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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조태권 광주요그룹 회장

“도자기·소주·한식 사업 매진으로 한국 전통 문화 세계화 앞장선다”


부친으로부터 도자기 사업을 물려받은 뒤 고집스럽게 ‘우리 것’을 고수해 온 광주요그룹 조태권 회장. 그런 그가 ‘전통문화의 고급화’를 위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조 회장은 자신이 키워낸 도자기에 품격을 더하기 위해 증류식 고급 소주 ‘화요’를 만들고 한식 레스토랑 ‘비채나’도 운영하고 있다.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서울 한남동 비채나에서 만난 조태권 회장(67)은 60대라곤 여겨지지 않을만큼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굵은 얼굴 선에서 강한 인상이 느껴졌다. 도인에 가까운 풍모였다. 비채나는 광주 요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고급 한식당이다. 일반 한정식집과 달리 세련되고 현대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광주요그룹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점이 여럿 있었다. 광주요는 원래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회사다. 그런데 이 회사는 증류식 고급 소주 ‘화요’를 만들고 있다. 게다가 고급 한식당까지 운영하고 있다. 왜일까? 조태권 회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 회장은 대단한 달변가였다. “광주요가 만든 도자기는 원래부터 고급이었습니다. 비싸다보니 국내에 수요가 별로 없었죠. 영업하려고 선진국을 다니다 좋은 음식과 술이 있어야 이를 담을 고급 도자기 수요가 생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음식과 술이 받쳐줘야 결국 도자기도 큰다는 걸 안 거죠. 식문화가 고급으로 발전하면 거기에 어울리는 그릇도 더불어 발전한다는 거죠.” 꽤나 솔직하고 담백한 답변이었다.

광주요는 이미 프리미엄 도자기로 명성을 얻은 회사다. 청와대는 물론, 국내 주요 정상급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광주요 도자기를 사용하고 있다. 2003년 시장에 선보인 ‘화요’도 입소문을 타면서 실적이 급상승 중이다. 국내 도자기 업계가 전반적인 불황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광주요는 지난해 약 18%의 매출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120억 원대였던 광주요그룹의 매출이 2007년에는 50억 원까지 추락했다. 유럽산 고가 브랜드와 저가 중국산 사이에 끼였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광주요는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고 있을까. 해외 명품 도자기 브랜드의 국내 판매에 맞대응하고 국내 도자기 업계의 오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올 3월부터 해외 소비자들을 겨냥한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다. 조 회장은 “최근 미국, 영국 등 해외에서 광주요 제품을 구매하고 싶다는 문의가 많아지고 있다”며 “광주요 디자인연구소가 해외시장에서 통할 만한 제품을 만들어 (온라인 쇼핑몰을)수출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해외 온라인 쇼핑몰을 오픈한 건 국내 도자기 업체 중 광주요가 처음이다. 잘 깨지는 등 파손 위험이 큰 도자기 특성을 고려해 배송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이를 위해 전문 배송대행업체와 계약도 체결했다. 결제 시스템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온라인 가상계좌 시스템 ‘페이팔’을 선택했다. 조 회장은 말한다. “해외시장을 겨냥한 온라인 마케팅 분야도 대폭 보강하려고 합니다. 검색엔진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도 주력할 계획이고요. 올해 매출 목표는 지난해의 2배 이상인 500억 원으로 잡고 있습니다.”


가업을 잇다
조태권 회장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인 고( 故) 조수소 선생이 사업가여서 어린 시절 유복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 조 회장이 경기중학교 2학년 때 5 · 16이 일어났다. 부친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집안은 삽시간에 거덜이 났다. 조 회장은 “당시 아버님은 한국에 일제 ‘내쇼날’ 제품을 제일 먼저 갖고 들어왔던 분이셨다”며 “결국 있던 재산 다 날리고 일본으로 가셨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날아간 부친은 우리 도자기인 청화백자를 되살리는 작업에 매달렸다. 조 회장의 부친은 청화백자 제작술을 보유한 늙은 기술자를 찾아내 우리 도자기를 살려냈다. “아버님이 1963년 경기도 이천으로 돌아오셔서 광주요를 창업했어요. 그때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도자기를 판매하기 시작하셨죠.”

조태권 회장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미주리 대학교 공업경영학과를 다녔다. 1974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대우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입사 후 얼마 안 돼 아프리카와 유럽 지사장에 발탁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특명을 받아 방위산업 영업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광주요를 경영하던 부친이 1988년 별세했다. 조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머니께서 저에게 ‘너는 막내지만 여유가 있으니 가업을 이어다오’라고 당부하셨어요. 당장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이 드는 일이지만 언젠가는 빛을 볼 거라고 말씀 하셨죠. 어머니가 많이 원하셔서 기쁘게 해드리려고 광주요를 맡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광주요 운영에 매진했다. 그러나 돈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무엇이든 대충하는 건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선친에게서 듣고 배운 도자기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을 돌아다녔다. 귀동냥 눈동냥해 얻은 정보에 자신의 감각을 보태 새로운 도자기 제작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도공들과 함께 박물관을 순례하면서 질 좋은 도자기가 어떤 것이지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청자 · 백자 · 분청사기 등의 제조 기법을 되살릴 수 있었다. 10년 이상 경력을 지닌 장인들이 수작업한 광주요를 내놓을 수 있었다.


