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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한인사회 오늘:3(한민족경제권이 떠오른다)

◎뉴욕 ‘코리안 동부메카’ 뿌리내렸다/40만명 거주·청과상 등 업소 1만곳/검사·교육위원 탄생… 교포은 개설도/국내상사 대거진출… 「코리아웨이」 등장까지지난 90년 정초, 뉴욕시 부르클린의 처치 애비뉴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야채가게에서 주인과 흑인 고객 사이에 사소한 마찰이 빚어졌다. 이 사건으로 빚어진 한­흑간 불화는 급기야 미주 전 교포의 시위로 확대됐고, 2년후 LA 폭동를 예고케 했다. 뉴욕 한인들도 LA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민후 흑인 밀집지역에서 가게를 여는 것이 흔했고, 미국내 소수민족과의 인종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한인 사회 정착의 가장 큰 관건이었다. 한인들이 흑인 동네에서 상업을 하는 과정에서 흑인 거주민들과 한인 사이에 상호 의심이 존재하기 때문에 늘 긴장이 나타나고 있다. 브루클린 한인 상가의 갈등으로 흑인들은 흑인운동가들의 지휘를 받으며 연일 조직적인 보이콧 시위를 벌이면서 한국인 청과상을 고사시키려 했다. 그들은 이 기회에 흑인들이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있음을 과시하려고 했다. 부르클린 사태가 발생하자 뉴욕은 물론 미국 전역의 한인 교포들이 이번 사태에서 한인들이 밀리면 한인 전체가 미국 땅에 정책해 살아가는데 큰 타격을 받는다고 인식했다. 두 청과업소는 흑인들의 보이콧으로 하루 20∼30 달러로 매상이 줄었지만, 미국 전역의 한인들로부터 쏟아지는 성금으로 버틸때까지 버티는 힘들고 긴 투쟁을 벌였다. 법원은 흑인들의 시위가 불법이라고 판결했으나, 흑인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한 당시 딘킨스 뉴욕 시장은 강경 진압보다는 오히려 양비론적 입장에서 무마하려고 했다. 한인들은 시당국의 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9월 18일 1만명의 교민이 참여한 가운데 인종화합을 위한 평화대회를 개최, 힘을 과시했다. 마침내 한인들의 단결은 미 연방정부를 움직였다. 연방정부는 뉴욕의 한­흑갈등을 적극 중개, 흑인 시위자를 엄격히 처리함으로써 1년여를 끌어온 시위를 종지부지었고, 뉴욕 한인 사회는 마침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뉴욕 한인 사회는 20세기초 미국땅에 한인들이 발을 밟을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이민초기 한인이주자들은 미국 서부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동부지역에는 유학생이 약간 있었을뿐 본격적인 한인 사회 형성은 70년대가 시작되면서였다. 68년 미국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뉴욕에 한국인 이민자가 급증했다. 수적으로 늘어난 이민자들은 가발이라는 절호의 상품을 만나 가발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발을 한국의 수공을 뒷받침한 상품으로 상업에 눈을 돌린 교표들은 너도나도 손을 댈 정정도로 비즈니스가 확대됐으며, 새 이민자들에게 자본 형성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70년대 뉴욕 한인 사회는 한국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활성화됐다. 한국 수출품의 일정량을 한인 수입상이 할당받아 미국 사회에 팔았고, 한인 이민자들의 터전이 됐다. 한인 사회의 활동공간이 커지면서 서덕으로 갔던 광부와 간호원, 남미로 갔던 이민자들도 뉴욕땅으로 몰려왔다. 72년 뉴욕 인근 한인수는 2만명에 육박했으며, 2년후에 다시 4만으로 늘어났다. 한인들의 증가는 한국 교회의 증가로 나타났다. 뉴욕 한인교회, 뉴저지 한인교회, 브루클린 한인교회 등이 그것이었다. 74년엔 뉴욕주 차량국이 한인 교포들을 위해 한국어로 운전면허시험을 볼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고, 한국전통불교인 원각사도 포교를 시작했다. 75년이후 한국 지사, 상사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뉴욕에만 지상사가 40여개나 밀집했다. 뉴욕 한국일보 통계에 따르면 79년 당시 뉴욕 일원의 한인 인구는 6만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청과상(3백50개), 어물상(80개), 봉제업(1백50개), 잡화업(2백개)등에 종사했다. 한인 종교단체도 77개나 돼 어엿한 한인 코뮤니티가 형성됐다. 80년대는 뉴욕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팽창한 시기였다. 한인 경제가 본격적으로 팽창했고, 매년 2천명씩 이민자가 늘어났다. 70년대 몇백개에 불과했던 한인 업소들이 80년대엔 1만개 업소를 상회했다. 한국계 은행들의 진출도 두드러져 외환, 상업, 제일, 조흥은행등 10여개 은행들이 한인 밀집지역에 개설됐고, 86년엔 교포은행으로 브로드웨이 내셔널 뱅크가 설립됐다. 85년 뉴욕 교민들이 한국에 송금하는 달러만 해도 1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한인 사회는 팽창했다. 그러나 한인 사회의 팽창은 다른 민족과의 마찰, 한인사회 자체의 문제를 불거지게 했다. 한인 업소간 과당경쟁, 사기사건등이 속출하면서 이민사회의 어두운 면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한인 여성들의 불미스런 사건이 현지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80년 2월 대낮 한인업소 살인사건을 필두로, 한인청소년 범죄, 마약 범죄 등 한인 사회의 미국화가 문제점으로 대두됐다. 88년엔 맨해튼 할렘과 부르클린, 퀸즈 자마이카등 흑인 지역에서 한인 거부시위가 장기간 계속됐다. 또한 주류사회에 진입하는 한인들도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85년 한인변호사 김광호씨는 뉴욕 퀸즈 검찰청 검사로 발탁됐고, 89년 뉴욕 퀸즈 25학군에서 이한영씨, 뉴저지 웨인 지역에서 김기희씨가 교육위원에 선출됐다. 90년대 들어 뉴욕·뉴저지 일원의 한인수는 40만명에 육박했고, 한국정부의 국제화 추세에 발맞춰 한국 기업의 지상사들이 뉴욕에 대거 설치됐다. 특히 92년 LA 폭동이후 미국 서부의 한인들이 동부로 이주하는 추세를 보여 뉴욕은 미국 동부 한인 사회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뉴욕 로어맨해튼에는 한국인 밀집지역에 「코리아 웨이」라는 거리명칭이 뉴욕 시정부에 의해 정식 명명돼 있다. 