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femme fatale), 남성을 유혹해 죽음의 고통으로 치닫게 하는 여자. 범죄 느와르 영화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성상이다. 영화 뿐 아니라 소설,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주인공이 ‘악녀’로 등장했는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관객은 그 치명적 매력에 끌려 극장을 찾고 드라마에 빠져든다. 1947년 미국 LA 외각 한 공터. 22살의 아름다운 무명 여배우 엘리자베스 쇼트(미아 커쉬너)가 엽기적으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양 입술이 귀까지 절단되고 몸통은 배꼽을 중심으로 예리하게 잘린 것. 이 사건은 언론에 ‘블랙 달리아’로 알려지며 미국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전직 복서 출신의 LA경찰국 수사대의 벅키(조쉬 하트넷)와 리(아론 에크하트)가 이 사건에 긴급 투입된다. 이들은 살인 사건을 파헤치지만 실마리는 잡히지 않고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사건에 강한 집착을 보이며 개인적으로 수사하던 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벅키는 실의에 빠진다. 이런 와중에 리의 애인 케이(스칼렛 요한슨)는 벅키를 유혹하고 피살된 쇼트와 비슷하게 생긴 매들린(힐러리 스웽크)이 나타나는데…. 내달 1일 개봉하는 ‘블랙 달리아(The Black Dahlia)’는 할리우드 느와르 거장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연출하고 조쉬 하트넷, 스칼렛 요한슨 등이 출연한 기대작. 감독은 ‘언터처블(1987)’ ‘칼리토(1993)’ ‘미션임파서블(1996)’ 등으로 국내에서도 수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다. 작품은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되기도 해 국내 개봉을 기다리던 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등장하는 모든 여주인공들은 성녀와 요부를 넘나들며 관객을 혼돈에 휩싸이게 한다. 케이, 매들린 그리고 살해된 쇼트에 이르기까지 주변 여성들은 벅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언제나 그렇듯 남자들은 팜므파탈의 유혹에서 자유롭기 힘든 것. 벅키와 주변 여인들의 관계는 갈수록 복잡하게 꼬여간다. 쇼트를 연기한 미아 커쉬너의 몽환적인 표정과 완벽한 악녀로 열연한 힐러리 스웽크의 연기가 단연 돋보인다. 극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벅키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여인들에게 “살인 사건의 법칙, 영원한 것은 없다. 비밀은 없다”고 말한다. 실제 벌어졌던 ‘블랙 달리아’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지만 감독은 영화 결말에서 범인의 정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감독이 엉성하게 범인의 실체를 밝히는 바람에 극적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드라마 줄거리는 다소 어수선하고 정돈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미스터리 스릴러는 거장이 다루기에도 정교하고 까다로운 ‘장르’임이 분명할 듯 싶다. /안길수기자 coolas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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