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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5막 2장·끝> 막을 내리며

'황제' 는 사라졌어도 대우는 살아 있다

'영광의 부활' 알리는 불빛 그룹 사장들에게 "해외로 나가라" 고 호령하던 김우중 회장. 그는 쓸쓸하게 대우를 떠났다. 그러나 그것이 대우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우중 없는 대우', 대우맨들은 힘들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옥포조선소를 화려하게 비추는 불빛은 '영광의 부활' 을 의미하는 새로운 상징이었다.(사진 오른쪽) /서울경제 DB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막을 내리며 '황제' 는 사라졌어도 대우는 살아 있다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99년11월 金회장은 기약없는 해외유랑 ㆍ국민도 "대우는 망했다" 고개 돌렸지만 남은자들, 뼈깎는 노력으로 대우 살려내 ㆍ"그룹해체 음모…" "時運탓한들…" 반응속 대우맨들 "치열한 도전정신은 계속될것" ㆍ'CEO김우중' 무조건 폄하 아닌 긍정평가를 김우중 회장의 인생은 '과거형'이 아니다. 그가 거쳐온 경영인생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와 연(緣)을 맺은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사회를 이끌고 있다. 소중하게 키워온 분신(分身)들은 패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어느덧 우리 경제에 귀중한 밀알이 됐다. 김 회장 자신도 언젠가 화려하게 부활해 못 다 이룬 세계경영의 꿈을 되살릴지 모를 일이다. 아니 많은 국민들은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순간에도 그의 인생이 '현재형'이고 '미래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5년8개월의 긴 유랑생활이 끝내고 초췌한 모습으로 국민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들은 그로서는 매우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에게 족쇄를 채웠던 주역들은 이미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진 후였다. 수많은 대우맨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돌아온 김우중’. 대우맨들은 “모든 것을 책임지기 위해 귀국했다”는 그의 말에서 그와 함께했던 영욕(榮辱)의 시간들을 이내 기억해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들에게 남겼던 회한 섞인 작별의 편지를 되새겼다. ‘(대우) 임직원과 가족 여러분께 드리는 글’ “…대우의 지난 세월에는 국가와 명예와 미래를 지향하는 꿈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웠던 여정은 오늘 국가경제의 짐으로 남게 됐으며 우리의 명예는 날개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함께했던 꿈과 이상 또한 가눌 수 없는 고독이 돼 제 여생의 반려로 남게 됐습니다. 구조조정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빚어진 경영자원의 동원과 배분에 대한 주의소홀과 용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위기관리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초래된 판단오류는 가슴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조차 하지 않겠습니다. 대우의 밝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라면 지나온 어두운 과거는 스스로 짊어질 생각입니다. 제가 떠나도 대우만큼은 우리 경제를 위한 값진 재산이 돼야 합니다…” (99년 11월22일) '영광의 부활' 알리는 불빛 그룹 사장들에게 "해외로 나가라" 고 호령하던 김우중 회장. 그는 쓸쓸하게 대우를 떠났다. 그러나 그것이 대우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우중 없는 대우', 대우맨들은 힘들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옥포조선소를 화려하게 비추는 불빛은 '영광의 부활' 을 의미하는 새로운 상징이었다.(사진 오른쪽) /서울경제 DB 67년 단돈 500만원으로 세운 대우실업을 32년 만에 재계 2위로 끌어올린 김우중 신화는 이렇게 쓸쓸하게 막을 내렸다. 76년 입주 후 반세기 동안 대우호의 주추 역할을 한 대우센터 25층의 김 회장 집무실은 “내 사무실을 더 이상 유지하지 말라”는 뜻에 따라 그가 떠난 이틀 뒤 잠겼다. ‘황제 김우중’의 몰락과 공룡 대우의 해체. 그것은 신화의 전도사로 세계 곳곳을 누볐던 대우맨들을 실패한 병사로 전락시켰다. ㈜대우의 이사였던 S씨는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지금도 대우건설에 재직하고 있다. “대우에서 30년을 근무해왔습니다. 몰락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심정이 얼마나 허무했던지…. 대우 기사가 나올 때마다 가족에게 부끄러웠고 무력감마저 느꼈습니다. 내가 일한 곳이 이렇게 파렴치했나….”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공허함, ‘패자’인 그들에게 더 이상 동정은 없었다. 대우맨 수만명 중 상당수는 낯선 조직의 그늘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중에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걸려든 사람들도 있었다. 2004년 3월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한강 투신 자살…. 검찰 조사를 받던 중 비명에 간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세 당당했던 대우의 세계경영의 첨병들도 고개를 숙였다. ‘점령군’인 채권단의 관할에 들어가면서 돈 한 푼 지출하기 위해서도 일일이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았다. 더 이상 그들에게 영국금융센터(BFC)라는 마르지 않는 未鳧?젖줄은 없었다. ‘킴기스칸’ 김 회장이 일군 396개의 광대한 해외 네트워크는 뿌리째 흔들렸다. 세계경영의 끝은 이처럼 비참했다. 국민들은 “대우는 망했다”는 표현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워크아웃, 그것을 김우중의 종말이자 대우의 죽음이라 믿었다. 세인(世人)들은 병살(病殺)이냐 타살(他殺)이냐에 담겨진 살(殺)이란 말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김우중 없는 대우’, 하지만 그것은 결코 ‘대우의 패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우의 역사는 도전과 창조ㆍ희생의 정신이 땀으로 교직된 정합(整合)이었다. 그 정신이 대우를 살려냈다. 살을 베는 구조조정. 김 회장의 가신이었던 경영진은 대거 물갈이됐다. 