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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밤 이임식을 한 강만수 전 산은금융지주회장. 이명박정부의 '경제 대통령' 역할을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강 전 회장은 이로써 모든 공적 업무를 갈무리했다. 이날 밤 아내에게 "할 일 다 했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웃음지었지만 마음은 공허했다.
다음날인 5일 낮, 강 전 회장은 직접 차를 몰고 전 직장이 있는 여의도에 약속차 나갔다가 오후8시께 들어왔지만 피곤하다며 이내 잠들었다. 집에 찾아온 조카도 피곤하다며 10분 만에 물리칠 만큼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강 전 회장은 최근 사퇴 결심 직후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일정은 그대로 남겨 뒀다. 바로 2월 개교한 KDB금융대학 총장으로서 마지막 수업이었다.
사실 강 전 회장은 KDB금융대학이 한 학기 정도 운영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사퇴를 주저했다고 말할 만큼 이 학교에 애착이 컸다. 대학 총장으로서의 이임식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졸직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좌절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라는 주제로 고별 강연을 준비했다.
비바람이 불던 6일. 평소처럼 4시간만 자고 일어난 그는 "내가 어렸을 때 비가오면 빗물이 방에 들이치는 집에서 살았다"고 회고하며 집을 나섰다. 경기 하남 미사리에 위치한 KDB 금융대학 강의실에는 78명의 고졸 출신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날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겪은 자신의 실패담을 얘기했다.
고교 시절 가난 때문에 남의 집에 입주교사로 들어갔다가 그 집의 문학전집을 읽고 소설가를 결심한 일, 허기 때문에 잠들었다가 선생님에게 이를 설명하지 않자 반항아로 찍혀 스스로 학교를 떠난 이야기, 합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설가를 꿈꿨지만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서울 법대에 들어간 사연까지. 그의 첫 번째 좌절과 극복에 대한 얘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젊은 날의 강만수는 연애도 어려웠다며 웃었다. 대학 시절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에게 반해 고백을 했다. 두 사람은 사귀게 됐지만 얼마 못 가 여자 쪽에서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행시 재정직에 수석 합격했지만 이후 공직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스물 다섯에 경주세무서 총무과장을 맡았지만 마흔이 넘는 계장이 문안인사를 하는 등 나이를 거스른 조직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또 한번의 실패였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는 공교롭게도 재무부에 돌아와서도 훗날 부가가치세를 대체하던 직접세과 사무관으로 일했다. 부가가치세에 대해 아무도 모르던 시절 그는 장관에게 부가가치세에 대해 죽 읊어 내려갔다. 일개 사무관이던 그는 덕분에 부가가치세 도입의 '주무'를 맡을 수 있었다. 실패가 인생의 성공을 또 다시 만들어준 것이다.
IMF 외환위기에 대해서도 강 전 회장은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이야기했다. 1997년 3월 그가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왔을 때 이미 외환위기는 진행 중이었다. 다만 위기가 닥치기 직전까지 알지 못한 채 빗나간 정책을 썼던 '실패'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좋은 교과서 역할을 해줬다고 고백했다.
'환율이 적정해야 나라를 지킨다'는 그의 환율 주권론은 마지막 강연에서도 이어졌다. 그는"환율방어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바른 일이라고 생각해 추진했다"면서 "IMF때 경험을 비춰보면 환율이 떨어지면 엄청난 타격과 설움을 받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강연을 끝낸 후 그는 학교 관계자들과 조촐한 송별회를 열었다. 새 지주회장에 대해 걱정이 오갔고 그는 "새 회장을 잘 모시고 잘하라"라는 당부를 건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산은의 미래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산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영역을 잘 지키고 발전시키면 우리 경제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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