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사로 경영에 복귀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외 사업장을 방문하며 본격적인 경영 참여를 위한 숨 고르기에 나선 모양새다. 최태원 회장이 생각하는 그룹 경영 정상화의 밑그림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업계에서는 SK그룹의 효자 계열사 ‘SK하이닉스’가 핵심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총수의 부재 가운데서도 ‘나 홀로 성장’을 이어온 SK하이닉스는 최 회장의 든든한 지원 속에 또 다른 도약을 준비 중이다.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선제적으로 투자 시기를 앞당기고 규모를 확대하는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투자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지난 8월 17일, 사면 출소 후 첫번째 확대 경영회의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이 한 말이다. 짧지만 강한 어조의 이 한마디는 향후 최 회장 중심으로 진행될 SK그룹의 전략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업의 총수는 최고 의사결정권자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부재는 기업의 투자심리 위축으로 이어진다. 막대한 비용이 투자되는 기업 인수·합병(M&A)이나 대규모 설비 확충을 위한 투자는 자연스레 감소한다. SK그룹 역시 최 회장의 공백 이후 공격적인 투자에 난항을 겪어왔다. 실제로 최 회장 공백 직전인 지난 2012에 SK그룹은 약 15조 원에 달하는 금액을 대규모 투자나 M&A에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경영 공백이 본격화된 2013년 이후에는 13조?14조 원 수준에 그쳤다. SK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KT 렌터카, 호주 유나이티드 페트롤리엄(UP), ADT캡스 등의 기업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신 것도 최 회장의 경영 공백 때문이라는 것이 대다수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이를 고려한 듯 최 회장은 출소 이후부터 경제 활성화, 그리고 SK의 경영 정상화를 위한 공격적 투자를 수차례 강조해왔다. 최태원 회장은 “경제 활성화라는 국가과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투자 조기 집행을 통해 경제 활성화를 달성하고, 양질의 청년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대규모 투자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발언이 이어지면서 업계에선 과연 최 회장이 생각하는 투자의 밑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관측을 쏟아냈다. 그리고 해답을 얻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SK그룹의 효자, 반도체 기업 ‘SK하이닉스’였다. 그렇다면 왜 SK하이닉스였을까?
우선 최 회장의 부재로 흔들렸던 다른 계열사와 달리 SK하이닉스는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해왔다. 현재 SK그룹의 3대 주력사업은 SK텔레콤이 담당하는 통신 분야, SK이노베이션이 운영하는 에너지 분야, 그리고 SK하이닉스의 반도체 분야다. 하지만 통신과 에너지 사업은 모두 어닝쇼크 수준의 실적 하락을 기록했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지난해 37년 만에 적자를 기록했고, SK텔레콤도 시장 점유율 하락과 몇 번의 영업정지 속에 부진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총수의 경영 공백이 가시화된 지난 2013년부터 2년여간 영업이익 합계 8조4,000억 원을 기록했다. 특히 지난해 SK하이닉스는 5조 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냈다. 이는 SK하이닉스 역사상 최대 영업이익이자 SK그룹 출범 이래 단일 계열사가 거둔 최대 영업이익 기록이었다. 선제적 기술 개발과 혁신적 제품을 통해 주요 경쟁사 추격을 따돌리고 글로벌 3대 반도체 기업으로서의 입지도 탄탄히 굳혔다.
SK하이닉스에 대한 최태원 회장의 각별한 애정도 빼놓을 수 없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는 ‘ 미운 오리 새끼’ 였다. 수차례 갖은 부침을 겪으며 휘청였던 하이닉스는 누구도 사려 하지 않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당연히 최태원 회장이 처음 하이닉스 인수 의사를 밝혔을 때도 내부에선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셌다. 하지만 최 회장은 뚝심 있게 하이닉스 인수를 밀어붙였다. 결과적으로 하이닉스 인수는 최 회장의 기대대로 SK그룹의 새로운 ‘퀀텀 점프(Quantum Jump·대약진)’의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한 M14 공장 준공식
“SK하이닉스의 역사는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역사였습니다. 구성원들의 열정과 혼으로 질곡의 시간들을 극복해내고 마침내 세계 2위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자 반도체 코리아의 수출 역군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내일을 향한 위대한 도전’에 나서고자 합니다. 결전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와 긍지를 가지고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만들어나갑시다.”
