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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수필] 퇴임사장의 넋두리
입력1999-05-11 00:00:00
수정
1999.05.11 00:00:00
金容元(도서출판 삶과꿈 대표)비서(秘書)의 도움을 받아 지내던 높은 분들이 어느날 자리를 물러나고, 실사회에 홀로 나서면서 겪는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하철역에서 우왕좌왕 한다든지, 잔돈 준비 없이 시내버스에 올라탔다가 만원짜리 지폐를 들고 난처해 한다든지, 모처럼 해외여행에 혼자 나섰다가 마중나온 사람들과 엇갈려 어쩔 줄 몰라 했다든지, 좀처럼 밝히지 않아서 그렇지 별의 별 일이 다 많았을 것이다.
IMF사태이후 정부의 요직, 은행과 공기업의 간부, 대기업 사장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물러났다. 자동차 기사와 비서들이 뒤를 따라다니며 모든 시중을 다 들어 주던 사람들이다.
그런 생활에 오래 익숙했던 이들이 갑자기 바꿔진 처지에서 당황해 하는 모습은 어떤 영화의 한장면처럼 연상될 수도 있다.
가끔 이들끼리 모이면 체험한 얘기들을 나누며 웃음판을 벌이기도 하는데, 다음은 그와는 좀 다른 어느 퇴임사장이 털어놓은 불만 아닌 불만의 한 토막이다.
밖에 나와서 직접 전화를 걸다 보면 전화연결이 잘 안된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 사무실에 전화를 해도 여비서가 먼저 받고는 으레 「회의중」아니면「출타중」이고, 나중에 연락한다는 대답이다. 금방 바꿔주는 법이 없다. 누구냐, 무슨 용건이냐고 되묻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전화한 것이 구차스럽게 느껴진다. 처음엔 리턴 콜이 곧 있을 것 같아 자리를 지키고 기다렸으나, 대체로 한나절이 지나야 소식이 온다. 친한 사이가 아니면 아예 리턴 콜도 없다.
어떤 때는 기분이 상해 여비서에게 뭐라 해주지만, 수양(修養)부족을 깨달을 뿐 별 수 없다. 현직에 있었을 때는 비서들이 원하는 전화를 척척 걸어 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고마웠고, 그때 자기 사무실에서도 요즘 자기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반성하기도 한다. 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수없이 걸려오는 온갖 전화를 바쁘게 일하는 사람에게 그때마다 다 받게 할 수는 없다. 더러 지혜롭게 잘 처리하는 여비서를 보게 된다. 그럴 때면 그 사무실 주인의 얼굴이 돋보여진다. 그 반대도 많다. 의외로 센스 있는 유능한 여비서가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비서실의 벽을 실감했다. 관(官)쪽으로 갈수록, 행세하는 자리일수록 그 벽이 높다. 언제나 현직중심이고, 모든 일이 현직쪽에서 일방통행식으로 내려오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세상 그러려니 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전화통화가 그럴진대, 찾아가 만나는 일은 오죽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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