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독립 합시다.” 지금부터 14년전인 1992년 2월초. 당시 구자홍 LG전자 부회장(LS그룹 회장)과, 디스플레이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구승평 전무(전 LG전자 고문), 박명호 연구소장(타계) 등 핵심 3명이 LG전자(당시 금성사) 구미공장 15층 회의실에 모였다. LG전자는 그 때까지 브라운관 TV로 글로벌 무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핵심기술을 모두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 매출이 늘수록 로열티 부담도 만만찮았다. “언제까지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갖다 쓸 순 없지 않겠습니까. 브라운관 TV로는 원천기술을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PDP는 잘만 하면 기술독립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잡습니다. 디스플레이 시장 자체도 브라운관은 포화 상태지만 PDP는 새롭게 뻗어가는 시장이 될 것입니다.” 구자홍 부회장은 그날 모임에서 지금은 보통명사가 됐지만 당시엔 이름마저 생소했던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투자에 나서 독자적인 기술력을 구축하자는 청사진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 때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LG전자는 전세계 PDP시장의 31%(1ㆍ4분기 기준) 가량을 점유한 글로벌 메이저로 올라섰다. ◇‘PDP기술의 소스’를 찾아라= 투자 결정은 내렸지만 처음부터 막막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부상하던 PDP는 일본이 10년부터 기술연구에 들어가 이미 상용화 단계에 와 있었지만, 국내에선 변변한 자료조차 없을 정도로 백지상태였기 때문. “PDP가 미래 캐쉬카우로 떠오를 것은 확실했는데 국내에는 기초기술이나 관련자료가 전무했습니다. 자료 습득을 위해 한달에 3~4번씩 미국과 일본을 쉼없이 드나들어야 했지요.” (백우현 LG전자 CTAㆍ기술담당자문역ㆍPDP개발 프로젝트에 추후 합류) 하지만 기술유출을 우려한 일본 기업들은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차치하고 당시 구 전무 일행을 만나주는 것도 꺼려했다. “정공법을 선택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다면 관건은 핵심 기초기술을 갖고있는 일본 학자를 만나는 것이었지요. 3개월 가량 이 잡듯 수소문한 끝에 PDP 기초기술을 처음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던 히로시마대 우찌이케 교수와 전기통신대 미코시바 교수를 찾아냈습니다.” (구승평 전 고문) 다음단계는 우찌이케 교수나 미코시바 교수를 만나는 것. 하지만 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구 전 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일본 기술을 잠재 경쟁국 기업에 넘겨주기 싫다는 간접적인 의사였다고 이해합니다.” “기초기술을 확보하더라도 양산 타이밍이 늦어지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절박했다”는 구 전 고문은 “미코시바 교수나 우찌이케 교수가 주도하는 세미나 장소나 사무실을 수십차례 방문하면서 집요하게 설득했더니 ‘정말 대단하다’고 고개를 흔들더라”고 말했다. ◇완벽한 기술독립까진 12년이 걸렸다= 백지상태에서 시작해 일본 기술로부터 명실상부하게 독립을 선언한 것은 지난 2004년. 그동안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온 싱글스캔 기술을 적용시킨 PDP를 그 때부터 일본 업체들이 역수입하기 시작했다. LG전자는 지난 해 일본의 PDP 자존심인 마쓰시타와 PDP 특허를 상호 공유하는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었다. 이는 LG전자가 더 이상 PDP 강국인 일본의 기술력에 의존하지 않고 대등한 수준의 기술력을 구축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 기간동안 LG전자는 마치 투사의 길을 걷듯 ‘영광과 상처’로 점철됐다. PDP 연구에 매진한 지 꼬박 4년이 걸려서 1996년에야 처음으로 순수 국산기술로 40인치 PDP을 만들었다. 2년 후인 98년에는 세계 최대 크기인 60인치 PDP를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세계 최대 PDP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자 구승평 전 고문은 “디스플레이 역사상 일본기술 의존에서 벗어나 토종 기술로 차세대 PDP를 우리 손으로 개발한 것은 40년 국내 전자산업 역사에 남을 사건”이라며 감격해 했다고 한다. 