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신(사진) 한국경제연구원장은 18일 한국 기업들이 처한 위중한 현실에 대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비용·기술 등에서 경쟁 기업들에 비해 갈수록 밀리면서 일시적인 위기가 아닌 '구조적인 위기'에 빠졌다고 강조했다.
권 원장은 "한국 경제에 병이 난 상황에서 정책결정권자들이 책임지고 4대 성역 규제 개혁, 좀비기업 퇴출 등 근본적인 처방을 내놓아야 하는데 '연명'에만 신경 쓰고 있다"며 "목숨(職)을 걸고 일하는 공무원이 없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이 상황 변화에 대응해 산업재편에 나설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제도를 개선해주고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 원장을 서울 여의도 한경연 집무실에서 만나 최근의 화두를 들어봤다.
권 원장은 우리 기업이 처한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그리고 현금장사하는 대형 유통업체들을 제외하고는 30대 기업 중 제대로 돈을 버는 곳이 없어요. 그나마 삼성전자가 선전하고는 있지만 하드웨어 제조업 위주입니다. 이에 반해 애플·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정보통신(IT) 기업들은 소프트웨어에서 고수익을 내고 있어 삼성과는 차이가 커요. 삼성전자가 제조업만으로 1위 자리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현대차 역시 매년 반복되는 노사 갈등으로 현 상태로는 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간판업종이었던 철강·조선·석유화학은 이제 공급 과잉으로 구조조정 대상이 돼 오히려 우리 경제의 부담요인이 되고 있어요."
특히 중국 기업들의 추격은 한국 산업 기반을 잠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권 원장은 "중국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산업구조 재편이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면 이를 중국이 조립·가공해 해외에 수출하는 식이었는데 이제 중국이 저임금과 기술력을 앞세워 중간재 생산역량을 급속하게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같이 서서히 식어가는 한국 경제의 엔진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4대 성역 규제를 수술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이와 동시에 좀비기업들은 과감하게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 원장은 수도권, 중소기업 보호, 대기업, 환경 등과 관련한 규제를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정부와 정치권이 건드리지 못하는 '4대 성역 규제'로 지목했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이 되면 총 240여개의 규제를 받게 됩니다. 이 같은 규제는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중소기업의 숫자만 늘려 결국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와 기득권 중소기업에 대한 보호를 늘리다 보니 균형 잡힌 산업발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경제를 인체에 비유하면 중견기업과 대기업이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다"며 "우리나라는 대동맥은 얼마 안 되고 실핏줄만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기형적인 구조"라고 진단했다. 기업의 숫자로 보면 현재 중견기업과 대기업을 합친 숫자 대비 중소기업 수가 0.1대99.9 수준이다. 이에 반해 독일은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숫자 비중이 10%, 중소기업이 90% 수준이다. 권 원장은 "나도 해봤지만 공무원은 규제가 있을수록 좋다"며 "그러나 이제는 공무원들이 판단해서 기업들한테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고 지시하는 것은 전근대적 사고이며 공무원들 손에 규제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권 원장은 갈수록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좀비기업에 대한 구조조정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공무원들이 부실기업 정리하려고 하면 그 기업과 원수가 되고 국회의원 압력 때문에 힘들어요. 또 정권이 바뀌면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손에 피를 안 묻히고 후임자에게 이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청와대와 정부부처의 수장 등이 총대를 메고 비난을 받더라고 구조조정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아서 신속히 구조조정에 나서야 합니다."
권 원장은 특히 신용보증제도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신용보증제도를 통해 10~20년씩 연명하는 부실기업이 많다"며 "창업 초기 어려울 때 한 5년 정도 정부가 지원해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 해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실기업에 들어가는 정책자금을 끊고 이를 벤처기업으로 돌려야 유망한 신사업이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에 대해서도 과감한 변신을 주문했다. 그는 기존 제조업으로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 첨단산업으로 변신한 제너럴일렉트릭(GE)과 소프트뱅크를 예로 들었다. 권 원장은 "GE의 경우 지난 15년간 제프리 이멀트 회장이 1,000억달러어치 회사를 팔고 샀다"며 "그 과정을 통해 GE는 가전회사에서 첨단 제조업과 소프트웨어 등으로 사업 업종을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제조업체들도 적극적인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신사업으로 재편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제는 정부가 기업들이 산업재편을 위해 과감한 M&A에 나설 수 있도록 세제와 행정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위해 사업부와 자산을 사고팔 때 막대하게 부과되는 세금이 대표적인 걸림돌이다.
"오래된 사업을 팔다 보니 매도기업 입장에서는 양도세가 어마어마하게 나오고 매수기업 입장에서도 취득세와 등록세 부담이 커요. 당장 세금이 수백억, 수천억원씩 나오다 보니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위한 M&A를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사업을 전환할 때 이 같은 세금 부담을 줄여주고 행정 절차를 간소화해줘야 합니다."
권 원장은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해서라도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원샷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와 시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회에 계류 중인 '원샷법'이 기업에 대한 특혜라는 이유로 심의가 계속 늦어지고 있다"며 "가급적 빨리 국회를 통과시켜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사업재편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He is… △1949년 경북 영천 △1972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2년 미국 밴더빌트대 경제학 석사 △1976년 행정고시 19회 합격 △1989년 대통령비서실 재정금융행정관 △1991년 재무부 경제협력과장 △1998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비서실장 △2004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정책비서관 △2005년 재정경제부 제2차관 △2009년 국무총리실장(장관급) △2011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 △2014년~ 한국경제연구원장 |
경직된 노사문화·임금체계 바꿔야 산업활력 되살아나 이혜진기자 |
/정리=유주희기자 ginger@sed.co.kr
사진=권욱기자
/대담=이혜진 산업부 차장 has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