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KBS 드라마 ‘징비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징비록이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전란을 총지휘했던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란의 원인과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懲毖)란 중국의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뜻을 지니고 있다. 류성룡 역시 징비록 서문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에 대비하기 위한 기록이라고 밝혔다.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란의 앞뒤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에 다녀온 두 사신의 상반된 주장 이야기도 나온다. 전란의 조짐이 보이자 조선 조정에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복귀한 두 사람의 주장이 서로 달랐다.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일본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할 위인이 못 된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선조는 동인인 김성일의 의견을 따랐다.
위기를 예감하고 사신까지 파견했으면서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서인 측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선조의 큰 실수였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동인들의 세력이 커 당론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론 오랫동안 평화에 길들어 왔던 게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당시는 어떤 의미에선 태평성대였다. 고려 때까지도 빈번했던 이민족의 대규모 침입이 조선 건국 후에는 선조 대까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200년 동안이나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전란에 대한 대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쟁 준비는 여러모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생계를 잇기도 힘든 백성들을 모아 병과 훈련을 시키고 축성 및 성 보수공사도 해야 했다. 재정 지출이 늘어나 백성들의 불만이 쌓이는 일이었다.
이는 왕권에 대한 집착과 실권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선조에게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편안하고 유리한 소리에 귀가 기우는 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선조에겐 전쟁이 없을 거라던 동인들의 주장이 그랬다. 동인들 역시 일본의 위협을 인지하곤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이어진 평화에, 또 당파싸움에 시야가 흐려지고 말았다. 이렇게 맞아떨어진 선조와 동인 세력의 이해관계는 아는 바와 같이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평화가 평화를 지키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 꼴이었다.
기업 경영 활동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발견되곤 한다. 회사가 잘나갈 때 어떤 문제점이 발견되면 조정이나 해결에 미온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문제를 안고도 이렇게 수익을 잘 내고 있는데 굳이 뭘 바꿔서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골치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간 명멸해간 수많은 기업의 치명적인 문제들이 그 회사가 가장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때에 잉태된 것도 이런 현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경영전략 강사이자 저술가인 짐 콜린스 Jim Collins는 2001년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해 많은 화제를 몰고 온 인물이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경영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화제로 떠올랐다. 짐 콜린스가 책에서 선정한 세계 최고의 기업 11곳 중 절반 이상이 책을 출판한 지 6년 이내에 망했거나 거의 망할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꼽은 곳 중 절반 이상이 몇 년도 안 돼 빠르게 하향세를 걷자 짐 콜린스는 2007년부터 다시 저술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9년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How the mighty falls)’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앞서 자신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기업들이 후에 어려움을 겪은 원인을 분석했는데, 그 내용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았다. 이 기업들은 가장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때에 발견한 경영상의 문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경향이 있었다. 심각하다고 인지한 문제들의 해결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런 전철을 밟은 기업 중 가장 유명한 예가 노키아 Nokia다. 현재는 애플과 삼성이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스마트폰 이전의 피처폰 시장에서는 노키아가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조차도 삼성은 절대 노키아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노키아는 불과 수년 만에 그 명성만 남고 말았다. 휴대폰 시장의 대세가 스마트폰으로 이동하고 있는 와중에도 노키아는 피처폰 개발에만 연연하며 시장 변화에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재밌는 사실은 노키아가 스마트폰 기술 일부를 경쟁사들보다 먼저 개발했고 따라서 시장 변화에 대처할 시간도 충분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노키아는 안일한 대처에 머물고 말았을까? 그 이유는 피처폰 성공에 취해 시장 변화라는 불확실하고 달갑지 않은 상황을 애써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편한 대처는 대비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인데 노키아가 딱 그랬다.
노키아는 자신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피처폰 시장이 있는데 굳이 스스로 피처폰 시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스마트폰 개발에 나서는 것을 마땅찮게 생각했다. 이렇게 노키아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 애플과 삼성이 스마트폰을 출시하면서 빠르게 휴대폰 시장을 잠식해나갔다. 스마트폰이 휴대폰 시장의 대세가 되자 노키아도 뒤늦게 부랴부랴 스마트폰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기술 발달 속도가 워낙 빠른 시장이다 보니 ‘아차!’ 하는 순간에 휴대폰 제왕 노키아가 패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런 예들은 세계 기업 경영사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비싸고 덩치가 큰 SUV 차량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로 원유 가격이 급락해 연비가 자동차를 고르는 주요 고려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 회사는 작고 기름을 덜 먹는 값싼 일본 차들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들의 오만은 국제 유가가 대세 상승할 때에도 계속됐다. 이들은 1배럴에 20달러대였던 국제 유가가 140달러까지 치솟아 연비가 자동차를 고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 후에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일본 차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밀리고 난 후였다. 그 후 이들 회사에 불어닥친 위기와 이로 인한 구조조정은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일본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브라운관 TV의 최강자였던 소니는 LCD나 PDP 기술이 도입되던 때에도 여전히 브라운관 TV에 집착했다. 노키아처럼 자신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브라운관 TV시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삼성이나 LG, 파나소닉 등이 주력상품을 브라운관에서 LCD 및 PDP로 바꿔 TV시장 점유율을 급격히 늘려나갈 때에도 소니는 브라운관 TV에만 집중했다. 결국, 소니는 세계 TV시장 점유율이 10% 미만으로 주저앉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사례들에 비춰보면 ‘미래 성공의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는 과거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듯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위인이 종종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에서 크게 실패하는 이유도 과거 자신의 성공 경험을 과신하고 현재에 안주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환경과 조건이 끊임없이 변하는데도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안일하게 대처하다 뜻밖의 실패를 경험한 것이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과거의 성공에 취해 있어선, 또 현재에 안주해 있어선 위기를 맞이하기가 십상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이 회사가 잘나가는 순간에 종종 ‘위기’를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사업 성공으로 대약진하고 있던 2010년대 초반 “5~10년 후면 삼성이라는 기업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며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델 컴퓨터를 창업했던 마이클 델 Michael Dell도 “나노 초(Nano Second)만큼만 성공을 즐기고 다시 전진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이 속한 기업이 현재 전성기를 맞고 있다면 바로 지금이 우리 회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할 순간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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