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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던 17대 국회 첫해가 마지막 날까지 육탄 저지와 욕설로 얼룩졌다. 대화와 타협의 의회주의 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당리당락과 명분싸움에만 집착하면서 오히려 경제 침체를 부채질하고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바람에 국회는 만신창이로 전락했고 이렇다 할 성과조차 내지 못한 ‘사상 최악의 국회’로 기록될 것이 뻔하다. 187명의 초선 의원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국민들은 구습을 벗어버리고 참신한 국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했지만 국민의 열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여야 의원들은 상대방을 “수구 꼴통” “좌파 빨갱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수준 이하의 욕설과 고성이 시종일관 난무했다. 상임위마다 물리력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2004년의 마지막 날도 결국 여야 의원들이 본회의 의장석을 점거하는 소동을 벌였다. 과거 국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오히려 증폭시켰던 17대 국회는 실적에서도 초라하기 짝이 없다. ’역사상 가장 생산적이고 능률적인 국회’를 표방했지만 성적표는 낙제점이다. 지난해 30일 현재 17대 국회에 제출된 법률안 1,048건 가운데 가결이나 부결, 폐기 등 어떤 식으로든 처리된 법안은 280건으로 26.7%에 그쳤다. 그러면서도 규제개혁특위ㆍ일자리창출특위ㆍ국회개혁특위ㆍ정치개혁특위 등 8개 특위는 이름만 걸어놓았을 뿐 매달 450만원에 달하는 활동비를 받아가는 등 잇속을 챙겼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데도 새해 예산안은 헌정 사상 가장 늦게 처리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새해 예산안은 한나라당의 불참 속에 31일 새벽에야 예결특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회계연도 개시일을 하루 앞둔 12월31일에 예산이 통과된 것은 유례없는 일로 아무리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대립해도 17대 국회처럼 비협조적인 적은 없었다. 17대 국회가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4대 개혁법안과 뉴딜법안 등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하고 갈등을 빚은 데에는 ‘리더십 붕괴’와 ‘정치 실종’이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협의가 안되면 과반수 의석을 앞세워 툭하면 “강행 처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는 결국 야당을 더욱 자극시켜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다. 한나라당의 구태도 여전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처리되지 않자 상임위장석을 점거하면서 물리적인 충돌을 빚었고 국가보안법 폐지안의 상정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다수결에 의한 의회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를 일삼았고 여야 대표와 원내대표가 ‘4인 대표회담’을 통해 합의하고 사인까지 한 합의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본회의장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여야 원내대표의 최종 합의를 이끌어낸 김원기 국회의장은 합의문이 휴지조각이 돼버리자 “참 이렇게 정치인이 부끄러운 줄 몰라 가지고…”라며 혀를 찼다. 여야는 이구동성으로 원내 중심 정당을 표방하면서 원내대표의 위상을 당 대표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지만 실제 리더십은 오히려 과거에 비해 약화됐다. 따라서 원내 대표간에 합의된 사항이 의원총회에서 뒤집히는 사례가 수 차례 발생했다. 을유년 새해에 17대 국회가 구습을 반복하지 않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리더십의 회복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처럼 어정쩡한 ‘투톱 시스템’에 대한 개선과 함께 집권여당은 국정 전반에 대한 무한책임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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