지난 2003년부터 ‘글로벌 마케팅’을 주도해간 김쌍수 부회장의 노력도 ‘PDP 강자’로 떠오르는데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김 부회장은 제품ㆍ기술 혁신활동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시장 공력에 주력했다. 김 부회장은 올해 초 마케팅 총책임자인 CMO(Chief Marketing Officer) 역할도 자처하며 해외시장 마케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특히 PDP분야의 기술혁신을 위해 자체 혁신활동인 TDR 활동을 한달에 두번 정도 반드시 현장에서 직접 챙긴다. 세계 최초로 생방송을 멈췄다 볼 수 있는 ‘타임머신 TV’ 개발도 김 부회장이 기술혁신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LG전자는 지난 1ㆍ4분기 PDP패널 판매량(73만장 판매) 세계 1위를 처음으로 달성했다. 2ㆍ4분기 들어 마쓰시타가 다시 1위로 올라섰지만 상반기 전체로는 여전히 LG전자가 우세한 위치다. 윤상한 LG전자 DD(디지털디스플레이)사업본부장(부사장)은 “LG보다 10년 먼저 시작한 일본의 PDP사업을 제치고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적기 투자와 끊임없는 기술혁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LG전자는 올해 PDP패널 생산 세계 1위 및 내년 PDP TV 1위를 달성할 계획이다. ● 회사운명 가른 1995년 이사회 "무모한 모험" 회의적 반응…경영진 설득에 '進軍' 결단 "이건 무모한 모험입니다. 일본에서도 과감한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포기하세요." (LG전자 이사회 멤버들ㆍ1995년 2월 구미공장 15층 대회의실) LG전자가 어렵게 PDP 연구를 시작했지만 250억원에 달하는 최종 투자 결정을 위해서는 이사회 설득이라는 최종 관문이 남아 있었다. 250억원은 DD사업본부 전체 매출의 10%에 달하는 거액. 대부분의 이사회 멤버들은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PDP'라는 생소한 사업에 거액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 반대입장을 고수했다. PDP 사업은 거대장치 산업으로 매 시기마다 투자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 자칫 LG전자 전체를 어렵게 할 수 있는 사업이었고, 시장전망도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사회 멤버들의 멘트를 옮겨보면 이렇다. "PDP 기술은 일본이 이미 10년전에 개발을 완료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투자한다고 해서 일본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합니다. 사업승산이 없습니다.", "브라운관 TV 등 기존 사업들만 잘해도 되는 데 애써 무리한 투자에 나설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 기술로는 절대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없으니까 이쯤에서 단념하시는 게 옳다." 구승평 전 고문(당시 부회장)은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사회 멤버들을 다시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옆에 앉아 있던 박명호 소장도 거들었다. 불행히도 박 소장은 2003년 1월 근무지인 우면동 디스플레이연구소에서 과로로 운명을 달리했지만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국내 최고의 디스플레이 명장을 잃었다"고 할 정도로 핵심 인력이었다. "PDP 기술관련 기초자료를 지난 3년간 충분히 확보해 놓았다. 2~3년안에 자체 개발 PDP TV도 선보일 수 있다. PDP 사업은 10년 후엔 반드시 캐쉬카우가 될 것이다." 남은 것은 이사회의 최종 결정뿐. 여기서 거부되면 모든 노력이 끝이었다. 회의는 잠시 정회됐다가 다시 소집됐다. "현 경영진이 PDP사업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회 멤버들도 그동안 PDP사업의 타당성에 대해 조사를 해 봤습니다. 반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만큼 PDP사업에 250억원을 신규 투자하는 안건을 통과시킬 생각입니다." LG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 PDP강자로 군림하기 위한 진군 결정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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