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된 불법대출 규모만도 5,740억원, 이에 대한 보상으로 대규모 리베이트가 이뤄졌고 이 가운데 국내로 유입된 비자금만도 100억대에 달한다. 공식적으로 조사에 들어갈 경우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유입된 자금 가운데 국민은행은 상품권 등의 형태로,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은 직원들의 건물매입 등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드러난 용처'일 뿐이다. 언제 어디로 누구에게 흘러갔는지는 짐작조차 힘들다. 일각에서는 정관계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강하게 제기된다. 금융계에서는 '설 아닌 설'이 되고 있다.
심지어 비자금 만드는 방법이 담긴 '족보'가 있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그리고 당국의 조사를 받던 KB국민은행 도쿄지점 직원에 이어 우리은행 전 지점장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금융계는 충격에 빠졌다. 아직 사건의 전모는커녕 퍼즐의 극히 일부만 드러난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번 사태의 충격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도대체 시중은행의 일본 도쿄지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일단 불법대출은 지능적으로 이뤄졌다.
국내 은행 도쿄지점에서는 주로 돈에 쪼들리는 한인 사업가를 대상으로 부동산담보대출을 해줬다.
통상 건물 감정가(시세)의 60~70%선에서 대출이 이뤄지는데 은행들은 감정가를 시세보다 20~30% 부풀렸다. 대출한도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대출가능 금액의 2배 가까운 규모의 대출이 이뤄진다. 사업가들은 그 돈을 사업자금으로 활용했고 은행들은 수수료 개념의 리베이트를 챙겼다.
이런 대출을 처음 시작했던 것이 바로 KB국민은행이었다. 10년 전부터 이런 수법을 활용해온 것으로 조사 결과 나타나고 있다. 도쿄 내 국내 은행의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만큼 원조 국민은행의 수법은 모두 직원들 간에 공유된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전제로 한 시중은행의 전직 도쿄지점장은 "도쿄에서 일해본 지점장들 사이에서는 불법대출을 해주고 리베이트를 챙기는 수법이 족보처럼 전수돼왔다"며 "이전에도 비슷한 유의 불법이 만연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국내 은행들은 대출영업을 철저히 대출 브로커에 의존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만큼 폐쇄적인 거래였고, 비리의 온상이 되기 쉬운 환경이었다.
이번에 일본에서 사달이 난 은행들이 국민·기업·우리은행 등으로 공교롭게 모두 정부의 입김이 강한 은행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달리 보면 정관계에 밀착된 금융사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 국내에 송금돼 이런 쪽으로 흘러들어갔을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불법대출 혐의가 드러나지 않은 신한은행의 경우는 현지법인인 SBJ은행이 일본은행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다른 은행들은 법인 형태가 아닌 지점이라 감독의 사각지대에 있었고 그것이 비자금 통로로 활용되는 소지를 남겼다는 분석이다.
도쿄지점이 비리의 온상으로 떠오른 데는 일본 금융시장의 특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은행 도쿄지점은 일본에서 제2금융권 취급을 받는다. 한 예로 대다수 도쿄지점의 경우 수신과 여신의 비대칭이 심하다. 심하게 말하면 수신기능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일본 현지은행과 비교해서 금리경쟁력이 한참 떨어지기 때문인데 수신을 주로 차입으로 이뤄진다. 예금이 아닌 차입으로 수신이 이뤄지기 때문에 대출금리가 상대적으로 높다. 질이 떨어지는 여신을 취급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관계형 금융'이 태동하게 되고 리베이트가 암암리에 이뤄진다.
정치금융, 관치금융에 휘둘리기 쉬운 국내 금융 환경 때문인지 도쿄 지점은 금융계에서 '로열 코스'로 통했다.
도쿄지점장 출신 인사들은 승승장구했다. 이백순(신한은행), 조준희(기업은행), 최영환(수출입은행), 김진관(SC은행), 이신기(신한은행), 백국종(우리은행) 등 도쿄지점장을 거친 이들은 은행장, 부행장 등 요직에 차례로 올랐다. 지점장을 지내진 않았지만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도쿄와 오사카에서 근무한 일본통이다.
실제로 도쿄 지점장은 여수신 등 은행업무보다는 의전이 중요한 자리로 손꼽힌다.
특히 MB정권의 출범은 도쿄지점을 더욱 얼룩지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금융지주 회장에 잇따라 오르면서 정실인사가 더욱 극심해졌다. 도쿄지점장 자리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인사특혜였다. 불법대출 혐의로 구속된 전 국민은행 도쿄지점장의 경우 어윤대 전 KB금융그룹 회장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뛰어난 의전으로 발탁됐다. 자살을 선택한 우리은행 전 도쿄지점장 역시 고려대, 한일은행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팔성 전 회장의 라인으로 분류된다. 특히 우리은행의 경우 도쿄지점장은 전통적으로 한일은행 출신이 도 맡았다.
우리은행의 한 관계자는 "합병 이후 상업은행 출신이 도쿄지점장으로 발령난 적이 딱 한번 있는데 그 이후로는 한일은행 출신만 도쿄로 발령났다"며 "과거 한일은행에는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3곳에 지점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도쿄는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했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민은행의 경우 해외지점 나가려고 국회의원 힘까지 동원한다"며 "영업보다는 의전을 중시하고 그러다 보니 국내에 들어와서 승진을 하게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보은행위가 벌어지는 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금융당국이 금감원과 손을 잡은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국내 은행이 지점 형태로 나가 직접적인 점검 대상이 아니기에 더 그렇다. 불법적으로 조성된 비자금이 일본의 야쿠자나 일본 정계 등으로 흘러들어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은행이 불법대출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다고는 하지만 은행에도 독이 된다. 바로 불법대출이 부실대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칫 예금주의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한 금융계 고위 관계자는 "한 은행이 아닌 여러 은행에서 비슷한 수법의 불법행위가 자행됐다. 모럴해저드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도쿄지점 운영관행이나 일본 금융시장의 특수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도쿄에서 불어닥치고 있는 폭풍이 얼마나 세력을 확장할 지 금융계가 긴장하고 있다. @seㄷ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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