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지주와 국민은행 제재를 전후해 금융 당국과 감사원이 벌인 승강이는 한국 금융산업의 맨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정보 유출, 각종 비리 등 연이어 터져나온 사건·사고를 추스르기도 버거운 판에 정치금융에서 파생된 지배구조 갈등까지. 이런 금융환경에서 금융산업의 도약을 위한 자율의 싹이 자랄 리 만무하다. 금리·수수료만 잡으면 된다는 인기영합적 관치가 금융인의 탐욕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활개를 치고 금융사들도 자구혁신노력보다는 눈치 보기에만 급급하다.
그렇기 때문일까. 국내 금융사의 글로벌 경쟁력은 갈수록 뒷걸음치고 있다. 영국 금융전문지인 '더뱅커'가 발표한 세계 1,000대 은행(지난해 말 자기자본 기준)에 국내 은행은 고작 10곳만 이름을 올렸다. 국가별 순위도 인도(32개), 말레이시아(13개) 등에도 뒤처진 22위를 기록했다. 특히 인터넷은행 출현 등으로 금융산업 환경이 구조적 변화를 맞고 있어 장기적 안목과 비전으로 경영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 금융지주 고위임원은 "더 늦기 전에 당국과 금융인 모두 보신주의 행태를 벗고 금융산업의 자생력을 살리기 위한 방안 마련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3중 트랩에 갇힌 한국 금융=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산업이 수익 포트폴리오 취약에 따른 성장 정체, 시장을 거스르는 낡은 규제, 모럴해저드에 따른 신뢰 상실이라는 '3중 트랩'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전세계 금융사들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의 수익성을 회복하고 있는 반면 국내 은행의 순이자마진(NIM)은 1.82%(올 2·4분기 기준)로 1%대에 갇혀 있다. 국내 10개 은행의 평균 총자산순이익률(ROA)은 0.38%(지난해 말 기준)로 전세계 평균인 1.28%에 크게 모자란다.
하지만 물길을 열어야 하는 당국의 규제는 이중적이다. 수익 다각화를 말하면서 수수료를 압박한다.
퇴로가 막힌 금융사들은 해외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현지 규제 강화 등으로 고전 중이다. 이익비중이 5% 안팎으로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최근 미얀마·인도네시아 등 일부 국가로 진출이 쏠리는 것도 문제다. 해외에서도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이 재연될 소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수업료를 무는 사이 국내시장에서는 위안화를 등에 업은 중국계 은행이 위세를 떨치고 이제는 동남아 자본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다.
당국의 뒤틀린 정책 우선순위도 그 부작용에 속한다. 정작 급한 카카오톡 등 정보기술(IT)기업의 금융업 진출로 인한 법과 제도 정비보다는 금융사에 대한 군기 잡기식 감사만 늘어나고 있다.
◇금융 당국의 보신주의부터 없애야=한 전직 고위관료는 "금융이 허울만 산업일 뿐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며 "정부도 포퓰리즘에 가까운 규제를 접고 금융산업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힘써야 한다"고 꼬집었다.
최근 당국이 복합점포 활성화, 개인자산종합관리계좌 도입, 해외 진출시 겸업주의 허용 등을 발표했음에도 시장의 반응이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것은 바로 부가가치로서의 산업적 개념이 잡혀 있지 않은 것도 원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융회사의 보신주의 이상으로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금융 당국의 보신행정을 걷어내는 일이다. 가령 정보 유출사고가 터지자마자 금융지주 계열사 간 정보 공유 자체에 족쇄를 채우는 식의 처방은 갈 길 바쁜 금융사의 발목만 잡기 십상이다. 한 금융지주 소속 시중은행장은 "빅데이터가 화두가 되고 있는 마당에 이를 역행하는 규제가 판치고 있다"며 "금융사의 경쟁력은 물론 고객의 이익도 갉아먹는 퇴행적인 규제가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 자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계의 한 고위인사는 "금융의 격변기를 맞아 긴 호흡으로 인력·채널 조정 등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금융을 금융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며 "경영진 임기 등과 관련해 지배구조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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