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식·채권만으론 늘어나는 수요 충족 못해
항공기·부동산·선박 등 해외 인프라 적극 투자
은행·증권 포트폴리오 다양화 등 역량 강화 시급
금융 산업이 사라지는 먹거리와 줄이기 힘든 판관비, 낯선 경쟁자들의 출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소매금융 시장까지 깊숙이 침투했던 글로벌 금융사들이 줄줄이 발을 빼고 있는 것도 이제는 한국 시장의 성장잠재력을 높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직 외국계 은행의 한 행장은 "글로벌 금융회사의 전 세계 포트폴리오에서 한국 시장의 매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지금을 국내 금융회사들이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바꿔야 할 시기라고 진단한다. 그중에서도 저금리 고령화 여파로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금융자산에 대한 자산관리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핵심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최석윤 전 골드만삭스 한국 대표는 "유동성이 풍부한 한국의 은행들이 해외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이를 마중물로 증권사들은 해외에서 중수익 투자상품을 가공해오는 등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발상으로 자산관리 시장에 접근해야 한다"며 "소매금융이나 펀드 판매 위주의 은행 영업과 오퍼상 형태의 증권사 영업 방식을 유지해서는 한국 금융 산업의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금융자산, 갈 곳이 없다=한국 개인투자가는 총 2,700조원에 이르는 금융자산을 축적했으며 매년 10%씩 금융자산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약 40% 이상이 예금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예금이 약 1,100조원, 보험 및 연금이 약 800조원, 금융투자상품이 약 600조원이다.
특히 실물자산의 비중이 다른 선진국 등에 비해 월등히 높아 앞으로 실물자산에서 금융자산으로 투자금이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부동산 시장에서 금융 시장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은행 예금에서 투자상품으로 '머니 무브'가 본격화하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2년 기준 한국의 실물자산 비중은 75.1%에 달해 이웃 나라인 일본(40.9%)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문제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금융자산들을 받아 줄 곳이 마땅찮다는 데 있다. 시중금리를 뛰어넘으면서 안정적인 수익성을 설계해줄 '자산관리 포트폴리오'를 원하는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은행과 증권사는 예금이나 펀드 판매 일변도의 거래 관행에 머물러 있다.
고객과의 접점이 가장 많은 은행은 신탁을 이용한 금융상품 판매 채널로서의 역할에 국한돼 있고 증권사의 경우 단기수익 중심의 상품 판매형 영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배현기 하나금융연구소장은 "지금은 은행이나 증권사의 자산관리라는 게 상품 판매 위주일 뿐 포트폴리오를 팔지 못하고 있다"며 "내년에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도입으로 상당한 부분이 바뀌긴 하겠지만 고객의 금융자산 상황, 미래 플랜, 위험 성향 등을 고려해 자산관리 포트폴리오를 판매할 수 있는 그런 역량이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자산관리 두 마리 토끼 잡아야=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투자상품 자체가 다채롭지 않고 해외 상품에 대한 국내 금융회사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자산관리 역량과 직결되는 근본적 문제다.
과거 사례만 봐도 은행 창구에서 우후죽순 팔렸던 중국 펀드들이 수년 만에 반토막이 났고 최근에는 증권사 창구에서 팔린 브라질 국채 투자 등이 큰 손실을 입었다. 모기업을 밀어주기 위해 계열 금융회사가 동원된 '동양 회사채 사태'는 국내 금융사들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후진적인지 보여주는 부끄러운 사례다. 제도적으로는 은행과 증권이 시너지를 내라며 금융지주회사 체제가 도입된 지 오래지만 지주사라는 우산만 같이 쓸 뿐 제대로 된 시너지 창출은 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그룹들이 자산관리 역량을 높이기 위한 내부협력체제 구축에 소홀했던 탓이다.
글로벌 시장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지주들이 해외에 진출해 국내 기업이나 현지 소매 영업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한국 고객에게 제시할 안정적인 투자상품을 찾아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 규모로는 늘어나는 자산관리 수요를 충족해줄 수 없다는 것. 자금은 풍부하지만 국내 대출시장에서 더 이상 성장이 어려운 은행들이 해외에서 항공기·선박·부동산 등과 관련한 인프라 금융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은행의 계열 증권사들은 이를 상품으로 다시 가공해 국내시장에서 판매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거론된다.
최석윤 전 대표는 "국내 증권회사의 자산 및 자본 규모로는 해외 투자상품에 대한 리스크 관리 역량을 갖추기 어렵다"며 "유동성이 풍부한 국내 은행들이 유럽계 은행이 최근 자금난으로 발을 빼고 있는 해외 인프라 금융 부문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이를 발판으로 증권회사가 해외 상품 가공능력을 높여 국내 투자자들을 위한 안정적인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윤홍우기자 seoulbird@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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