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A저축은행은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저축은행 대표는 "인근의 대형 시중은행들이 밑바닥부터 훑는 '저인망식 영업'을 하면서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가 말한 이 시중은행의 영업방식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들던 모습이다. 이 은행은 이른바 '등기부등본 영업'을 벌여가며 이 저축은행의 오랜 우량 중소기업 고객들을 속속 빼가고 있다. 방식은 이렇다. 2금융권에서 토지나 공장시설을 담보로 대출 받은 중소기업들이 이 시중은행의 1차 타깃이다. 이때 근저당권 설정 내역 및 관련 금융회사 정보 등이 상세히 기록된 대법원의 등기부등본은 시중은행에 주요한 고객정보 소스가 되고 있다. A저축은행 관계자는 "최근 기업고객 여신 규모가 전년동기 대비 20%가량 줄었다"며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밑바닥부터 훑는 영업이 일반적이지만 최근 시중은행들의 영업 패턴은 한계를 넘어섰을 뿐 아니라 '상도의'까지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실적과 건전성 양축에서 동시다발적 악화를 겪고 있는 금융회사들이 기존의 영업권역을 벗어나 무차별적 영업경쟁에 나서고 있다. 영업경쟁이 과열되면서 무리하게 대출금리를 낮추거나 한도를 늘려 고객을 빼앗아오는 '제살 깎아먹기식' 영업이 재연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고위임원은 "금융권역별로 고유의 고객층을 상대로 영업하는 것이 불문율이고 이것이 일종의 '금융생태계'"라며 "하지만 저금리로 예대마진이 줄고 불황마저 겹친데다 새 정부의 중소기업 확대전략까지 나오며 이 같은 생태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7일 금융계에 따르면 지난해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여신은 1.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같은 기간 비은행권의 중소기업 여신은 7.6%나 줄어들었다. 올해 시중은행과 비은행권과의 중소기업 지원 격차는 더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시중은행에 중소기업 지원을 확대하라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방침에 따른 영향이 크다. 하지만 금융계에서는 "시중은행들이 최근 2금융권의 우량 중소기업 대출을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는 분석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과거에는 2금융권 거래 기업의 경우 신용등급(주로 5~7등급)이 낮다는 이유로 시중은행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대부분의 시중은행들이 캐피탈이나 저축은행의 우량 중소기업 유치에 사실상 '올인'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만큼 시중은행들이 느끼는 실적 압박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지난 1ㆍ4분기 시중은행의 순이자마진은 1.95%를 기록했다.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3ㆍ4분기 1.91% 이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 저축은행에서 고금리 이자를 연체 없이 납입하며 사업체를 운영하는 중소기업이라면 그만큼 내실이 있다 의미"라며 "최근에 신규먹거리 창출을 위해 2금융권 우량대출에 전 은행 차원에서 신경을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
연초부터 수신고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새마을금고나 신협 등 상호금융권도 캐피탈이나 저축은행의 중소기업 고객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꺼번에 대규모 여신 지원이 가능하고 잉여자금이 넘쳐나는 상호금융권은 물량공세를 앞세우고 있다. 반면 저축은행은 금융당국이 건전성 기준을 강화하며 개인은 50억원, 법인은 100억원 이내에서만 대출이 가능하도록 제한을 받고 있다.
서울에 위치한 B저축은행 관계자는 "상호금융의 경우 조합중앙회와 공동으로 대출이 가능해 한꺼번에 1,000억원, 2,000억원 규모의 여신을 내주고 있다"며 "여러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는 것을 꺼리는 차주들은 상호금융권을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
전방위적인 영업 공세에 고객이 대거 이탈하는 사태를 맞고 있는 캐피탈과 저축은행들은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것도 가장 큰 문제다. "거래처를 찾아가 감정에 읍소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하지만 일부 캐피탈과 저축은행들은 무리하게 금리를 낮추고 대출 한도를 늘려주는 '외줄타기 영업'에 나서고 있어 부실 우려를 가중시키고 있다.
C캐피탈사는 일부 중소기업 대출에 시중은행의 금리에 근접하는 5%대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3월말 현재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신규 취급액 기준 평균 금리는 5.02% 수준이었다. C캐피탈사 관계자는 "이탈하는 고객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금리를 낮춰주고 있다"면서도 "이 경우 마진율이 1%대까지 떨어지는데, 그마저도 대손비용은 반영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통상 60~70% 선에서 적용하는 담보 인정비율(LTV)을 80%까지 확대해 운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융시장에서 영업권역 파괴 현상과 제 살 깎아먹기식 영업이 증가하며 금융계에서는 '금융생태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 저축은행 대표는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와 금융회사들의 수익률 악화가 금융생태계 파괴를 가져오고 있다"며 "시중은행은 2금융권 등 타 영역의 시장을 장식하는 것보다 규모에 걸맞게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등 금융시장 전체의 건전성을 고려해 영업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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