지난 8월 25일 SK하이닉스 이천 본사에서 열린 ‘M14 공장 준공 및 미래 비전 선포식’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은 강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국내 경제 활성화, 그리고 SK그룹의 경영 정상화를 위한 출발의 중심에 SK하이닉스가 있음을 강조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그는 파격적인 청사진도 내놓았다. SK하이닉스가 향후 10년 동안 M14 공장을 포함해 반도체 공장 3개를 새로 짓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총 46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M14공장 건설에 15조 원, 경기도 이천과 충청북도 청주에 추가 건설할 공장 2개에 31조 원을 투입한다. 특히 M14공장의 경우, 완공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M14 공장은 55조 원의 생산유발과 21만 명의 고용창출을 일으킬 것으로 분석됐다.
SK하이닉스에 대한 투자는 그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SK하이닉스는 SK그룹에 편입된 직후부터 막대한 금액을 설비증설에 투자했다. 2012년 3조8,501억 원을 시작으로 2013년 3조5,650억 원, 지난해에는 무려 5조2,150억 원을 투자했다. 지난 상반기에 집행한 투자금액은 총 3조7,520억 원으로, 업계에선 올해 총투자금액이 약 7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 같은 투자는 고스란히 SK하이닉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대규모 투자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M14 공장 준공 및 미래 비전선포식에는 단일 기업 준공식으로는 이례적으로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SK그룹이 이번 준공식에 박 대통령을 초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집니다. 최 회장 역시 사면 이후 꾸준히 창조경제와 일자리 창출을 언급하며 정부 정책에 보폭을 맞췄죠. 그룹 입장에서도 최회장의 경영 복귀를 알리는 첫 공식 행사를 조금 더 의미 있게 치르기 위해 박 대통령 초청을 위한 물밑접촉을 꾸준히 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현 정부의 당면 과제인 ‘ 경제 살리기’ 를 위한 최 회장 전략의 중심에 SK하이닉스가 있다는 의지를 제대로 피력한 셈이 됐죠.”
준공식뿐만이 아니었다. 사면 출소 후 이어진 최 회장의 광폭 행보의 중심에도 SK하이닉스가 있었다. 최태원 회장의 첫 글로벌 행보는 중국 장쑤(江蘇)성에 위치한 SK하이닉스 우시(無錫)공장 방문이었다. 우시 공장은 SK하이닉스 전체 D램 생산량의 50%가량을 담당하는 중요한 생산기지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의 우시 공장 건설이 ‘ 글로벌 반도체 톱( Top)3’ 로의 도약을 이끈 ‘ 신의 한 수’ 라고 평가한다. 특히 우시는 중국 내에서 ‘리틀 상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글로벌 기업의 전진기지로 각광 받고 있는 도시다. 60여 개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의 현지 법인이 자리 잡고 있는데, SK하이닉스(당시 하이닉스)는 지난 2004년 8월 중국 공장 설립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지난 2006년부터 첫 생산을 시작했다. 현재 SK하이닉스 우시 공장에선 20나노급 공정의 PC, 서버, 모바일, 그래픽 D램을 주력 생산하고 있다. 최 회장은 우시 공장 방문 당시 “향후 우시 공장을 SK하이닉스뿐아니라 한국 반도체 수출의 글로벌 전초기지로 성장시킬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지난 9월 초에는 대만을 방문해 훙하이그룹의 궈타이밍 회장을 만나 전방위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궈타이밍 회장과의 만남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훙하이그룹의 자회사인 팍스콘(Foxconn) 때문이다. 팍스콘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글로벌 최대 규모의 주문자 상표부착생산(OEM) 회사다. 현재 애플의 아이폰, 중국의 샤오미, 블랙베리 스마트폰 등을 생산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만남이 팍스콘과의 협력을 통한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사업 영역 확장으로 이어질지 주목하고 있다. 팍스콘은 지난 5월 SK그룹의 IT서비스 사업을 전담하는 SK C&C와 총 720억 원을 투자해 합작법인 ‘FSK홀딩스’를 설립했다. 합작법인의 주력 분야는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 공장 내 모든 설비에 센서를 부착해 원격 조종할 수 있는 공장)로서, 통신모듈에 탑재되는 반도체 공급을 SK하이닉스를 통해 진행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낸드플래시’사업 확대에 강력한 드라이브
