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삼성전자라면, 한국 최고의 호텔로는 호텔신라를 꼽을 수 있다. 두 기업은 모두 삼성그룹 계열사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호텔신라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녀 이부진 사장이 이끌고 있다. 지난 2010년 말 호텔신라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이부진 사장은 적극적인 사업 확장을 바탕으로 ‘글로벌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환대, 접대) 명문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지난 10월 14일 오후 3시 무렵. 서울의 관광명소인 남산 자락에 고즈넉하게 위치한 서울신라호텔은 서서히 무르익어가는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호텔 1층 로비에는 한가로이 휴식과 대화를 즐기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호텔 바로 옆에 위치한 신라면세점은 쇼핑에 나선 손님들로 활기가 넘쳤다. 관광버스도 여러 대가 주차해 있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한국을 대표하는 호텔’을 표방하며 설립한 호텔신라는 한국 최고의 관광지인 서울과 제주에 각각 서울 신라호텔과 제주신라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호텔신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특급 호텔로도 유명하다. 특히 세계 각국의 정상들과 명사들이 한국을 찾으면 투숙하는 호텔로도 명성이 높다. 각종 국제행사가 개최될 때 VIP급 인사들의 숙소로 애용되기 때문이다.
이날 기자가 찾아간 서울신라호텔은 전통 기와 지붕을 적용한 건물 외관과 정문 앞에 소담스럽게 조성된 정원을 통해 한국의 전통미를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현대적이고 고급스러운 시설과 함께 고객을 배려하는 세련된 서비스는 한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호텔로서 손색이 없었다. 서울신라호텔 고객들은 1층 로비를 드나들 때 커다랗고 널찍한 자동식 회전문을 통과한다. 이 회전문에는 한 가지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얽혀 있다. 주인공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다.
지난해 2월말 어느 날 80대 고령의 택시기사가 운전 부주의로 서울 신라호텔 출입구인 회전문을 들이받는 사고가 났다. 회전문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파손됐다. 피해액 규모는 5억원에 달했다. 사고에 대한 보고를 받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택시기사의 가정형편을 살펴보도록 한 다음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피해액 변상을 면제해준 것이다. 사고를 낸 택시기사가 고령인 데다 생활이 어려운 점을 헤아린 결단이었다.
사회적 약자 헤아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세간에서는 이부진 사장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 ige: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부진 사장은 재벌가 오너 자녀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소적인 통념을 완화하는 데도 적잖이 기여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2001년 호텔신라에 입사했다. 처음 기획부 부장을 맡아 회사 경영 전반을 파악하기 시작한 그는 2004년 경영전략 담당 상무보, 2005년 경영전략담당 상무, 2009년 경영전략담당 전무를 거쳐 마침내 2010년 12월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그가 거친 직책을 보면 최종적으로 최고경영자가 되는 코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애초부터 장녀에게 호텔신라 경영을 맡길 생각이었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국내 기업 오너들은 자녀의 자질 유무나 능력 여부와 관계없이 경영권을 물려주는 사례가 허다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은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삼성도 그런 사례에 포함된다.
이부진 사장 역시 2001년 입사 후 10년간 경영수업 과정을 밟았다. 사실 경영수업을 받는 동시에 스스로 경영자 자질을 입증해나간 기간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가 주도해 호텔신라의 면세유통 사업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것을 들 수 있다.
이부진 사장이 처음 호텔신라에 입사한 2001년과 2014년의 경영실적을 비교해보면, 매출액이 약 4300억원에서 약 2조9000억원으로 6.8배 증가했다. 또 기업가치의 종합적인 지표 구실을 하는 주가는 2001년 6000원대에서 올해 10월 하순 기준 10만원대로 15배 이상 껑충 치솟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실적과 주가의 급상승을 견인한 핵심동력이 바로 면세유통 사업의 성장이었다는 점이다.
남옥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소비재팀장은 말한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비즈니스 감각과 인격을 함께 갖춘 경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영자로서의 ‘퍼포먼스’는 그동안 호텔신라가 달성한 실적이 증명하고 있죠. 특히 면세유통 사업의 외형을 굉장히 크게 키우고, 나아가 해외 진출을 통해 글로벌화에 성공한 것은 대단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CEO로 취임한 후 호텔신라 주가가 크게 오른 것도 그만큼 자본시장에서 호텔신라의 기업가치를 높게 본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부진 사장은 메르스 사태 여파로 중국인 관광객 유입이 급감했을 때 직접 중국을 방문해 한국 관광 홍보대사 역할을 하면서 국내 면세점 업계를 대표하는 경영자로서 사명감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면세점 업계 대표 경영자로 두각 나타내
호텔신라는 1986년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면세유통 사업에 처음 진출했다. 호텔 사업과 면세유통 사업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특히 ‘관광’을 매개로 한 시너지 창출 효과가 크다. 호텔과 면세점 양쪽 모두 관광객들이 주된 고객층이기 때문이다.
호텔신라의 면세유통 사업 진출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부진 사장은 경영참여 이후 면세유통 사업에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 결과 호텔신라의 면세유통 사업은 현재 회사 전체 매출액의 90%에 달할 만큼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호텔신라 면세유통 사업의 급성장은 공격적인 면세점 출점 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는 평가다. 호텔신라는 지난 수 년간 인천국제공항 면세점(2008년), 김포국제공항 면세점(2011년),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면세점(2014년), 마카오국제공항 면세점(2014년) 사업권을 잇달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올해는 서울 지역 시내면세점 신규 사업자로 선정되는 개가도 올렸다. 국내 재계에서 삼성가(家)와 쌍벽을 이루는 현대가(家)의 현대산업개발과 합작법인(HDC신라면세점)을 설립하는 전략적 승부수를 던져 얻어낸 결실이었다.
