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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스토리] 미두장의 일본인

1920년대 한 일간지에 실린 증권 시황 기사.


"미두장(米豆場) 정문 앞 사람 무더기 속에서 웃음소리가 '와아'하고 터져나온다. 정 주사는 시방 미두장 앞 큰 길 한복판에서 다 같은 '하바꾼'이로되, 나이 배 젊은 애송이한테 멱살을 당시랗게 따잡혀 가지고는 죽을 봉욕(逢辱)을 당하는 참이다. 시간은 오후 두 시 반, 후장(後場)의 오사카 시세 이절(大阪 市勢 二節)이 들어오고 나서요. 절기는 바로 오월 초생, 싸움은 퍽 단출하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도 않는다."

소설가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의 도입부인 '인간기념물'에 나오는 대목이다. 군청 서기에서 퇴직한 뒤 미두꾼으로 나섰다 결국 밑천만 날리고 하바꾼(미두도박꾼) 처지로 전락한 정 주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무대는 '군산 미곡취인소'로 일본 오사카증권거래소의 미곡 시세를 기준으로 쌀 등 여러 곡식을 사고팔았다. 당시 전화로 가격이 결정되던 대판 시세는 미두장 시세에 그대로 반영된다고 해 '사진시세(寫眞時勢)'라고 불렸다.

과거 1921년 한 일간지 증권 지면에도 현재 시황면에 해당하는 '상황란(사진)'이 있었다. 대판의 주식과 상품 시세가 먼저 나오고 경성 주식시세와 인천 미두시세가 연이어 게재되는 식이었다. 당시 미곡 시세 변동을 이용해 차익을 챙기는 투기행위가 성행했다.

하지만 조선인(국내 투자자)들이 수익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 세계 최초 선물시장인 오사카 도지마 쌀선물 거래소에서 흘러온 일본인들이 거래를 주도하고 있어 조선인들은 순식간에 그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역사가 흐르면서 과거 미두장은 증권시장으로 바뀌었다. 전화 몇 통에 움직이던 시세는 현재 시스템상 전산매매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다. 국내 증시가 주변 국가는 물론 외국인 임직임에 좌지우지되는 현상이 그것.

대상만 일본인에서 다국적의 외국인으로 넓어졌을 뿐 국내 증시가 외부 충격에 흔들리는 현상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세월이 지났어도 국내 증시 체질 강화는 늦어서일까. 예나 지금이나 골리앗(외국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다윗(국내 투자자)의 신세가 가끔은 처량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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