가치를 회복시킨 우리 도자기
당시만 해도 값비싼 광주요 도자기는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수시장 개척에 힘을 쏟았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국내 경제 수준으론 판매가 어려울 거라고 만류했지만, 저는 고집을 꺾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도자기라면 국내에서 먼저 환대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도자기가 ‘모셔놓고 구경만 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생활에서 밥과 국을 담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본래 도자기가 지닌 가치를 회복하는 길이라 판단했다. 물론 우리 도자기의 품격이 떨어지면 안된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철칙이었다. 그래서 수작업을 통한 소량생산을 고수했고 철저하게 상류층을 겨냥했다. 4인용 도자기세트가 최저 200만 원에서 최고 1,000만 원까지 호가했지만, 철저히 품질을 높였기에 알음알음 명성이 퍼져나갔다.

내로라하는 재력가와 명문가에서 광주요의 그릇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VIP마케팅을 고집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의 모든 문화는 왕족문화나 귀족문화에서 출발했습니다. 처음엔 그 나라 특수층을 위해 존재하다가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대중에게 퍼져나가게 된 겁니다. 문화는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아주 비싼 사치품이 돼야 대중의 선망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왕실과 귀족의 전유 문화였던 클래식과 오페라가 세계적인 공연시장을 만든 게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어요.”

그는 상류층 공략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이번에는 일반 대중을 겨냥한 시장으로 사업영역을 넓혀나갔다. 투박하지만 정이 넘쳐나는 사발문화를 다시 되살려 대중브랜드 ‘아올다’를 내놓았다. “일부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기계를 도입해 사발 하나에 5,000~7,000원대로 가격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음식은 우리 사발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같은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어요.”


한식 세계화 전도사 되다
그는 도자기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조 회장은 말한다. “도자기 강국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가 균형 있게 발전한 선진국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릇과 음식, 술 등이 등급별로 만들어져 있어 서로 어울리는 ‘명품’이 있더군요. 제가 우리 음식문화의 세계화를 부르짖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를 둘러 싼 사건 중 2007년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한 이벤트도 눈에 띈다. 바로 ‘나파벨리 만찬’이다. 조태권 회장은 미국 포도주 업계 대표와 음식 전문가 60여 명을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초청해 저녁 만찬을 대접했다. 그는 만찬을 위해 백자 사발, 백자 사각 테이블매트, 청자 접시, 불고기 내열 자기, 4단 찬합, 밥그릇 등 도자기 1,000여 점을 따로 구워 비행기에 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 회장은 당시 “홍삼 달인 물, 닭 육수, 생선회와 함께 나갈 초고추장, 간장, 후식으로 나갈 약차 등 핵심 음식재료도 한국에서 들고 갔다”고 말했다.

여기에 당시 운영했던 고급한식당 ‘가온’ 의 요리사 6명도 데리고 갔다. 저녁 한 끼 행사에 경비만 1억6,000만 원이 들어갈 정도였다. 조 회장은 말한다. “이 나파밸리 만찬을 계기로 국내에 한식 세계화라는 화두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한국 식문화 모델을 만들기 위해 60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모두 미쳤다고들 얘기하죠.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한국 식문화야말로 세계 시장에서 먹힐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라고요.”

그가 2003년 ‘화요’를 출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막상 잘 차려놓은 음식을 보니 뭔가 허전하게 비어 보이는 자리가 있더란다. 그는 고급 한정식에 와인을 갖다 놓는 건 왠지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일본 청주나 중국 고량주를 갖다 놓을 순 없지 않은가’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물려받은 가업이나 조용히 경영할 것이지 무모한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의 도전으로 한식에 대한 편견과 고정 관념이 깨지기 시작했고, 우리의 문화가 명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3만 원짜리 파스타를 사 먹고 10만원짜리 초밥을 먹으면서, 한식은 1만 원만 돼도 비싸서 안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며 “왜 우리 문화만 서민적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조 회장은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식문화는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단절됐습니다. 전쟁통에 식당 운영하는 사람들이 술장수로 터부시됐거든요. 그러다 보니 돈 있는 사람들이 투자를 안 했죠. 때문에 음식점 하는 사람들이 가치경쟁 대신 다들 질을 낮춰 가격경쟁만 하고 있습니다.”

돈 가진 사람들이 고급음식점을 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제가 15만 원짜리 음식을 만들어 성공하면 남들이 10만 원, 5만 원짜리 만들어 팔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생깁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기업들이 한식 문화 발전을 위해 음식점을 했으면 좋겠어요. 정부도 한식을 국책산업으로 만들어서 키워야 합니다.” 대중문화를 살리려면 고급문화가 있어야 하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폭이 커져야 문화가 전반적으로 발전할 것이란 얘기다. 조태권 광주요그룹 회장이 전통 도자기 ‘광주요’에 이어 고급 증류주 ‘화요’, 고급 한식당 ‘비채나’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 온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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