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잖은 체 빼면 시체인 당신. 한 번쯤은 사무실 구석에 음란 인터넷 창 하나 콩알만하게 띄워 놓고 부하직원 눈치 보며 힐끔 거리진 않으셨는지. 한밤 중, 아이들과 아내 잠든 틈에 몰래 야한 동영상을 보며 숨을 몰아 쉬진 않으셨는지. 치부가 드러났다고 생각하신다면 마음 푹 놓으시길. 공맹(孔孟)의 도가 하늘을 찌르던 조선시대에도 풍경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단원 신윤복의 그림들과 이름 모를 작가들의 춘화(春畵)는 지금 기준으로 치면 ‘제한상영가’ 수준에 다름 아니다. 영화 ‘음란서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점잖은 양반에 대한 조롱과 풍자, 그리고 욕망을 숨기지 않는 인간의 솔직한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가 말하는 ‘음란’의 정의는 대략 이러하다. ‘꿈 꾸는 것 같은 것, 꿈에서 본 것 같은 거,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거…’. 윤서(한석규)는 조선조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소심한 성격에 권태로운 삶에 지친 그는 어명을 수행하던 어느 날 저잣거리에 흘러 다니던 ‘난잡한 책’을 접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단어들은 묘한 쾌감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음부’같은 단어 말이다. 급기야 ‘추월색’이라는 필명까지 짓고 직접 음란소설을 쓰는 윤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지면서 글에 대한 욕심도 더해져 간다. 힘찬 그림으로 소문난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을 삽화가로 섭외하더니 급기야 받아들여서는 안 될 ‘왕의 여자’ 정빈(김민정)의 유혹까지 글감을 위해 거침없이 용납한다. 그러나 그 책이 정빈에게 흘러가게 되면서 윤서는 상상하지 못한 위험에 빠진다.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의 시나리오를 쓴 김대우 감독의 데뷔작. 시나리오에서나마 전작에서 뽐냈던 화려한 배경 묘사가 이번 영화에서 역시 시쳇말로 ‘먹어준다’. 빨강, 파랑이 어우러진 인물들의 복장부터, 영화의 주된 배경인 저잣거리 유기전까지 한 땀 한 땀 짜낸 디테일이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정통 역사를 다루지 않은, 상상력만으로 그려낸 사극의 한계를 미술장치의 화려함으로 단박에 넘어선다. 영화의 포인트는 두 지점으로 나뉜다. 점잖은 체 하는 양반에 대한 조롱과 함께 오늘날 ‘인터넷 문화’에 가까운 현대와의 만남. 영화의 정의대로 어차피 음란이란 ‘꿈에서라도 맛 보고 싶은 것’, 바꿔 말하면 ‘꿈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윤서는 현실에선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음란의 욕망과 상상력을 글에서나마 마음껏 풀어놓는다. 점잖은 양반의 허울을 어렵사리 벗어 던지고 자신의 상상력이 활자로 풀어지는 순간, 윤서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자유를 얻는다. ‘댓글’ ‘폐인’ 등 오늘날 인터넷 게시판에서나 통할 법한 말들이 조선 사극 영화 속에서 살아 숨쉬는 지점 또한 관객들의 웃음보를 자극한다. 어차피 ‘음란’이 시대를 막론한 동일 코드인 것처럼 구석진 욕망에 대한 열광 역시 시간을 초월하긴 매한가지. 다만 영화 초반부의 느린 극 전개는 자칫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관객들의 진을 빼놓을 만큼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왕의 남자’에서 희극과 비극이 뒤엉켜 관객들의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빼 놓은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심각한 장면과 웃긴 장면이 확연하게 분리돼 오히려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음란’이라는 원초적 욕망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가 오히려 웃음과 심각한 메시지를 나누는 아이러니에 빠진 건 아닌지. 한석규와 이범수, 김민정 등 주연진은 요즘처럼 연기력 안 되는, 기본 발성조차 되지 않는 배우들이 인기를 얻는 사이에서 기본기란 뭔지를 확실히 보여줄 만큼 빼어난 매력을 드러낸다. 엔딩 크레딧에 덧붙여진 장면은 일어서는 관객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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