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틀 만들던 80년대까지 EPB가 주도
정부 주도 한계 노출되자 재무부 급부상
외환위기로 치명타 모피아 MB정부서 재기
근혜노믹스 중책 맡으며 EPB 다시 전면에
정책생산 능력 앞세워 모피아 반격 노릴듯
"종손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박근혜 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으로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장과 조원동 한국조세연구원장이 내정되자 경제기획원(EPBㆍEconomic Planning Board) 출신 전직 장관이 흐뭇한 목소리로 내놓은 관전평이다. EPB 출신에서도 경제정책국장(옛 경제기획국장) 라인은 '종손'으로 불릴 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번 인선을 계기로 역대 경제정책국장의 만남도 추진되고 있다. 바야흐로 EPB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모피아의 시대가 지고 EPB의 시대가 떠오르고 있다. 두 세력은 한국 경제사를 관통하는 양대 축이다. 정권이 바뀌는 동안에도 권력의 핵심부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어왔다. 모피아는 옛 재무부의 영문약자인 MOF(Ministry of Finance)에 마피아(Mafia)가 결합돼 탄생한 단어로 재무부에서도 특히 옛 이재국(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 출신 관료를 일컫는다. EPB가 기획과 예산이라는 방패를 갖췄다면 모피아는 금융과 세제라는 칼을 들고 있다. 거시경제의 큰 틀을 만드는 EPB는 시야가 넓다는 평가를 듣는 반면 모피아는 '마피아'라는 단어가 합쳐진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끈끈한 인맥을 자랑한다.
사실 박근혜 정부가 현 경제부총리 내정자와 조 경제수석 내정자를 지명하기 이전부터 EPB의 부상은 예견돼왔다. 이명박 정부에서 재무부 출신의 약진이 워낙 두드러졌던 탓이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회장, 윤증현 전 재정부 장관,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 변양호 보고펀드 대표, 김석동 금융위원장, 신제윤 재정부 1차관 등은 모피아의 획을 그어온 인물들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도 EPB 출신인 류성걸 의원은 포함됐지만 재무부 출신은 없었다. 박 당선인이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경제개발계획의 큰 그림을 그렸던 EPB 출신을 선호할 가능성도 점쳐져왔다.
사실 EPB와 모피아가 한국 경제를 주도하는 시기가 엎치락뒤치락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되짚어보면 한국 경제의 전환기나 정권교체와 맞물려 한쪽이 부상하면 다른 쪽이 수난을 당하는 일이 반복돼왔다.
한국 경제의 틀이 만들어진 지난 1960~1980년대만 해도 EPB의 전성시대는 영원할 것 같았다. EPB는 태생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경제권력이 집중된 막강한 공무원집단이었다. EPB와 재무부가 부딪치기 시작한 때는 정부 주도의 성장중심 경제정책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부터.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가 커지고 관치금융의 폐해가 불거지면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EPB와 실질적인 돈줄(금융ㆍ세제)을 쥔 재무부 간 힘겨루기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두 기관을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했다. 공룡부처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부처 내에서 EPB와 모피아 간 주도권 다툼은 더 격렬해졌고 재무부에 대한 EPB의 견제에는 점점 힘이 빠졌다.
모피아에 결정적 타격을 날린 것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손가락질이 뒤따랐다. 결국 재경원은 1997년 외환위기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받으면서 다시 기획예산처(예산)와 재정경제부(기획ㆍ세제ㆍ금융)로 분리됐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기획재정부(기획ㆍ예산ㆍ세제)와 금융위원회(금융)로 다시 쪼개진다.
EPB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 진념 전 경제부총리, 전윤철 전 감사원장, 강봉균 전 의원 등이 꼽힌다. 진 전 부총리의 경우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불도저 같은 업무추진과 원만한 조율능력을 인정받았다. 경제기획국장을 지낸 강 전 의원은 '강봉균 사단'이 따로 분류될 만큼 탄탄한 정책라인을 구축했다. 그 사단으로 분류되는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를 포함해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 박병원 은행연합회장, 윤대희 전 청와대 수석,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장병완 전 기획예산처 장관 등은 대표적인 EPB 선수들이다.
EPB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 다시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모피아의 몰락과 비교해 EPB와 모피아를 합성한 '이피아'라는 단어까지 등장한다. 최근 현 내정자와 조 내정자로 EPB 계보가 다시 급부상하고 있다. 류성걸 의원, 노대래 방위사업청장, 이수원 특허청장, 강호인 조달청장, 육동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등은 EBP 출신 차세대 주자로 꼽힌다.
하지만 EPB보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더 많이 받아온 것은 아무래도 '이헌재 사단'을 중심으로 한 모피아다. 이헌재 전 부총리가 IMF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로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대부(代父)' 이미지를 심었기 때문이다. 이 전 부총리는 1974년 금융정책과장을 달 때부터 김용환 장관의 방을 수시로 들락거려 '부(副)장관'으로 불렸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과 윤진식 의원은 비슷한 시기 이재국장과 금정과장을 지냈다.
윤 의원이 금정과장이던 시절 그 아래 사무관이 변양호 보고펀드 대표, 최중경 전 경제수석, 유재한 전 정책금융공사 사장, 김석동 금융위원장,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등이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금융정책실장을 지냈고 정건용 전 산업은행 총재와 유지창 유진투자증권 회장은 산업은행 전 총재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받는다. 이 밖에 임영록 KB금융지주 사장, 임승태 금융통화위원, 임종룡 국무총리실장, 추경호 금융위 부위원장 등도 모두 대표적인 모피아 군단으로 분류된다.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꽃피웠던 모피아의 전성기는 외환은행 매각,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겪으며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금융업계에 대한 정치권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모피아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광화문으로 이사를 강행하는 무리수를 둔 것도 훗날 '반격'을 감안한 노림수라는 추측도 있다.
당장 모피아에 시련이 닥치더라도 언제든 비집고 올라와 생명력을 과시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보인다. 실제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대 대통령들은 집권 초기 모피아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려 했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모피아를 다시 찾고는 했다. 그들이 뿜어내는 정책의 생산능력을 따라갈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관계자는 "새 정부도 재무부의 강점인 순발력과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필요로 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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