SK하이닉스도 최태원 회장의 공격적 투자 결정에 화답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핵심은 낸드플래시(Nand Flash, 전원이 없는 상태에서도 데이터를 계속 저장할 수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다. 사실 낸드플래시 시장 공략은 SK하이닉스의 해묵은 숙제 중 하나다. 현재 SK하이닉스의 주력 품목은 크게 메모리반도체인 D램과 낸드플래시로 나뉜다. 성과는 극명히 엇갈린다. D램의 경우, 삼성전자에 이어 글로벌 시장 점유율 2위를 달리고 있다. D램의 영업이익률 역시 전체 D램 매출 대비 40%에 달한다. 반면 낸드플래시는 여전히 삼성전자, 도시바, 마이크론에 이은 글로벌 순위 4위에 머물러 있다. 무엇보다 SK하이닉스 전체 매출의 70% 이상이 D램에 쏠려 있다. D램에 편중된 매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의 분발이 필요하다.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 역시 지난 3월 주주총회에 참석해 “앞으로 낸드플래시를 SK하이닉스의 주력제품으로 삼을 것”이라며 “인수합병과 기술제휴 등 투자를 늘려 사업 경쟁력을 키우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우선 3D V낸드 2세대(36단) 128Gb 멀티플레벨셀(MLC) 제품의 개발을 3분기 이내에 완료하고 소규모 생산에 들어갈 방침이다. 이어 트리플레벨셀(TLC) 기반의 3세대(48단) 제품도 연내 개발을 완료하고 솔리드에스테이트드라이브(SSD, 낸드플래시를 적용한 저장장치로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빠르고 발열·소음·전력 소모가 적은 차세대 저장장치) 등에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특히 대다수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기존 평면 낸드플래시보다 한 단계 진일보한 3D 낸드플래시 출시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한다. 3D 낸드플래시는 낸드플래시를 구성하는 메모리 셀을 수직으로 겹겹이 쌓아올려 기존 평면 낸드플래시의 단점으로 꼽히던 데이터 간섭 현상을 차단한 제품이다. 기존 낸드플래시보다 속도와 내구성은 높고, 소비 전력은 적어 글로벌 반도체 업체 간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미 삼성전자는 지난해 중국 시안에 3D 낸드플래시 전용공장을 지었다. 이곳에서는 현재 월 4만 장 가량의 3D 낸드플래시를 생산 중이다. 경쟁사인 도시바와 마이크론 역시 연내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내년부터 기존 청주 공장에서 3D 낸드플래시를 본격 생산할 계획이다. 다만 기존 공장의 대다수 설비가 평면 낸드플래시용으로 생산 효율이 떨어지는 만큼 향후 청주에 추가 건립할 예정인 신공장은 3D 낸드플래시 제조 설비를 중심으로 운영될 전망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박성욱 사장이 최근 최태원 회장을 개별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낸드플래시 사업 확장을 위한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안다”며 “최 회장으로서도 반도체 분야가 그룹 경영 전략의 최대 현안 중 하나인 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SK하이닉스에 대한 최태원 회장의 적극적인 투자는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대규모 투자로 인한 성과가 단시간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불황일수록 투자하라’는 반도체 시장의 격언처럼 장기간에 걸친 투자는 반도체 시장 활황기에 빛날 수 있다. 최태원 회장은 경영 일선 복귀 전면에 자신이 인수하고 키워온 SK하이닉스를 내세웠다. SK하이닉스가 최 회장의 기대에 부응하며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리딩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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