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인 재정을 풀고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수준으로 낮추면서 시중에 돈은 넘쳐나지만 정작 필요한 곳에는 흘러가지 못하는 '돈맥경화'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돈이 원활히 순환하는지를 보여주는 통화승수가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심장(정부·한국은행)'에서 열심히 혈액(돈)을 뿜어내는데 혈관이 꽉 막혀 부동산 등 특정 부문에만 피가 고여 있고 신체의 끝 부분까지 닿지 못하는 현상이 가속화하는 셈이다. 우리 경제가 돈을 풀어도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는 진단이 힘을 얻는 가운데 처방은 제각각이다.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작업이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과 오히려 더 화끈하게 돈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돈은 넘치는데…부동산, 단기 투자대기처로만=일단 시중에 돈은 무섭게 불어나고 있다. 11일 한은의 '1월 중 통화 및 유동성'을 보면 돈이 풀린 정도를 보여주는 광의통화(M2) 잔액은 2,088조6,000억원(평잔)으로 1년 새 152조2,000억원(8%) 급증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3.4%)의 2배가 넘는다. 통상 경제가 팽창할수록 통화량도 늘기 마련이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하지만 풀린 돈이 경기회복에 필요한 실물에 흐르지 않고 부동산시장에 몰리거나 대기성 자금으로 단기 부동화하는 게 문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부동산 펀드 설정액은 지난해 말 29조6,000억원에서 약 2개월 사이 1조6,000억원(5.4%)이나 불어난 31조1,900억원(6일 기준)에 달했다. 부동산 청약시장에도 수천억원의 돈이 몰리고 있다. 대표 투자 대기자금 집합소인 머니마켓펀드(MMF) 잔액도 지난 1월 67조4,000억원으로 1년 새 19조원(39.2%) 폭증했다.
◇소비, 투자 안해…통화승수 사상 최저=정상적인 경제라면 심장(정부·한은)에서 공급된 혈액(돈)은 소비와 투자로 이어져 전체 경제성장률을 견인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 가계는 고령화, 불어나는 주거비용, 원리금 부담 등으로 지갑을 열지 않고 있으며 기업 역시 투자를 꺼리며 돈을 쌓아둬 시중에 자금이 원활히 돌지 않고 있다. 일례로 기업이 보유한 유동자금은 1월 현재 522조원으로 1년 새 15조원(3%) 불었다. 이에 따라 통화승수는 사상 최저로 곤두박질쳤다. 1월 통화승수는 18.47배로 통계가 집계된 2001년 12월 이후 13년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지난해 8월(18.82배)보다도 낮은 수치다.
◇돈 그만 풀고 구조개혁해야 VS 선진국처럼 더 화끈하게 풀어야=지난해 금리를 내린 후 반년이 지나도 경기가 오히려 더 나빠지자 우리 경제가 유동성 함정 국면에 진입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부쩍 늘고 있다. 통상 금리 인하의 효과는 6개월 후 나타나는 데 지난해 8월 금리 인하 후 최근 경기 회복세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영세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두 차례 금리를 인하했지만 경기를 살리는 효과가 미미하다"며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도 "추가로 금리를 내릴 경우 실익보다는 가계부채, 투기 가능성 등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화끈한 통화정책으로 경제를 살린 미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은 2007년 8.8배였던 통화승수가 2013년 3.3배까지 곤두박질쳤으나 양적완화를 멈추지 않았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금리를 내리면 가계부채가 늘어나지만 그래야 부동산 가격도 올라가고 자산효과로 소비도 늘어날 것"이라며 "다만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는 것을 막는 미시적 대책이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정위기가 터진 후 긴축정책을 펴다가 5년이 지난 지금에야 돈을 풀기 시작한 유럽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용어 설명
◇통화승수=중앙은행이 공급한 화폐가 시중에서 몇 배의 통화를 창출했는지를 나타낸다. 승수가 높을수록 시중의 돈 흐름이 활발해 경제가 잘 굴러가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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