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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갖고 있는 순환출자는 '양날의 칼'이다. 한쪽으로만 보면 대주주가 큰돈을 들이지 않고 기업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고리가 하나만 끊기거나 적대적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순환출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든다. SK그룹을 공격한 '소버린 사태' 이후에도 국내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데 주저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물산 사태에서 봤듯 더 이상 서두르지 않으면 대기업 1~2곳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배구조 개편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지배구조에 정답은 없지만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해 주주와 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투명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며 그 작업을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19일 "(삼성물산 사태는) 결과적으로 국민들이 합심해 특정 대기업에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헤지펀드가 들어왔을 때는 대상 기업이 그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이고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면 그때는 우군을 다시 찾기 힘들 것이라는 냉엄한 경고의 메시지다.
이 때문에 앞으로 삼성을 포함한 주요 대기업들이 향후 지배구조를 어떻게 가져갈지에 대한 계획을 이제부터라도 새로 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성공하더라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삼성물산 사태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배구조에 정답은 없지만 주주와 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합리적인 수준에서 향후 지배체제를 어떻게 가져갈지 그림을 다시 그릴 필요가 있다"며 "예전처럼 밀어붙이기 식으로는 국민이나 주주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올 초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블록딜 무산도 시장과의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이는 경영권 방어제도 도입 논의를 위해서도 중요한 부분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실제 주주 친화적인 경영을 더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삼성물산의 경우 엘리엇의 공격이 있은 후에야 거버넌스위원회를 만들었고 현대차도 한국전력 부지 매입건이 논란이 된 후에야 이를 추진했다. 선제적으로 나서기보다 한발 늦는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은 주주 친화적인 경영에 취약한 측면이 있다"며 "보다 능동적인 정책을 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어떠한 노력을 하지도 않는데 경영권 방어제도를 도입하자고 하면 대기업 특혜라는 말이 또 나올 수 있다"며 "적정 수준에서 세금도 내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지배구조 개편과 승계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경영권 방어제도 도입논의는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이미 헤지펀드의 공격이 현실화하고 있는데다 국가 기간산업을 포함해 기업들의 갖고 있는 방패가 주요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한 탓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경영권 제약 장치도 많다.
신석훈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소버린이 SK그룹을 공격했을 때 감사위원 선임 건을 두고 대주주는 3%밖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어서 고생했다"며 "이를 포함해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제한 문제와 대기업 관련 규제를 전반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과도하게 주주나 외국인의 입김에 휘둘려 투자나 기업의 장기 성장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실제 외국인들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를 포함해 국내 주요 기업의 지분 40~60% 안팎을 갖고 있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들의 지배구조나 오너경영 체제에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는 지배구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수익률만 높으면 된다는 논리다. 이 때문에 우리 실정에 맞는 적정한 지배구조를 갖추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얘기가 많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때부터 이어져온 오너경영 체제도 공과는 있지만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냈다는 점만큼은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일본 도요타도 순환출자구조로 돼 있는 것처럼 제도별로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게 맞다고 할 수는 없다"며 "우리 실정에 맞는 지배구조를 다시 한 번 고민해볼 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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