세간에서는 호텔신라와 현대산업개발의 합작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재계 라이벌 가문이 서로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다. 호텔신라측은 “호텔신라의 글로벌 면세점 운영 경쟁력과 현대산업개발의 복합개발 능력 및 입지를 결합해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합작법인을 설립했다”고 설명한다.
실제 두 기업의 합작은 각자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절묘한 한 수였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물론 호텔신라가 현대산업개발과 합작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최종 의사결정은 이부진 사장의 몫이었다.
그의 비즈니스적인 감각과 과감한 결단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부진 사장은 지난 7월 9일 서울 시내면세점 신규 사업자 입찰 기업들의 프레젠테이션이 있던 날, 현장을 찾아 실무진에게 힘을 북돋워줬다. 이날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한 한인규 호텔신라 부사장에 따르면, 이사장은 “잘 되면 다 여러분 덕분이고, 떨어지면 제 탓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실무진을 격려했다. 결국 호텔신라는 치열했던 면세점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부진 사장이 면세점 입찰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실무진에게 건넨 응원의 말에는 그의 평소 생각과 성품이 드러난 것 같다”며 “잘 되면 여러분 덕분, 떨어지면 제 탓이라는 말은 그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부진 사장의 대표이사 승진 인사가 났을 때, 호텔신라 측은 이 사장의 공식 프로필 자료를 배포했다. 그 자료에는 이부진 사장에 대해 “무엇보다도 적극적이고 노력하며, 몰입하는 진지한 업무 자세가 능력과 자질을 갖춘 차세대 전문경영인으로 성장케 했다”는 대목이 있었다. 실제 호텔신라 주변에서 나오는 이부진 사장에 대한 평을 종합해보면, 그는 강한 승부근성과 열정을 가진 인물로 비친다. 그가 전무 시절에 세계 최고 명품 브랜드 중 하나인 루이비통을 인천국제공항 신라면세점에 유치하기 위해 발벗고 뛰어다녔다는 일화는 이부진 사장의 집념과 승부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이부진 사장은 다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소극적이라기보다는 성찰적이라는 의미가 강한 듯하다.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책을 매우 많이 읽는 독서가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끝까지 파고드는 몰입력이 남다르다고 한다.
주요 경영의사 결정 때는 과단성 선보여
그는 성찰적이고 신중한 성격이지만, 경영상의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는 과감하고 신속하다는 평가다. 지난 6월 ‘메르스 사태’의 불똥이 제주 신라호텔에 튀었을 때 즉각적으로 영업중단 조치를 취한 게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월 17일 저녁 무렵 호텔신라 측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로부터 메르스 확진자가 같은 달 초순 잠복기 상태에서 며칠 간 제주신라호텔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부진 사장은 보고를 받자마자 긴급조치 지시를 내린 다음 이튿날 아침에 바로 제주신라호텔로 달려갔다. 이 사장은 현장을 점검하고는 곧장 ‘영업중단’ 결정을 내렸다. 사실 보건당국은 ‘영업자제’를 권유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은 고객과 직원들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초강수를 던졌던 것이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말한다. “호텔업은 고객과 직원이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경우가 아주 많은 서비스업이죠. 여느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현장’이 중요한 업종입니다. 이부진 사장은 현장을 매우 중시합니다. 메르스 확진자가 제주신라호텔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을 때도 즉각 현장으로 내려가 직접 상황을 살펴봤기 때문에 신속한 결정을 내렸던 겁니다.”
흔히 PI(President Identity: 대내외적으로 비치는 최고경영자의 이미지)는 CI(Corporate Identity: 기업 이미지)와 함께 기업의 이미지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이부진 사장의 PI는 현재까지 성공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는 평가다. 택시기사 사고 변상 면제, 메르스 사태 신속 대응, 서울 시내면세점 사업자 선정 등 일련의 이벤트를 통해 이부진 사장은 세간에서 매우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게다가 호텔신라 최고경영자로서 경영실적과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데도 혁혁한 성과를 내고 있다. 그가 이끄는 호텔신라의 향후 행보가 더욱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텔신라 본업인 ‘호텔업’도 업그레이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회사의 뿌리인 호텔 사업 성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3년에는 서울신라호텔 전체 리모델링에 대규모투자를 한 데 이어, 프리미엄 비즈니스호텔 브랜드인 ‘신라스테이’를 처음 선보였다.
이부진 사장은 호텔 부문을 두 개 브랜드로 나눠 경쟁력을 강화해나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호텔신라는 한국 최고 럭셔리 호텔이라는 포지셔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신라스테이는 급증하는 중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 관광객을 흡수한다는 방침이다.
‘스마터 스테이(Smarter Stay)’를 표방하는 신라스테이는 합리적인 가격과 호텔신라 고유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비즈니스호텔이다. 2013년 ‘신라스테이 동탄’ 개관을 기점으로 역삼, 제주, 서대문, 울산, 마포 등 총 6개의 호텔을 열었다. 2016년에도 주요 거점 지역에 3개의 호텔을 추가로 개관할 계획이다.
이부진 사장은…
1970년 출생
2001년: 호텔신라 기획부 부장
2004년: 호텔신라 경영전략담당 상무보
2005년: 호텔신라 경영전략담당 상무
2009년: 호텔신라 경영전략담당 전무
2010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2014년~: 중국 시틱그룹 사외이사
2015년~: 삼성물산 리조트건설부문 경영전략담당 사장
수상 경력
2015년 포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아시아·태평양 지역 25인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