시작하면 인플레 걱정 없이 화폐량이 증가하고 경기가 부양될 수 있다.
하지만 양적완화로 자국 화폐 가치의 절하가 이뤄지면 수출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다. 이 경우 돈이 돌고 수출이 증대되면서 경기부양 효과가 나타난다. 일본도 양적완화를 실행하면서 인플레 유도와 경기 부양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엔화약세를 유도해 수출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정책의 숨은 목표로 보인다. 미국도 양적완화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엔저에 대해선 그다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최근 양적완화를 시행한 유로중앙은행도 마찬가지다. 유럽이 양적완화를 해도 유로화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유로존 국가들끼리는 환율 조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로화 가치하락은 비 유로존 국가에 대한 유로존 국가의 수출경쟁력을 높이게 된다. 결국 유로중앙은행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양적완화를 통해 일석이조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시장에선 벌써 유로존 국가들의 수출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양적완화로 한때 1.6달러까지 상승했던 1유로 가치가 이젠 1.0달러 근처로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로화 가치를 유로 당 1달러에 수렴하는 소위 패리티(parity) 현상이다.
이와 연결해 미국은 양적완화에 성공하면서 달러 부진을 씻어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체면을 많이 구겼다. 특히 1944년 이후 정착된 브레튼우즈 시스템은 달러를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기축통화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에서 위기가 터지면서 달러 독주체제에 제동을 거는 많은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2009년 초 중국중앙은행 총재가 주장한 내용이었다. 져우샤오찬 총재는 달러 대신 IMF가 사용하는 화폐 SDR을 기축통화로 사용하자고 주장했고, 미국은 이에대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반박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유로화와 위안화가 달러의 대안이 될 것이라는 지적까지 나오면서 국제금융체제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유럽재정위기가 상황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당시 17개국 공통통화 유로화 사용국인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 등이 재정위기의 핵심으로 지목되면서 유로화 가치가 추락했고, 기축통화로서의 유로화 이미지에 상당 부분 손상이 간 것이었다. 그 결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한때 주창했던 통화체제개편이 사실상 무산되었고, 그사이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정상화에 성공한 미국이 달러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며 다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움직임이 관찰되고 있다. 중국이 나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이라는 국제금융기구 설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겉으론 지배구조 문제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속으론 IMF와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형성된 브레튼우즈 체제에 영향을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영국에 배신(?)을 당했다. 영국은 유로달러시장의 핵심국으로서 향후 위안화가 부상할 경우 유로-위안 시장도 만들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당연히 중국 주도의 움직임에 동참함으로써 향후 조성될 상황에 숟가락을 얹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AIIB가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많은 게 현실이다. 중국주도로 국제금융기구 하나가 설립된다고 해서 달러 위상이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위안화의 국제화가 갑자기 가속도를 내긴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은 아직 신흥국이다. 그래서 위안화의 기축통화 부상 여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한다.
미국은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일본이 시도한 아시아통화기금(AMFAsia Monetary Fund) 설립을 무산시킨 적이 있다. 무산이라기보단 아예 싹을 잘라 버렸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도 AIIB의 싹을 자르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출범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른 시간 내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지도 못할 것이다. 더 두고 봐야겠지만 대세를 역전시킬 정도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각에서 브레튼우즈 3.0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금 논의가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와 함께 조성되고 있는 ‘슈퍼달러’ 국면을 통해 미국은 달러의 위상을 회복시키고 미국주도의 국제금융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요동치는 국제금융시장 속에서 우리도 현명한 선택을 통해 국익을 꾀해야 할 때다.
윤창현 교수는…
▲1960년 충북 청주▲1979년 대전고 ▲1984년 서울대 물리학과 ▲1986년 서울대 경제학과 ▲1993년 미시카고대 경제학박사 ▲1993~1994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 ▲1995~2005년 명지대 경영무역학부 교수 ▲2005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2012년~2015한국금융연구원장 ▲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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