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과도한 확장을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공정거래법. 80년대 초 처음 등장한 뒤 86년 1차 개정을 통해 지주회사 설립 금지 및 출자총액 제한 등이 추가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란 이름으로 붙으면서 사실상 재벌의 경제집중에 대한 강력한 규제법으로 자리잡았다. 문어발식 사업 다각화 등 재벌의 비경쟁 사업분야에 대한 무분별한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공정거래법이 20여년 동안 거둔 성과는 과연 어떨까. 공정거래정책 전문가인 신광식 연세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지별의 과도한 확장 억제라는 명분으로 재벌 규제가 시행되고 옹호됐지만 정작 재벌 기업의 실질적 계열 확장 행위에 대한 공정 거래법 집행은 거의 없었다”고 꼬집는다. 81년부터 2004년까지 대기업 집단과 비계열회사의 결합이 1,600건을 넘지만 공정위가 막은 것은 단 1건. 또한 지난 24년간 공정위가 심사한 총 8,090건의 기업 결합 중에서 다섯건 만이 금지됐으며 그나마 금지 사례들도 대부분 중소기업간 결합들이었다. 공정거래법상 경쟁제한 대상을 묶여있는 대규모 기업 결합들은 산업합리화, 국제 경쟁력 강화 등을 이유로 사실상 모두 허용됐다. 저자는 공정거래법이라는 잣대를 통해 대기업 집단을 규제했던 그동안 정부 정책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국내외 환경은 엄청나게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벌 등 국내 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 정책은 20년 전의 구시대의 틀 그대로라는 것이다. 과거 문어발식 확장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된 공정거래법은 더 이상 이 시대의 조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재벌규제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글로벌 환경과 충돌하게 된다. 외국 기업의 국내 시장 진출이 활발한 상황에서 재벌 규제는 한국기업에 대한 차별이 될 수 밖에 없다…재벌 기업들의 활동이 세계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에만 적용된 재벌 규제는 실효성을 갖지 못한 채 기업 의사 결정을 왜곡시킨다.” 저자는 재벌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접근 방식에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은 공정거래법은 물론 공정거래당국의 정책 역량에까지 미치고 있다. 법을 집행하는 정책 당국자가 충분한 역량과 전문성을 갖추어야만 실제로 부당한 경쟁제한이나 독점화 우려가 있는 기업 행위를 찾아내 수 있고, 기업들의 위법성을 제대로 심사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