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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란성 쌍둥이는 똑같은 유전정보를 갖고 태어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부각된다. 한명이 질병에 걸렸는데 다른 한명은 멀쩡하다. 이는 생로병사의 모든 생명현상과 개인 질병의 원인이 출생 전 미리 결정된 유전자 특성에 따라 좌우된다는 ‘유전결정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후성유전학자들은 환경이나 습관에 따라 인간의 DNA가 바뀌지는 않더라도 유전정보가 다르게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후성유전’ 개념은 지난 1940년대에 처음 생겼으나 실증 연구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4~5년 전부터다. 김영준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는 국내 후성유전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다. 최근 후성유전 물질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혀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뉴클레오솜'이 DNA에 감긴 강도따라 다양한 변이
유전자 정보 활용땐 암등 획기적 치료 가능해져
◇후성유전물질이 유전자 발현 차이 발생시켜=김 교수는 생물 개체마다 환경적응 능력이 다른 것은 DNA 염기서열은 변하지 않으면서 유전자 발현에 차이가 생기는 후성유전학적 변이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변이가 유전자의 세포 내 보관 및 사용 가능한 상태를 조절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의 차이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내부 조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전자 발현의 차이를 일으키는 물질로 주목 받는 것이 뉴클레오솜이다. 10∼100㎚(나노미터ㆍ1㎚는 10억분의1m) 크기의 뉴클레오솜은 긴 DNA 사슬을 둘둘 감아 세포 안에 차곡차곡 쌓아넣는 역할을 한다. 이 뉴클레오솜이 유전자 프로모터(promoterㆍ조절유전자)에 어떻게 감기느냐에 따라 DNA와 세포 내 단백질과의 상호작용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다양한 변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김 교수는 밝혀냈다. “도서관에 여러 종류의 책이 분야별로 분류돼 보관돼 있듯이 사람 몸의 유전정보도 서로 다르게 보관돼 있습니다. 뉴클레오솜이 단단하게 감은 DNA는 세포 내 다른 단백질과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 채 보관돼 있고 반대로 느슨하게 감기게 되면 DNA는 다른 단백질과 활발히 반응하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DNA가 감긴 강도 차이 때문에 세포마다 DNA의 활동 양상이 다르고 온도나 스트레스 등 환경 변화에 대한 반응도 다양해집니다.” 김 교수의 연구는 주요 유전자에 대한 뉴클레오솜의 형성이 다양한 유전자 발현 차이를 유도해 세포 간, 개체 간의 다양성을 유도하는 중요 요소라는 점과 이러한 뉴클레오솜이 어느 유전자에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는 상당 부분 DNA 서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데 의의를 갖는다. 김 교수는 “환경변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유전자일수록 커다란 유전자 발현변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과학적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향후 활발히 연구가 수행될 후성유전학과 개체 간의 변이, 환경의 역할, 질병의 유발 메커니즘, 줄기세포 분화 연구 등에서 중요한 유전자 발현 변이의 근거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전세계 인간 에피게놈 프로젝트 주도=서울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한 김 교수는 대학 졸업 후 20여년 동안 유전자 연구의 한 우물을 파고 있다. 30대 후반이었던 1999년부터 정부의 지원을 받아 창의연구단인 게놈기능제어창의연구단을 이끌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김 교수는 국내 과학자 중 노벨상 후보군으로도 꼽힐 정도로 탁월한 연구성과를 보이고 있다. 2006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스탠포드대 로저 콘버그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은 그는 2005년에는 과도한 인체 면역기능이 패혈증이나 아토피 피부염 등 질병을 유발하고 면역기능의 하나인 염증을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암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규명하기도 했다. 지난해 초 개체 간의 유전자 발현 변이가 전사 조절 인자 및 DNA 서열의 유전학적 차이보다 후성유전학적 요인에 의해 훨씬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낸 데 이어 올 들어 이를 더욱 발전시킨 연구결과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김 교수는 전세계 후성유전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지네틱스(Nature Genetics)’에 주요 발견으로 연이어 소개됐다. 김 교수는 후성유전물질(에피게놈)의 인체 지도를 작성하려는 국제협력 연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05년부터 국제 휴먼 에피게놈 프로젝트의 태스크포스(TF) 멤버로 활동하면서 기획보고서를 공동으로 작성,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로드맵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후성유전학은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앞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될 것”이라며 “후성유전물질에 대한 연구가 보다 진전되면 암과 같은 질병에 대한 새로운 진단과 치료가 가능한 만큼 유전체정보 활용 기술을 개발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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