뉴욕 플러싱의 코리아타운은 LA 한인 타운에 버금갈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최근에는 뉴저지 버겐 카운티, 모리스 카운티등을 한인 거주지역이 확대되는 추세다. 지난 80년부터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에는 코리아퍼레이드가 열린다. 세계의 중심 뉴욕 맨해튼 거리에 한복 물결이 넘실 거리는 것도 올해로 17년째다. 뉴욕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정착하면소 미국화에도 노력했지만, 한국 언어와 문화를 지키는데도 엄청난 노력을 해왔다.<뉴욕=김인영 특파원> ◎국제결혼 교포여성 현황/워싱턴주에 1만명 “최대”… 남편 59%가 현역미군 미국내 한인들은 갈수록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초기 국제결혼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미군이나 미군 군속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국제결혼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지난 80년대말까지 10만명의 한국 여성들이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국제결혼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워싱턴주 타코마, 텍사스주 샌안토니오·킬린등으로 이들 주에는 적어도 만명 이상의 한인 여성들이 살고 있다. 캔사스주 정션, 애리조나주 시에라비스타, 하와이 등지에도 1천명 정도 국제결혼한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시민권을 취득한 비율이 아주 높다. 남편은 85%가 백인, 2%가 라틴계, 0.4%가 흑인이었고, 남편의 과반수(59%)가 현역군인이다. 국제결혼한 한인여성들은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한인 사회보다는 미국사회에 살고 있다. 이들은 외롭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주위의 한인 여성을 만나서 향수를 달래기도 한다. 언어 소통의 문제, 시가와의 문화의 차이, 자녀들의 멸시 등을 겪기도 했으나, 95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필 그램 상원의원의 부인인 웬디 그램 여사는 성공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1.5세나 2세 한인의 경우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이 상승하는 추세다. 한인 2세의 20% 정도가 타민족과 결혼하는데, 남성보다 여성들에게서 그 비율이 높은 편이다. ◎인터뷰/조병태 해외한인 무역협회장/550만 지구촌동포 현지 무역거점 활용/고국경제회생 도울터 『해외 동포들이 한민족 경제권 창출에 앞장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외 교포들은 각각 흩어져 살았고, 현지화하는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호 비즈니스 정보를 교환할 때입니다.』 조병태 해외한인무역협회장(52)은 지난 10월 뉴욕에서 제2회 해외한인 무역협회 총회를 개최한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화교공영권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세계 은행은 21세기초에 중국이 GDP(국내총생산)에서 미국·일본을 앞지른다고 발표한 바 있어요. 그 배경에는 전세계에 산재한 화교들이 자기 조국에 돈뿐만 아니라 선진 기술·정보·문화까지 전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인도교포들까지 이를 모방하고 있질 않습니까.』 조회장은 한인 무역협회도 화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21세기 무한 경쟁사회에서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해외동포, 특히 무역인들을 현지 거점 조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의 세계화에 기본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5백50만 해외교포들도 조국을 위해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할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총회의 최대 성과라면 21세기 글로벌 경쟁 시대에 대비한 코리안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를 위해 인터넷 웹사이트(www.okta.org.com)을 개설한 것. 일본, 중국, 구소련, 미국 지역의 한인 무역상은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 레바논, 페루, 브라질, 인도에서 사업을 하는 한인들이 참여했다. 그는 지난 75년 29살의 나이로 모자 샘플 한 가방을 둘러매고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사업 초기에는 지하철을 타고 백화점을 직접 방문하며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그 흔한 중고차 한대 살돈도 없었다. 23년간 모자 판매에만 종사하면서 연간 3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 미국에서 모자왕이라고 불리울만 하다. 그가 운영하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공장을 방문하면 온갖 모자가 굴러다닌다. 연간 2천만개의 모자를 팔아 미국인 3명중 한명은 그의 모자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는 지난 10월 뉴욕 대회를 치르면서 개인돈 수십만 달러를 썼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을 쓰는게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선조들은 독립운동을 했지만, 지금 해외동포들은 한국 경제를 살리는데 앞장 서야 한다』며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당연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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