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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2부. 성장 이끌고 신화로 남은 캔두이즘 <4> 무에서 유를 만든 서울올림픽 유치

"세울, 코리아"… 정부도 포기했지만 판세 뒤집은 '바덴바덴 기적'

동서 양 진영이 모두 참가해 올림픽 정신을 고양하고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한 88 서울 올림픽 폐막식. 흑자규모가 부풀려졌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국민들의 자신감을 끌어올렸다.

정부·서울시 한푼 지원없이 사비 들여 홍보동영상 제작

해외 진출 건설사까지 동원

北도발 위험 등 악조건에도 수년간 준비해온 日 제치고

단 5개월 만에 유치권 따내


"하계 올림픽은 일본으로 결정됐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웃으며 표를 얻으러 다닌다." 1988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하루 앞둔 1981년 9월29일, 당시 서독(현 독일)의 한 신문이 내보낸 기사다. 전망 기사의 철칙인 '단정 금지'를 깰 만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국과 우리나라·대만 등 3표밖에 안 나올 것이라는 북한 측 인사들의 조롱에도 정 회장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24시간 뒤 그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세울, 코리아!"를 이끌어낸 정 회장. 그는 '바덴바덴의 기적'을 썼다.정 회장은 하계 올림픽 유치 임무를 억지로 떠맡은 1981년 초부터 가능하다고 여겼다.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젓던 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소를 지을 때나 자동차 사업을 시작할 때처럼 이번에도 누구나 안 된다고 하는데도 된다고 믿었고 해냈다. "해보기나 했어"라는 '캔두이즘(candoism)'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실제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는 꿈에 가까웠다. 몇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온 일본의 벽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나고야를 개최지로 내세운 일본은 자금력과 올림픽 개최 경험, 국제적 위상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됐다.

국내에서도 비관론이 많았다. 제6회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도 개최할 시설과 돈이 없어 대회를 반납하고 태국이 대신 치르는 망신을 입은 게 불과 11년 전. 시간이 흘렀지만 아시안게임 개최 능력도 없는 나라가 무슨 올림픽이냐는 패배의식이 여기저기서 드러났다. 개최도시인 서울시마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1차 실사단에게 유치 노력은커녕 협조조차 안 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런 와중에 유치 임무를 떠맡은 정 회장에게 정치권은 '망신만 당하지 말라'고 주문할 정도였다.

게다가 치명적인 복병도 있었다. 서울에서 1시간여 거리에 휴전선이 있고 북한은 언제든 도발을 해올 수 있었다. 가능성 제로의 순간에서도 정 회장은 달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 우리가 유리한 이유를 찾았다. 아산은 훗날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얘기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무력 개입에 항의해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참석하지 않았어. 4년 후 개최된 미국 LA 올림픽은 소련의 보복 차원에서 반쪽 올림픽이 됐지. 그런데 올림픽 정신이 무엇이야? 인종, 종교,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세계 평화와 친선, 화합 아니겠어?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면 두 번이나 손상된 올림픽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



그렇게 정 회장은 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정부조차 두 손, 두 발을 들었을 때다.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1981년 9월30일인데 정부가 올림픽을 유치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것은 그해 4월. 12·12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이미지를 바꿔보자는 의도가 있던 때다. 박정웅 메이텍인터내셔널 대표는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은 천하에 정주영 회장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부와 서울시는 한 푼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정 회장은 서울 홍보 동영상을 사비 1억7,000만원을 들여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활용했다. 아산은 한영경제협력위원장이어서 영국을 맡고 프랑스는 한불경제협력위원장인 조중훈씨에게 부탁했다. 건설사도 동원했다. 세계 각지에 퍼져 나가 있는 건설사에 전갈을 넣어 현지 정부에 우리나라를 찍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1987년에 전경련 회장직을 그만두며 열었던 기자회견에서 정 회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IOC 위원들을 쫓아다니며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해야 했는데 자동차 없이 걸어다닐 수는 없고 정부에서는 1전도 지원해주지 않고, 어쨌든 가능한 모든 방안을 동원해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녀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일본은 시계를 따로 보내기도 했는데 우리는 꽃을 보냈지. 꽃은 꽃가게에서 일일이 정성을 들여 기가 막히게 해서 보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이게 효과를 봤습니다."

그렇게 정 회장은 개최지 선정의 열쇠를 쥔 IOC 위원들의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5개월 만에 시간적·물리적 열세를 뒤집고 서울 올림픽을 유치해냈다. 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어 정주영을 좋지 않게 봤던 신군부도 올림픽 유치 이후 정 회장을 다르게 봤다고 할 정도다.

이후 정 회장은 체육계 발전에 계속 기여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을 맡으며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했다. 1984년 LA 올림픽 때도 메달을 딴 선수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아산의 체육 사랑은 2세, 3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1985년 대한양궁협회장에 부임해 4번이나 역임하면서 우리나라의 양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지금은 정의선 부회장이 회장직을 맡아 대를 이어 양궁을 지원하고 있다. 정몽준 전 의원의 축구 사랑도 유명하다. 1993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은 정 전 의원은 국제축구연맹 명예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의 축구 위상을 드높였다.

올림픽과 관련해 인간 정주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올림픽 유치와 준비를 도맡으면서도 현대그룹 계열사는 올림픽 수익사업은 물론 시설 공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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