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년 이어온 봉제기술력 불구 패스트패션에 밀려 일감 줄고 젊은인력 수혈 끊겨 깊은 시름
공동 직판매장 설치 운영 등 인프라·환경개선 지원 필요
#하루 12시간씩 미싱을 돌리며 서울 동대문을 '패션의 메카'로 만들었던 어린 여공들은 어느새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낙산에 올라 내려다본 창신동은 평화시장 일대에서 넘어온 봉제공장들이 이곳에 자리 잡기 시작한 1970년에 시계 바늘이 멈춰 있었다.
우리나라 최대 의류제조업 밀집지역인 창신동 봉제골목. 차 한 대 지나기 힘든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다세대 주택 창문 사이로 여전히 '드르륵 드르륵'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번듯한 간판도 없는 10평 남짓한 공장에선 줄어든 일감 때문인지 좀처럼 활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10대 나이로 상경해 봉제업에 뛰어 들었던 최 모 사장은 "창신동 봉제골목의 기술력은 전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며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바지·재킷·치마·수영복까지 어떤 옷이든 그의 손을 거치면 하루 안에 화려한 옷이 탄생했다. 38년전 평화시장 2층 공장 '시다'(보조)에서 봉제기술 장인인 '사장님'으로 변신한 그는 "갈수록 일감이 줄어들고 있지만, 창신동 골목에 자리잡은 소공인들이 젊은 시절부터 수십년간 갈고 닦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제2의 전성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14일 찾은 창신동 봉제골목은 옷감을 실은 오토바이 소리와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1960~70년대 동대문 근로자들의 주거공간이었던 창신동 일대가 봉제공장 직접지로 변모한 것은 평화시장 일대 임대료가 오르면서 공장이 하나둘씩 옮겨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한때 일감이 공장 가득 넘치던 시절 골목 곳곳에는 공장 수가 약 3,000개에 달했다. 지금 2,000개 남짓 남은 영세한 공장들은 골목골목 주택마다 지하1층, 지상 1층 등에 자리잡고 있다.
창신동의 최대 장점은 원단을 떼오는 평화시장과 동대문 상권이 밀집해 있다는 것. 아침에 동대문 디자이너가 맡긴 옷을 하루 만에 만들어낼 수 있는 스피드도 집적지만의 기술력과 의류·패션산업 간의 연계 덕이다.
적은 비용으로 단시간에 옷을 대량생산하던 창신동은 자라·유니클로 등 해외 패스트패션 브랜드한테 발목을 잡히고 있다. 동대문 상권이 조금씩 판매가 줄다 보니 자연스레 창신동 일감은 매년 감소세다. 여성 바지를 생산하는 한성화 에이스 대표는 "일감이 줄다 보니 바지 하나를 만들어서 생기는 수익은 자꾸 줄고 고정적인 일감이 사라지면서 불규칙하게 오더가 들어와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놨다.
자체 브랜드 없이 하청업체로 굳어진 것도 한계점으로 꼽힌다.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형태가 변화했지만 대부분의 공장들은 기술개발 없이 여전히 주어진 일감을 자르고 박는 단순 노동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하루 12시간씩 꼬박 근무를 해도 여전히 창신동 근로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주문이 줄다 보니 잦은 휴업으로 일명 '객공'으로 불리는 비상근 근무형태가 늘어나고 있어 봉제 골목의 시름을 깊게 하고 있다. 한 대표는 "젊은 인력들이 수혈되지 않은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직원들 평균 나이가 50세를 훌쩍 넘는다"며 "공장에서 몇십 년간 일해온 직원들이 공장을 떠나 '부부 객공'으로 나서며 소규모 공장들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창신동 봉제단지의 이같은 애로에 대해 이수진 창신동 소공인 특화지원센터장은 "소공인들의 재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라며 "단순 OEM생산에서 벗어나 자체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창신동의 기술력과 동대문의 상권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창신동 소공인들이 직접 생산한 옷을 싼 가격에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공동매장 역시 이 같은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화재위험과 환기시설 부족 등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 역시 시급한 과제로 지적된다. 김주현 규성패션 대표는 "부족한 근로조건은 물론 주차시설 등 인프라 부족은 젊은이들을 유입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며 "동네에 페인트를 칠하는 것보다 소공인들이 진짜 필요한 지원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