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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씨 타계] 사회에 끼친 영향

'불도저 경영'으로 한국인 저력 입증정주영의 인생은 한국경제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있다. 길게보면 1938년 23세의 나이에 쌀가게인 경일상회를 열고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지 63년, 짧게봐도 지난 47년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을 설립한 지 54년 동안 그의 인생은 경제인으로 채워진다. 그가 경제에 미친 영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으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우리경제를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건 몰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보기좋게 성공시키면서 한평생을 보냈다. 건설에서 토대를 닦아 시작한 조선업이 그랬고,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 건설에서 그가 일군 업적을 보면 대부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신화'다. 단군 이래 가장 큰 사업이라고 불린 경부고속도로의 40%를 맡아 건설했다. 20세기 최대공사로 불렸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현대'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경영자로서 그의 업적 가운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경제가 도약기를 맞던 지난 76년부터 87년까지 '재계의 수장'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단체장을 맡아 국가경제 부흥에 온 힘을 쏟았다. 그가 이룬 경제적 업적에 대한 평가 역시 '신화적'인게 많다. 프랑스의 한 잡지는 울산의 현대 계열사를 취재한 뒤 그의 모든게 녹아있는 '울산시'를 '현대시'로 표기하는 '실수'를 저질른 '사건'을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지난 99년 홍콩의 경제전문 주간지인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중국의 덩 샤오핑,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20세기 아시아인 10걸'로 그를 꼽았다. 숭실대에서는 '정주영 창업론'강좌를 개설하는 등 경영자로서 그의 업적은 단순히 '경제인'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북방과 남북화해를 이끌어낸 '민간외교관'이었다. 달리는 외교관인 자동차로 한국과 현대를 세계 거리마다 심던 그는 수교가 이뤄지기 전 구 소련을 비롯해 중국 등 북방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기회가 날 때 마다 현지를 찾아 민간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자원개발이 가장 큰 이유. 그는 "자원을 확보하는게 애국이다"며 시베리이 가스전개발, 원유개발 등에 정열을 쏟았다. 북방경협의 절정이 남북경협이다. 경협을 통해 그는 남북화해 무드를 이끌어 냈다. 특히 지난 98년 6월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는 드라마를 펼치면서 남북관계에 대한 그의 기여도는 누구보다 크다. 당시 정주영회장은 "민간 기업인이 처음으로 판문점을 여는 것 자체가 남북통일의 첫 삽을 뜨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를 판 돈을 갖고 가출한 일을 회상하며 "이제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후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키는 등 대북경협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가 대북경협과 통일에 쏟은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남북관계는 아마 좀더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스포츠분야에서도 그를 뺀다면 할말이 적어진다. 그는 지난 81년 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모두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올림픽위원장에 피선된 지 5개월만에 큰 일을 냈다. 또 대한체육회장과 올림픽 조직위 부위원장을 맡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열정을 바쳤다. 축구를 비롯 야구, 농구, 배구, 양궁, 씨름등 스포츠팀 육성에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우리나라 대중스포츠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데도 기여했다. 사회적 영향도 크다. 그는 "할 수 있다"는 격언을 현실로 만들었다. 수많은 맨몸으로도 한국 최고의 기업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온 국민들에게 스스로 갖고있는, 그러나 가려져있던 한국인의 저력을 입증한 사람이다. 물론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대선에 참여함으로써 기업인의 정치활동이라는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자신은 '실패'가 아니라고 하지만 대선참여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인생에서 드믄 '실패사례'로 기록돼 있다. 그는 대선에 참여하면서 "구국의 일념에서 나왔다"며 "집권하면 우리나라 발전을 50년은 앞당길 수 있다"고 역설했다. 정치가 국가경제에 짐만되는 현실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는게 그가 직접 정치활동에 나선 이유다. 정주영은 98년에 간행한 '이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라는 회고록에서 "기업을 경영하면서 수많은 정치인들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존경할 만한 정치인은 만난 적이 없었다"며 "경제만 잘되고 있다면 누가 정치판에 끌어 들이려 해도 끌려 들어갈 내가 아니었다"고 대선 출마를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이 정치활동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고있는게 현실이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듯 나간다'는 뜻이다. 그가 평소 즐기던 시구다. 세월의 강에 밀려 그는 우리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의 영향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많은 이들에게 장강처럼 물결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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