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자본시장과 비교했을 때 국내 자본시장은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입니다. 하루빨리 도약을 위한 초석 다지기에 나서야 합니다."
자본시장법이 시행된 지 1년6개월이 지났지만 국내 증권회사들은 여전히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9년 2월4일 법이 처음 시행될 때만 하더라도 자본시장 발전의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국내 증권사들은 투자손실을 줄이는 데 급급하면서 대형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우는 데는 실패했다. 현재 국내 4대 증권사의 평균 자기자본금은 미국 대형 투자은행(IB)의 30분의1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세계 대형 IB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지금이 국내 자본시장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IB 대형화에 나서야=국내 증권사들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대형화다. 특히 IB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내 증권회사들의 자기자본 확충이 선결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IB의 기본적인 역할은 투자자와 기업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장 조성자(market maker)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조성을 하려면 자기자금을 투자해 투자위험(risk)를 안고 가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국내 증권회사들은 자기자본 규모가 너무 작아 상대방과 거래할 때 높은 리스크를 지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IB와 관련된 큰 업무를 맡기에는 한계가 있다. 스탠다드차타드증권이 올해 초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대형 IB인 골드만삭스의 자기자본은 644억달러지만 국내 4대 증권사의 평균 자기자본은 21억달러에 불과하다. 정유신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 대표는 "특정 분야에 특화된 선진국의 중소형IB도 국내 4대 증권사보다 자기자본이 더 많다"며 "리스크 관리 강화 대응을 위해서도 대형화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등 신성장동력기업 육성을 위해서도 국내 IB 강화는 필수적이다. 신보성 자본시장연구원 금융투자산업실장은 "리스크가 다소 있는 ITㆍBT 등의 산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은행이 아닌 IB들이 할 일"이라며 "IB 위축으로 새로운 기업들이 자본시장에 진입을 못하면 시장이 위축되기 때문에 주요한 플레이어 역할을 IB들이 계속 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부 지분 소유 증권사 간 M&A가 대안=국내에 대형 IB를 육성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증권사 간의 인수합병(M&A)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국내 일반금융지주들은 증권보다는 은행에 관심을 쏟고 있고 산업자본들도 계열 증권사들을 키우기 위한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의 한 전문가는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증권회사들을 합병시켜 대형 IB를 육성하는 것이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며 "정부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산업은행 계열회사들의 IB 부문을 대형화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중소형 증권사들은 업무의 특화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기업공개(IPO)나 회사채 발행 등 특정 분야에 강점을 만들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증권회사 대표의 임기를 늘려 장기적인 안목에서 수익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고 ▦금융지주회사의 계열사 구분을 현행 은행ㆍ증권ㆍ보험 등에서 CIB사업부ㆍ웰스매니지먼트 등 업무 영역에 따라 나누는 방안도 국내 증권업계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한 방안으로 추천됐다.
◇자산운용회사의 국제화는 필수=증권업과 함께 한국 자본시장의 양대 축 중 하나인 국내 '자산운용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자산운용회사의 역량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좁은 국내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국내 자산운용회사가 해외에서 내놓은 펀드에 외국인들이 믿고 투자할 수 있을 만큼 평판을 높이는 것과 외국인들이 국내 증시에 투자할 수 있을 만큼 좋은 펀드상품을 내놓아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김유석 금융투자협회 집합투자산업팀장은 "외국 자금을 국내 펀드에 끌어들여서 자본이득을 취할 수 있어야 국내 자산운용회사들이 제대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며 "미래에셋자산운용ㆍ삼성자산운용ㆍ한국투자신탁운용 등이 홍콩ㆍ미국ㆍ브라질 등에 진출해 있지만 자본이익 취득의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국내 자산운용회사들이 성장은 했지만 글로벌 운용회사들과 경쟁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있어 역량을 강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재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외국 회사들과 외형으로 경쟁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10년 정도는 국내시장을 빼앗기지 않고 운용실적(트랙레코드)과 사이즈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물론 여건이 충족이 되는 운용회사들은 해외 진출도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비교적 외형이 작은 국내 자산운용회사들은 '특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종합자산운용회사라고 해도 'A운용은 부동산투자를 잘하고 B운용은 인덱스펀드에 강점이 있다'는 식의 평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김재칠 실장은 "현재 시장에는 유사한 상품이 많고 특화된 운용회사는 많지 않다"며 "앞으로 사모펀드ㆍ헤지펀드 등이 국내시장에서 활성화될 것에 대비해서라도 독립적인 사업 영역을 갖춘 특화된 운용회사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펀드를 통한 사회안전망 구축=펀드를 '재테크의 수단'이 아닌 '사회보장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투자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작게는 자산운용회사들이 퇴직연금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투자자의 노후를 일정 부분 보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인센티브를 주고, 크게는 어린이펀드ㆍ학자금펀드ㆍ주택마련펀드ㆍ노후펀드 등으로 연결되는 '전생애에 걸친 펀드투자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정부가 취약계층의 펀드투자자금을 보조하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김유석 팀장은 "결혼ㆍ육아ㆍ노후 등 인생에서 자금이 필요한 시점을 연결해줄 수 있는 펀드상품이 투자자들에게 호응을 얻으면 장기투자라는 펀드투자문화가 정착될 수밖에 없다"며 "국내 자산운용회사들이 '장기 분산투자를 통해 투자수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주겠다'는 철학을 확립하는 데는 큰 기여를 했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국가가 펀드를 통한 사회보장의 철학을 제시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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