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과 삼성물산(000830)의 합병을 둘러싼 삼성그룹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분쟁에서 캐스팅보트를 쥐었던 국민연금이 삼성의 손을 들어준 결정적 이유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통합 삼성물산의 바이오 사업부문의 가치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연금은 삼성 측이 제시한 양사의 합병비율(1대0.35)이 삼성물산에 다소 불리한 것으로 파악했지만 합병 후 시너지 효과가 이를 충분히 만회할 것으로 봤다.
5일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에 따르면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가 지난달 10일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양 사의 합병에 찬성한 것은 통합 후 바이오 사업부문의 성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양 사의 적정 합병 비율을 삼성이 제시한 1대0.35보다 0.07 높은 1대0.42로 추산했다. 당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의 순자산가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며 삼성 측의 합병 비율을 문제 삼았던 점을 감안하면 국민연금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의 손을 들어 준 것은 합병의 시너지 효과가 부족한 합병 비율의 차이를 상쇄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날 회의에 참석한 투자위원회 위원 12명 중 8명이 합병에 찬성표를 던져 과반수를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당시 기금운용본부 소속위원들이 여러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통합 삼성물산의 바이오 사업부문의 가치를 12조~13조원으로 평가했다"면서 "이 정도면 합병 비율이 다소 삼성물산에 불리하더라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단순한 합병 비율보다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밀고 있는 바이오 사업의 성장성에 베팅했다는 얘기다. 삼성은 지난 2010년 일찌감치 바이오·제약 분야를 5대 신수종사업으로 지목하고 이듬해 바이오시밀러(복제약)를 생산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했다. 기존에 삼성물산은 이 회사의 지분을 4.9%만 보유하고 있었지만 46.3%의 지분을 가진 제일모직과의 합병으로 단숨에 바이오 회사의 최대주주로 올라서게 됐다. 바이오시밀러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최대주주는 지분 90.3%를 가진 삼성바이오로직스다.
합병 성사가 국민연금이 보유 중인 삼성 계열사의 주가상승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고려됐다. 국민연금은 합병 찬반이 삼성그룹주에 미칠 영향을 객관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지주사를 분석하는 국내 증권사를 상대로 전수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기금운용본부 소속 섹터 애널리스트도 한 달 가까이 합병 시너지 효과를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정부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제일모직 외에도 삼성전자(005930)·삼성화재(000810)·삼성SDI(006400)·삼성증권·삼성카드 등 삼성 계열사 주식을 23조원 가까이 보유했기 때문에 큰 그림을 봐야 했다"면서 "국내외 증권사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에서도 합병이 성사될 때 전체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합병이 무산됐을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작업이 지연돼 결과적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주가하락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점도 합병 찬성의 주요 근거가 됐다. 올해 5월26일 삼성그룹이 두 회사의 합병을 발표할 당시 제일모직 보유지분 가치가 삼성물산보다 높았던 점도 국민연금이 삼성의 손을 들어준 이유 가운데 하나다. 현재 국민연금은 제일모직 지분 5.04%, 삼성물산 지분 11.61%를 보유 중으로 이날 종가 기준 양 사의 보유지분 가치는 제일모직이 1조1,431억원, 삼성물산이 1조374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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