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산업에서 은행장 자리는 전통적으로 영업통의 몫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순우 전 우리은행장, 조준희 전 기업은행장, 민병덕 전 국민은행장, 서진원 전 신한은행장 등은 행원에서 은행장에 오르기까지 각자 조직에서 영업의 달인으로 통했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이나 신상훈 전 신한은행장의 영업력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앞으로 은행장이 되려면 영업력 이상의 무기가 필요할 듯하다.
지난 24일 신한은행장 선임을 끝으로 국민·우리·하나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수장이 최근 모두 교체된 가운데 과거와 다른 유형의 은행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거 은행장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영업력보다는 전략이나 재무·글로벌업무 등이 중요한 잣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병 신한은행장 내정자, 김병호 하나은행장은 뉴욕지점장을 지냈다는 교집합을 갖고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국제통이다.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기획통, 공인회계사 출신인 윤종규 국민은행장 겸 KB금융 회장은 전형적인 재무통으로 통한다.
이처럼 은행장의 자격이 과거와 달라지고 있는 이유를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금융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우선 은행산업 여건이 과거와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
우리 은행산업은 과거 고속성장 국면에서 자금의 초과 수요를 발판 삼아 성장해왔다. 국내에 한정된 파이를 두고 은행끼리 격돌하다 보니 당연히 영업력이 최우선 경쟁력으로 치부됐다. 과거 은행장 중 강력한 카리스마와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갖춘 이들이 많았던 이유다.
그러나 현대 은행산업에서 수익성만큼 강조되는 것이 리스크 관리다. 금융공학이 빠르게 발달하면서 뱅커의 전문성이 중요해졌다. 거대조직을 이끄는 행장에게는 더욱 디테일한 전문성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업력은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 격하됐다. 권선주 기업은행장과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 모두 부행장 시절 리스크관리를 맡았다.
여기에 글로벌 전략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로 부상했다. 해외 시장은 국내와 금융산업 환경이 다르다. 금융이 대표적인 규제산업인 탓인데 해외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련 경험이 필요하다. 새로 선임된 4대 은행장 중 해외지점장(이광구 행장은 홍콩법인장)을 거치지 않은 이는 윤종규 행장이 유일하다.
전직 시중은행장은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의 눈높이가 달라지듯 은행산업의 변화는 새로운 유형의 은행장을 필요로 한다"며 "영업력은 당연히 갖춰야 하는 것일 뿐 자기만의 무기가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또 국내 은행들이 최고경영자(CEO) 육성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도 새로운 유형의 행장이 탄생하는 배경이다. 조 내정자만 해도 인사부장·기획부장 등 관리부서를 두루 거쳤고 김병호 행장은 경영관리팀장, 지주설립기획단팀장 등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도맡아왔다. 이광구 행장도 전략기획단 부장과 개인영업전략 부장 등 우리은행만의 주요 보직을 다 거쳤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들 은행장 선임 후 내부에서 우선 환영하는 반응이 나온 것은 CEO 자격이 충분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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