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오래된 연인 같았다. 말과 몸짓이 없어도 눈빛 하나만으로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있는. 창단 10년. 6년만의 재회. 지난 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아시아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부활을 알리는 축제의 향연 한마당을 펼쳤다. 1999년 12월. 2000년 신세기를 맞는 ‘밀레니엄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긴 동면에 들어갔던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아시아 최고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던 거장 정명훈의 욕심은 밀레니엄을 맞는 화려한 팡파르와 함께 역사 속에 사라지는 듯 했다. 아시아 필하모닉은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모아서 만든 프로젝트 성격의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아니면 이루기 힘든 거사(巨事)였다. 세계적인 음반사 도이체그라모폰이 이 오케스트라의 창단 연주를 음반으로 낼 정도로 관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저마다 바쁜 일정과 재정적 이유로 몇 차례 연주회를 끝으로 ‘식물 오케스트라’가 될 뻔했다. 유명무실해진 아시아 필하모닉을 콘서트 무대로 불서 세운 건 지역 예술 축제인 ‘인천&아츠’.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자리에 춤이 빠지면 서럽다. 그래서 이날 연주회 곡들은 모두 신명 나는 춤곡들로 채워졌다. 셰익스피어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날 부활의 축가로 변했다. 첫 무대는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에프의 춤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Op.64)’. 오랜 서방생활을 마치고 소비에트에 돌아 온 일년 뒤, 그의 나이 44세이던 1935년에 완성된 발레 음악. 모더니즘 성격이 강한 프로코피에프 음악에 얼음장같이 찬 반응을 보였던 소비에트 공산당국의 냉냉함을 녹인 곡이다. 화려하고 대담한 프로코피에프의 선율은 정상의 연주자와 지휘자 손끝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빈틈없는 현의 울림과 주저함 없는 관악의 질주는 왜 이들이 아시아 출신 최고의 연주자들인지를 입증해 준다. 휴식이 끝난 뒤 시작된 레너드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 무곡’. 역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한 춤 모음곡. 미국의 지휘자 겸 작곡가인 번스타인의 성공적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흥겨운 춤곡으로 탈바꿈했다. 50년이 넘은 오래된 친구들처럼, 척척 들어맞는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호흡은 물결처럼 줄줄 흘러간다. 흥겨운 ‘맘보’ 리듬에 이어진 곡 ‘쿨 푸가(Cool Fugue)’와 ‘결투’에선 오케스트라 포병 부대인 관악의 힘이 빛을 발한다. 뒤를 이어 ‘피날레’ 장면에서 보병부대 현악 파트의 나지막하면서도 그윽한 선율이 두시간여 감동의 시간을 정화시킨다. 마지막 곡 라벨의 ‘라 발스(왈츠)’가 끝나자 벌써부터 그들의 소리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한 여름 밤 단꿈을 꾸게 해준 아시아 필하모닉. 이날 연주회의 부제로 달린 ‘부활’ 이란 단어 앞엔 ‘화려한’이란 수사를 달아야 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