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5일 내놓은 내년도 예산안에서 특단의 경기부양책은 없었다.
예산안에 담긴 내년도 총재정지출은 342조5,000억원으로 지난해 정부가 발표했던 중기재정계획(2011~201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상의 지출계획(341조9,000억원)보다 고작 6,000억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는 경제위기 상황의 예산이 아니라 사실상 평시의 예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중기재정계획상 2013년 총지출은 경기가 이미 회복기로 접어들었음을 전제로 짜인 것인데 이번에 발표된 정부 예산안의 총지출은 이와 대동소이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말로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외쳤지만 실제로는 안이한 경기판단으로 미적지근한 예산을 짜는 결과를 나았다. 정부의 안이한 상황 판단은 예산안의 전제가 된 내년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정부가 제시한 전망치는 4.0%. 국내외 주요 기관은 이 같은 전망치 달성이 불가능하다며 일찌감치 2%대나 3%대로 전망치를 낮췄다. 심지어 비교적 우리 정부의 전망을 우호적으로 해석해왔던 국제통화기금(IMF)마저 이미 3.9%로 전망치를 내렸다. 정부는 4.0%나 3.9%나 비슷한 것 아니냐고 항변하지만 3%대와 4%대 성장률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평가다.
◇경기부양ㆍ균형재정 딜레마 갇힌 예산=정부가 이처럼 미적지근한 예산안을 편 것은 어떻게 해서든 내년에 균형재정을 달성하겠다는 고집에서 비롯됐다. 겉으로는 경기를 살리겠다면서도 실제로는 균형재정을 맞추려고 하다 보니 재정지출을 크게 늘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양새를 띠게 됐다.
예산의 총량뿐 아니라 개별 사업을 들여다 봐도 특별히 제목으로 뽑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밋밋하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4년 만에 늘려 잡고 일자리 지원을 늘리는 등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지만 '균형재정' 틀에 묶이다 보니 화끈한 경기부양책이 포함되지는 못했다.
SOC의 경우 부처 요구예산 20조8,000억원보다 3조1,000억원 많은 23조9,000억원을 배정해 그나마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산업ㆍ중기ㆍ에너지 분야는 부처 요구안(14조3,000억원)보다 1조4,000억원 늘린 15조7,000억원, 농림수산식품은 요구안보다 1조원 많은 18조3,000억원 배분되는 데 그쳤다.
균형재정 목표도 퇴색했다. 정부는 내년 관리재정수지가 4조8,000억원 적자로 국내총생산(GDP)의 -0.3%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관리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에서 사회보장성기금을 제외한 수치로 통상 재정건전성을 판단하는 지표로 쓰인다.
'균형재정'은 회계연도의 세입과 세출이 균형을 이뤄 적자가 없는 재정 상태를 뜻하지만 정부는 경기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엄격한 의미의 균형재정 목표를 고수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실제 GDP 대비 0.3% 이내의 적자는 유럽연합(EU)에서도 균형재정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부는 내년에 '실질적' 균형을 이룬 뒤 2014년과 2015년 관리재정수지를 GDP대비 0.1% 흑자로 돌려놓고 2016년에는 0.5% 흑자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장밋빛 경제전망에 발목 잡힐라=그나마 내년도 예산은 나은 편이다. 정부가 예산안과 더불어 제출한 새 중기재정계획(2012~2016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은 한층 더 가관이다. 새 계획의 내용을 보면 도대체 정부가 지금을 경제위기 상황이라고 인정이나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고용률 64.1%→67.1% 증가' '4년간 6대 주요 제조산업 수출총액 21.5%(520억달러) 증가' 등은 새 중기재정계획이 그리고 있는 대표적 장밋빛 전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올해 시행됐던 전면 무상보육 계획이 1년도 안 돼 무산된 상황에서 '공공보육시설 이용 두 배 이상 증가(19만2,000명→40만명)'라는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같은 장미빛 전망의 배경에 대해 정부 안팎의 해석이 분분하다.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현 정부가 임기 만료와 대선을 앞두고 치적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치우쳐 경기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다고 말한다. 반면 일각에서는 어차피 새 정부가 내년에 들어서면 신임 집권당의 정치색을 살리기 위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본예산을 보수적으로 잡았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본예산을 보수적으로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경기 전망을 낙관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장밋빛 경제 밑그림을 낳았다는 해석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번 예산에 대해 여야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보여 당초 낙관했던 올해 말 국회처리도 불투명하게 됐다. 한 민간연구기관 관계자는 "정부가 매년 다음해 예산안을 짤 때마다 경제전망을 낙관적으로 보는 습관이 있다는 비판을 받은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며 "자칫 정부 재정정책에 대한 대내외 신뢰도가 손상돼 앞으로 어떤 경기부양책을 내놓아도 약효가 반감될 우려만 낳았다"고 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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