직원은 절반으로 줄었고 조직은 몇 토막으로 잘라졌다. 자식과도 같았던 해외 공장과 법인들은 현지 정부로 넘어갔다. 세계경영의 첨병이었던 대우차 해외 법인들마저 무심하게 팔렸다. 힘겨운 시간의 연속…. 결실이 맺히기 시작했다. 대우차의 전위부대를 맡았던 대우조선이 가장 먼저 달라졌다. 단숨에 세계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장을 석권했다. 그리고 워크아웃 2년 후인 2001년 8월23일. 대우 옥포조선소에 작은 파티가 열렸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12개 계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졸업한 것이다. 회사의 곳간 열쇠를 쥐고 있던 은행 관리단도 떠났다. 졸업을 기념하는 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정성립 사장은 웃음을 머금었지만 얼굴에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BFC의 망령이 깃들었던 ㈜대우의 환골탈태는 한마디로 눈부셨다. 분리된 대우건설의 2004년 매출액은 4조7,800억원, 대우인터내셔널은 5조100억원을 기록했다. 부실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99년 1조2,000억원이던 ㈜대우의 매출은 8배나 튼실하게 몸집을 키웠다. 많은 사람들이 형장에 갇혔지만 남은 대우맨들은 날개를 폈다. 대우 기획조정실 출신의 이태용 대우인터내셔널 사장, 해외 영업통인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 ‘푸르지오’를 만들어낸 박세흠 대우건설 사장, 가전 명가의 명성을 되찾고 있는 김충훈 대우일렉트로닉스 사장, 지금은 두산중공업으로 넘어갔지만 대우종합기계를 튼실하게 키워낸 양재신 전 사장(현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과 손복조 대우증권 사장, 그리고 버스업계의 신화가 된 최영재 대우버스 사장과 이동호 대우자판 사장, 김석환 대우인천차 사장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이제 재계를 대표하는 어엿한 스타 CEO가 됐다. 영광의 부활. 물론 마음속 응어리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적지않은 대우맨들은 여전히 “그룹을 끝내 해체했어야 했나”라는 근본적인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두산으로 주인이 바뀐 대우종합기계 출신의 중견간부가 던진 말은 대우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봤을 법하다. “천번을 생각해도 대우 해체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보지 않아요. 음모론이란 말만 들으면 귀가 솔깃해져요.” 많은 대우맨들이 ‘대우 해체의 비밀’이란 문구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워크아웃 6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원통함 뒤에는 자책감도 묻어 나온다. 대우의 또 다른 계열사 임원은 “이제 스스로를 냉철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이런 말을 꺼냈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하지만 변해가는 환경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느냐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경영진도 너무 미련이 많았어요. 자동차 매각도 그렇고….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황제식 경영’이란 오명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적어도 회사를 같이 일궜던 원로들의 말은 들었어야 했는데. 패착이었죠. 이제 와 ‘환란만 아니었으면?繭窄?시운(時運)을 탓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죠.” 대우맨들이 김 회장의 열정을 그리도 높게 평가하면서도 가슴 한편의 서운함을 지울 수 없는 것도 ‘황제 김우중’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들이 교차하기 때문일 것이다. 초창기 대우 구조조정을 집도했던 오호근 전 의장의 평가는 그런 면에서 매우 냉정하다. “워크아웃에 들어갈 때 오늘날 대우가 이리도 좋아지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대우가 패망했다고요, 천만의 말입니다. 대우는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대우의 멸망이 아니라 황제경영의 패망입니다.” 김우중. 그의 몰락은 절정에 이른 순간 황제의 모습에 빠졌던 ‘왜곡된 신화’의 몰락일 뿐이다. 그가 경영인으로서 가졌던 세계시장에 대한 도전정신과 낯선 이국 땅을 개척하며 동양의 작은 나라 ‘코리아’의 힘을 내외에 과시한 그의 열정마저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CEO 김우중’을 무조건 폄훼하는 것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자 또 한번의 역사적 오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부정’뿐 아니라 ‘긍정’을 골라 이행할 의무가 있다. 대우의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에서 25년 동?대우를 지켜본 최종욱 전 워크아웃팀장이 평가한 대목은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잘못된 경영행위들을 열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계시장을 향한 마음 속에는 국가 경제를 생각하는 사명감이 분명히 있었다고 믿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개발도상국을 사실상 경제 식민지로 만들었듯이….” 대우인터내셔널의 한 간부, “과거 영광스러웠던 시절, 10년 넘게 미친 듯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며 남긴 그의 말은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 여운을 남긴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결국 실패한 모델이 됐죠. 하지만 적어도 대우맨들의 치열한 도전정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바닥에서, 유고연방에서, 총알이 날아다녔지만 다른 나라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와 중남미의 적성국가에서도. 그 정신은 대우를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대우가 살아 있는 한 그 정신은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입력시간 : 2005/07/1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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